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지리’가 아니라 ‘복 맑은탕’으로 써야 맞다
나는 일본어와는 인연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제2외국어는 독일어를 배웠다. 한 일 년 남짓 배웠나, 기억나는 건 독일어를 가르치던 키 작은 선생님과 독일어 알파벳 ‘아, 베, 체, 데, 게, 하……’, 그리고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가 고작이다.
그 무렵 대부분의 고교에서는 독일어나 불어를 가르쳤다. 80년대 초반에 부임한 첫 학교에서도 불어를 채택하고 있었다. 몇 해 후에 학력고사 득점에 유리하다면서 일본어로 바꾸기까지 그 여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친 사람은 임용 동기인 여교사였다.
70년대만 해도 독학으로 하는 일본어 공부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데에 워낙 오불관언이었다. 천성이 게으른데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대한 부담을 굳이 자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는 일본어는 어린 시절부터 쓰던 일어 찌꺼기가 다였다.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일본어 낱말을 지껄이며 자랐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던 일본어로는 ‘벤또(도시락)’를 비롯하여 ‘에노꾸(물감)’ 따위였는데 그 시절에 ‘진흙’이라는 뜻으로 쓰던 ‘쪼데’ 역시 일본어인 듯싶은데 일본어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다.
‘가위바위보’를 우리는 ‘잔켄뽀’로 불렀고 편을 가르기 위해 하던 ‘하늘 보고 땅’을 ‘데미데찐’이라 했는데 이 역시 일본어인 듯한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중학교에 진학해 교복을 입으면서 흔히 쓰던 ‘기지’가 ‘천’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줄은 훨씬 자라서야 알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당구를 즐기는 아이들이 쓰는 일본어를 유행처럼 따라 썼는데, ‘엉터리’라는 뜻의 ‘후로쿠’와 ‘부풀이’를 뜻하는 ‘후카시’를 꽤 썼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어른들이 주로 쓰는 일본어 쪼가리를 하나씩 쓰는 게 일종의 은어 비슷하게 이해되던 때여서 너도나도 이런 말을 무심히 썼다.
무분별하게 쓰는 일본어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게 되면서다. 모국어에 대한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게 국어 전공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하면 일본어는 가려 쓰고 대체어를 찾아서 쓰는 형식이었지만 그나마 우리말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교단에 서게 되면서 매무새가 새로워졌다. 수업을 통해서 일본어 찌꺼기를 쓰지 않도록 지도하면서 동시에 동료들이나 지인들에게도 이를 환기하는 방식이었지만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 대의를 존중하고 잘 따라주었다.
요즘 중고생들은 예전 우리가 자랄 때와 비기면 거의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 아직 대체하는 말이 정착되지 않은 몇몇 단어가 쓰이는 걸 빼면 아이들의 일상어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순화된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어’라는 사실도 인식되지 못하는 단어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는 게 문제다.
공사판의 ‘막일꾼’을 일러 ‘노가다’라고 부르는데 기실 이 말의 원어는 일본어 ‘도카타(土方)’다.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랐으니 우리말이 다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국립국어원의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에서 최근 다듬은 말 몇 개를 보면서 뜻밖에 우리말 속에 들어온 일본어의 뿌리는 깊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복어 전문 음식점에 가면 ‘지리’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인다. ‘매운탕’과 다른, 고춧가루를 쓰지 않은 맑은국‘ 정도로 이해했던 이 말도 일본어였던 모양이다. 국립국어원의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에서는 ‘지리(ちり)’를 다듬은 말로 ‘맑은탕’을 최종 선정했다고 한다. ‘지리’는 ‘생선과 채소, 두부 따위를 넣어 맑게 끓인 국’을 이르는 말이다.
‘지리’와 같이 다듬은 ‘세고시’(작은 생선을 손질하여 통째로 잘게 썰어낸 생선회)도 일본어였던 모양이다. 나는 뼈가 씹히는 이 회를 즐겨 먹는다. ‘세꼬시’라고 부르면서도 그게 일본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다듬은 말은 ‘뼈째회’인데 글쎄, ‘맑은탕’에 비기면 정착하는 게 쉽지 않으리란 예감이 든다.
‘글쎄, 일식을 즐기지 않아서일까, 후리카케’는 생전 처음 듣는 일본어다. 이 말은 ‘맛가루’로 다듬었다는데 아마 별 저항 없이 수용되지 않을까 싶다. ‘일식집에서 본 음식이 나오기 전에 밑반찬으로 딸려 나오는 여러 음식’을 뜻하는 ‘쓰키다시(つきだし)’는 와전되어 ‘찌개다시’라고 쓰는 경우가 많은 말이다.
이를 다듬은 말은 ‘곁들이찬’이다. ‘곁들이’도 ‘찬’도 적당하다는 느낌이다. 그게 언중들에게 얼마만큼 제대로 수용되어 대체어로 정착할 것인가는 별개로 말이다. ‘곁들이찬’에는 ‘뼈째회’와는 다른 어떤 새말로서의 품격 같은 게 담겨 있는 듯하지 않은가.
서투르고 난삽한 일본어 찌꺼기를 쓰는 일도 그렇고, 와전되어 일본어도 아니고 우리말도 아닌 잡탕 말을 쓰는 것도 그렇다. 역시 말이란 가볍고 단순하게 의미를 드러내면서 간결하게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맑은탕’이나 ‘뼈째회’, ‘맛가루’와 ‘곁들이찬’이 우리네 일상의 말속에 살갑게 몸을 붙여서 쓰였으면 정말 좋겠다.
2013. 5.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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