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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논란’ 이후, 독자는 ‘호갱’인가

by 낮달2018 2020.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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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 이후의 독자

▲ 고종석은 트위터를 통해서 이 논란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

‘신경숙 표절 논란’을 다룬 “성공한 ‘작가’의 표절은 ‘무죄’다?”를 쓰고 난 뒤, 나는 적어도 기대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게 일정한 변화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 아직 결과를 말하기엔 이른 건 사실이지만 - 나는 내가 아직도 순진하고 어수룩하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했다.

 

발 빠르게 창비가 관련한 입장을 밝혔고 신경숙도 창비에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이다. 신경숙은 “<금각사> 외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지 못했다. <우국>은 모르는 작품이다. 독자들께 미안하고 마음 아프다.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다.”고 밝혔다고 했다.

 

고종석, “창비는 돈 몇 푼에 제 이름을 팔았다”

 

신경숙의 입장은 요약하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믿어달라.’는 것이다. 신경숙의 작품집을 출판하고 있는 창비도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 어렵다. 비슷한 점은 신혼부부 등장 정도”고 “인용 장면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라고 하며 표절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작가와 출판사의 입장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자못 냉소적이다. <우국>을 읽지 않았다는 작가의 변명에 대해서 사람들은 “안 읽었는데 작품의 핵심 단락을 통째로? 토씨도 거의 같이? 단락이 저절로 기어들어갔나?”라고 빈정댔다.

 

창비의 입장에 대해서도 ‘노래도 두 마디 같으면 표절’인데 “전체 맥락에서 중요한 대목이 아니라면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는 희한하고 궁색한 궤변”이라며 질타하고 있다.

 

창비는 단지 문학전문 출판사라는 지위에 머물지 않는 이름이다. 창비는 <창작과비평>이라는 계간지를 통해 이루어졌던 6, 70년대 군부독재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창비의 이런 성격을 환기하며 창비의 해명을 가리켜 “지적 설계론 찜 쪄 먹을 우주적 궤변”이라며 직격탄을 던진 이는 소설가 고종석이다.

 

“창비가 내 인내심을 허물어뜨렸다. 이게 다 신경숙 씨가 창비에 벌어준 돈 탓이다. 창비는 한때 거룩했던 제 이름을 돈 몇 푼과 맞바꿨다.”

 

“신경숙 씨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에 대해 창비가 내놓은 입장은 이 출판사가 독자들을 돈이나 갖다 바치는 호구로 봐 왔고, 앞으로도 호구로 보겠다는 뜻이다. 나는 신경숙 씨의 입장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만, 창비의 입장에 대해선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창비가 곧 백낙청인 만큼, 창비의 타락은 백낙청의 타락이다.”

 

글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논란의 후속 보도를 살펴보면서 나는 우리 문단이 이 문제에 관해서 몹시 말을 아끼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나 비평가, 교수들이 ‘익명’으로, 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고종석처럼 실명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힌 이는 많지 않다.

 

“최근 불거진 신경숙의 표절 사건은 한국문학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신경숙이 앞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면 독자들과 문인들은 ‘우리 문학이 이렇게 왜소해지고 타락했구나!’ 하며 탄식할 사건입니다.”

  - 문학평론가 이명원

 

역시 2000년을 전후하여 ‘문학 권력 논쟁’을 비롯한 문단 안팎의 이런저런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두 평론가 권성우와 이명원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들은 그 시절에 각각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작과비평사’ 같은 주요 계간지를 내는 메이저 출판사를 비판한 바 있었다.                 

 

“이응준 소설가가 커다란 용기를 내서 중요한 문제 제기를 했다.”

 

“이번 건이 한국 문단과 평단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를 제대로, 면밀하게, 정직하게 응시하지 않고는 한국문학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단 생활 포기할 각오로 이 글을 발표한 것 같던데, 그가 어려운 입장에 처한다면 기꺼이 그의 편에 설 것이다.”

  - 문학평론가 권성우

 

2001년에 이들이 창비에 가한 비판은 지금도 유효한 듯 보인다. 당시 이들은 창비가 “문학계와 우리 사회의 중대한 현안에 대한 성실한 대응을 회피하면서, 현재까지 축적된 창비의 상징 권력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만족하고 있”(권성우)으며, 더 나아가 “지나치게 실리에 집착하는 출판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이명원)다는 것이었다. [<한겨레>(2001.8.19) 참조]

 

“표절 논란을 대해 온 일련의 태도로 인해 상당히 참담하다.”

