작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에 부쳐
목하(!) 대한민국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중견작가 신경숙 문학의 ‘표절’을 제기한 동료작가의 고발이 화제다. 시인이자 작가인 이응준이 <허핑턴포스트>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드러난 표절 사실은 일단 꽤 충격적이다. [관련 기사 :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일단’이라고 전제한 것은 그가 제시한 표절 의혹이 아직 대중의 공감과 동의를 받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표절 혐의는 제시한 증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문가는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지만, 표절 혐의는 상식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동료작가가 고발한 ‘신경숙의 표절’
이응준은 신경숙이 자신의 단편에다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의 소설의 한 단락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물론 그것은 ‘인용’도 ‘패러디’도 아니다.
이응준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다른 소설가’의 저작권이 엄연한 ‘소설의 육체’를 그대로 ‘제 소설’에 ‘오려 붙인 다음 슬쩍 어설픈 무늬를 그려 넣어 위장하는’, 그야말로 한 일반인으로서도 그러려니와, 하물며 한 순수문학 프로작가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명백한 ‘작품 절도행위―표절’”이다.
이응준이 제기한 표절이 사실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는 아래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과 신경숙의 그것을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두 글은 이응준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는데 제시한 글에서 한 자도 빼거나 더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신경숙 소설에 대한 내 소회를 비평가 오길영의 의견에 기대어 토로한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내 문학적 소양이나 식견은 그이를 전문적으로 비평할 수준은 물론 아니다.
단지 나는 그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문학에 대한 평단의 평가에 대해서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소회를 전하면서 한 비평가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을 뿐이다. [관련 글 : 한 독자와 비평가의 ‘신경숙 읽기’]
무명의 독자에 불과한 나는 문단의 상황이나 신경숙의 문단 안에서의 지위 따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신경숙이 밀리언셀러의 작가로,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메이저 출판사인 ‘창비’에서 발간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70년대 이후 진보문학 진영의 맏형 노릇을 해온 창비가 신경숙에게 ‘만해문학상’을 줄 때부터 나는 머리를 갸웃했었는데 그때 품은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응준의 글에 따르면 신경숙은 ‘표절 시비가 매우 잦은 작가’다. 신경숙은 소설 「딸기밭」에서 재미 유학생의 유고집에 실린 글을 여섯 문단이나 베꼈다.
또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단편 「작별 인사」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들 속 문장과 모티프와 분위기 들을 표절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 제시된 사실에 대해선 유감스럽게도 나는 전혀 아는 게 없다.)
이응준은 ‘예술가의 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는 표절은 예술가의 인간적 결점이나 약점, 부도덕과 일탈, 광기와 위악 따위를 넘어서는 ‘범죄’라고 명쾌하게 단언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광기에 젖어 온갖 패악을 부렸다고 한들 누구도 예술가로서의 그를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가 누군가의 그림을 표절했다면 문제는 사뭇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평생 지독한 성욕에 시달렸던 피카소의 마성(魔性)에 가까운 여성 편력을, 마약 과용으로 요절한 바스키아를, 장 주네의 도둑질과 비역질을, 가족을 내팽개치고 타히티로 가버린 이기주의자 고갱을, 절친한 친구 부부와 동거하며 그 친구의 부인을 사랑했던 마야코프스키를, 랭보와 베를렌느의 무자비한 퇴폐와 일탈을 예술사가 심판했다는 민망한 소리는 이제껏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나 만약 저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작품을 표절했다면 지금 우리는 그를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의 범죄자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 이응준,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중에서
성공한 ‘작가’의 표절은 ‘무죄’다?
그러나 그의 이어지는 진술을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런 ‘범죄행위’가 한국 문단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별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작가의) 책이 많이 팔린다거나 그것과 음양으로 연관된 문단 권력의 비호’를 거론한다.
“그러나 표절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한국 문단이다. 단, 조건이 있다. 책이 많이 팔린다거나 그것과 음으로 양으로 연관된 문단 권력의 비호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설혹 표절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더라도 그저 약간의 소란 아닌 소란을 거쳐 다시 납득할 수 없는 평온으로 되돌아갈 뿐인 것이다. 어느덧 표절에 대한 도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한국의 순수문학 안에서 표절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치밀하게 진행돼 몽롱하게 마무리된다.”
- 이응준, ‘위의 글’ 중에서
글쎄, ‘문단 권력’이란 말이 낯설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이 그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단순 과실이 아니라 범죄라고 할 수도 있는 표절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응준은 예의 ‘문단 권력’ 안에 작가 신경숙도 포함한다.
“신경숙은 단순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한국 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 이응준, ‘위의 글’ 중에서
글쎄, 작가는 권력이 아니라 권력에 저항하여야 하는 이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자못 궁금하다. 신경숙이, 또는 이른바 권력으로 지칭되는 평론가들과 문단의 모모한 인사들이 누리고 행사한다는 그 ‘문단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행사되는지 말이다.
뒤따른 각종 보도를 살펴보면 이 논란은 ‘재점화’되었다고 한다. ‘재점화’라면 이 논란이 일어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 그때의 논란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고 매듭지어졌던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고 하는 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문단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건가.
신경숙 말고도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는 여럿이다. 그러나 이들의 표절 의혹도 논란만으로 끝나고 흐지부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응준이 표절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 없는 곳이 한국 문단이라고 한 얘기가 흰소리가 아니다.
우리 독자들은 예의 문단 권력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응준이 말하고 있는바 ‘대한민국의 대표 소설가가 일본 극우 작가의 번역본이나 표절하고 앉아 있는 한국문학의 도덕적 수준을 우리 스스로 바로잡는 것’에는 역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문단은 이 숙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것은 이응준의 말처럼 ‘한국문학의 이 국제적 망신을 치유할 방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즐겨 읽는 한국문학이 고작 지질한 표절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독자들의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벨문학상 소식이 요원해도 여전히 한국문학을 끌어가고 있는 많은 작가의 힘겨운 싸움을 응원하는 다수 독자의 마음일 터이다.
이제 문제는 한국문학이 맞닥뜨린 이 해묵은 숙제, 부끄러운 유산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매듭짓고 갈 것인가만 남았다.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한낱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문학이 청산하고 가야 할 문제로 인식하여야 마땅할 책임 있는 문단의 지도적 인사들, 비평가들의 대응을 우리가 지켜보는 일 말이다.
2015. 6. 17. 낮달
신경숙은 결국 사과했다. 처음엔 “‘우국’을 읽은 적이 없다”라고 부인했지만, 논란이 커지자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국’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한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문제를 제기한 이응준씨를 비롯해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사실상 표절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문단 권력으로 일러지는 ㈜창비와 계간 <창작과비평>의 편집인 백낙청은 매우 모호한 언술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우리 문단은, 혹은 우리 사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왔다. 독자의 권리가 은근히 무시되고, 그 항의와 분노 따윈 문단 권력의 성채를 넘을 수 없다. 조직되지 않은 독자의 힘은 무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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