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2인칭 대명사 ‘당신’ 논란
요즘 ‘당신’이란 낱말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권발 소식이다. 거두절미, 요점만 따서 말하면 이렇다. 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충청도에서 열린 당원 보고대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국정원과 단절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 그래야 당신의 정통성이 유지된다.”
이 발언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 의원이 대통령에게 쓴 ‘당신’이라는 지칭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제2의 귀태’ 발언이라며 반발,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 측은 “‘당신’은 상대방이 없을 때 높여 부르는 말이지 막말이 아니”라고 일축했다고.
당신, ‘막말’인가, ‘높임말’인가
여기까지는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정치적 공방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누리당은 대통령을 ‘당신’으로 지칭한 민주당 상임고문 이해찬 의원에 대한 징계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다음은 새누리당이 초선의원 35명 명의로 낸 ‘징계안 제출 이유’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높은 윤리의식을 가져야 함에도 이 의원은 지난 14일 민주당 당원 보고대회에서 6선 국회의원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윤리적 발언을 유포했다.”
이쯤 되면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시정의 갑남을녀들이 가진 보통의 상식과 언어 감각으로는 새누리당 초선의원들의 인식 수준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새삼 국회의원이 가져야 한다는 ‘높은 윤리의식’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대통령을 ‘당신’으로 지칭한 게 어찌하여 ‘비윤리적’인 발언인지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 논란을 공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선 ‘당신’이라는 지칭이 나온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그로 말미암아 피해를 보았다고 믿는 야당이 ‘국정원과 단절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역시 논란의 중심에 떠오른 ‘당신’이라는 낱말이다.
‘당신(當身)’은 대명사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당신’을 ① 하오할 자리에 쓰는, 듣는 이를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 ②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2인칭 대명사, ③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2인칭 대명사, ④‘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네 개의 풀이 가운데 일단 부부 사이에서 쓰는 ②와 이른바 극존칭 3인칭 대명사로 보는 ④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 제외. 남는 건 ①과 ③인데 같은 낱말인데도 여야의 해석은 극과 극이다. 여당 쪽에서는 ‘상대방을 낮잡아 이르는 2인칭 대명사’인 ③이라며 앙앙불락하고 있고, 야당 쪽에서는 ‘하오할 자리에 쓰는 말’인 ①인데 뭐가 문제냐고 받아치고 있는 셈이다.
③은 ‘맞서 싸울 때’ 쓰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여당의 주장과 가까워 보이지만, 예문에서 보듯 주로 ‘해라’의 형식으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예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단지 하오를 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강변하면 답변이 궁해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해찬 의원 쪽의 대응에서 나온, “‘당신’은 상대방이 없을 때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는 실제 국어사전의 용례에는 없다. 대신 발화(發話) 현장에 없는 청자에게 간접적으로 전하고자 한 말이라는 점에서 ‘높임말’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신, ‘평등한 수평적 관계 지향’의 의미
사실 부부 사이, 또는 막역하지만 너나들이를 하기엔 거시기한 사이에 쓰는 말로 ‘당신’은 꽤 정감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무람없이 쓰는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존중이 필요한 낯선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두 사람을 잇는 ‘관계’는 파탄으로 치닫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일러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이런 경우 말고도 존재한다. 아들이 아비와 어미에게, 또는 무력한 인간이 신(神)에게 감히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다. 물론 이 두 경우는 직접 대면의 상황은 아니다. 어버이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편지글 형식처럼 쓰이는데, 이 경우도 직접 전하는 말은 아니다. 청자를 어버이로 하지만 이는 간접적으로 어떤 뜻을 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의 지칭어 ‘당신’은 둘만의 대화가 가능한 공간, 타인의 범접이 허용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특수성에 기댄다. 신을 ‘당신’이라는 지칭어로 부르는 경우도 거의 같은 성격을 갖는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그 관계의 특수성을 넘어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지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야당 대표 출신의 중진의원이 자당의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대통령을 ‘당신’으로 지칭했다. 그것은 여당의 주장처럼 ‘막말’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주체로서 권력을 견제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권력의 크기로 치면 ‘만인지상’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절대권력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것도 야당 의원의 그것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교과서는 그렇게 가르친다. 대통령도 주권자 국민의 위임을 받은 이고, 이른바 ‘선량’이라고 불리는 국회의원 역시 주권자의 위임을 받은 ‘헌법기관’이라고. 두 지위 사이에 권력의 크기의 차이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여당이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특수성의 결과다. 명색이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국가 원수에게 ‘당신’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게다. 그런 정서가 우리나라 국민의 일반적 정서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입맛이 쓰다.
참고로 두 사람의 나이를 검색해 보았더니 공교롭게도 둘 다 1952년생, 우리 나이로 예순둘 동갑이다. 학연으로 이어진 관계였다면 반말로 정서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나이다. 게다가 ‘귀가 순해진다’[이순(耳順)]은 나이, 예순을 넘겼다는 걸 생각하면 이 논란이 한층 더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정치적 공방의 과정에서 한층 전투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야당 중진의원이 대통령에게 던진 ‘당신’이라는 호칭이 6선의 헌법기관을 징계에 넘길 만큼 잘못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일까. 당사자인 여당은 손사래를 치지만, 여전히 절대 권력은 ‘당신’이라고 결코 불러서는 안 되는 ‘성역’인가.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정치적 공방의 한 장면에 불과한 일이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그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현주소, 정치적 관용의 수준이라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밀레니엄 시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2013. 7.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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