 

“1999~2000년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크게 불거졌지만 그리 머지않은 200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2004년에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을 지냈다는 건 (표절 논란을) 그냥 없었던 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 소설가 홍형진

 

“문단 내부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자성이 일어나고 평론가 비평가들이 비평 본연의 입장으로 회복을 해서 이런 문제에 그때그때 적시에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는 개혁들이 빨리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 문학평론가 오민석

 

“일반적으로 문단 사람들은 좀 알아서 기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 문제제기를 하죠. 만약에 껄끄러운 사람이 되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일단 원고 청탁을 하지 않는다든지, 책을 안 내준다든지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까 사실상 활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입니다.”

  - 문학평론가 조영일

 

익명이든 실명이든 이번 논란에 대한 작가,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체로 표절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는 게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통과의례라고 본다. 진보적 문학단체로 알려진 한국작가회의의 정우영 사무총장이 뜻밖에 신경숙을 두둔하는 듯한 이야기를 해서 입길에 오르내린 정도다.

▲ <서울방송(SBS)> 앵커 김성준은 정우영 사무총장의 발언을 간접적 비판하였다.

“이번 표절 논란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작가 자신일 것이다. 당장 작가에게 비난의 화살과 답변을 추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줘야 할 것이다.”

 

“신 작가는 필사로 자신을 단련해온 작가로 알려져 온 만큼 작가가 필사한 부분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표절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표절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한국문학의 소중한 자산인 만큼 충분한 해명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고 본다.”

   - 작가회의 사무총장 정우영

 

충격? 작가 아닌 ‘독자’가 받았다!

 

정우영은 작가를 두둔했지만, 그가 놓친 게 있다. 이번 논란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작가가 아니라 신경숙의 문학에 열광하면서 그를 밀리언셀러의 작가로 밀어 올린 독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신경숙의 감각과 스타일이 일본의 극우 작가의 글을 훔친 거라는 걸 확인하면서 얼마나 허탈해 할까.

 

익명으로 의견을 밝힌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신경숙의 표절 혐의는 90년대 동료작가들은 모두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좋은 글귀를 메모해두고 원고에 끼워 넣는 게 몸에 밴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것은 과거 표절 시비가 일었을 때 문단의 권력자들이 쉬쉬하며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동업자로서 (표절을) 지적하기도 어렵지만 문학 권력층이 그렇게 반응하니 누가 문제를 제기하겠느냐는 것이다.

▲ 창비의 직원들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자괴감을 트위터로 드러내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이 드러낸 우리 문학의 민낯

 

결국, 돌고 돌아서 문제는 다시 원점이다. 유명 작가의 표절은 결국 비평가들과 주요 문예지 출판사 등 문학 권력들 사이의 ‘침묵의 카르텔’을 통해서 은폐되면서 공론화될 기회를 잃었다. 오늘 신경숙의 표절을 통해 드러난 우리 문학의 민낯은 바로 그 저급한 담합의 결과인 셈이다.

 

그런 담합이 이루어지는 문학 권력이 실질적 영향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논란이 ‘한국 문단과 평단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시험지가 될 가능성은 절대적이다. 그예 창비의 직원들까지 트위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지만,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이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문학 권력이다. 창비와 신경숙, 그리고 그를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리는데 이바지한 저명 비평가들이 이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창비 문학출판팀에서 내놓은 예의 해명이 고작이다.

▲ 6, 70년대 진보문학 진영 맏형 노릇을 해온 창작과비평사는 이제 (주)창비가 되었다. 누리집 갈무리

창비 누리집(http://www.changbi.com/)의 계간 <창작과비평>의 소개란에는 편집인 백낙청과 주간 백영서를 비롯한 이 나라의 뜨르르한 비평가들의 면면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잘은 몰라도 우리 문학판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작과비평>은 문학 계간지고 신경숙은 신경숙이라고? <창작과비평>은 신경숙에게 ‘만해문학상’을 안기고 그를 창비의 전속 작가처럼 지원하여 신경숙이 판 밀리언셀러를 출판했다. 신경숙은 창비에 돈을 벌어준 작가,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가 ‘상품처럼 소유하고 있는 작가’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창비의 돈을 보호하는 일이 된 것이다.

 

“신경숙 씨에게 별 관심은 없지만 내가 그를 비판한다면 문예지들이 내게 청탁을 안 하고, 그럼 묻히면서 문단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 글은 어떤 반응도 없이 묻힐 것이다. 그만큼 한국문학계의 활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익명으로 의견을 제시한 두 문인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는 것은 씁쓸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 논란의 인과처럼 서늘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떠들썩하게 시작은 했지만, 이 논란이 결국 중동무이가 되고 말 거라는 느낌은 대체 무언가 말이다.

 

창비 누리집 게시판에는 독자들의 비난이 거세다. 그러나 새삼 확인하는 것은 문학의 판(시장)을 키우고 그걸 우리 시대의 문화로 끌어올린 절대다수의 독자는 이 논란의 피해 당사자이면서 정작 그걸 바로잡을 권리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2015. 6.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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