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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캐럴에 묻힌 ‘고엽제’, 혹은 주둔 50년

by 낮달2018 202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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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왜관읍 소재 미 주둔군 캠프 캐럴과 ‘고엽제’

▲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매립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퇴역군인 스티브 하우스와 고엽제 대책 국민회의 박석운 .

인터넷에서 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가 대구 인근 미군기지 안에 대량으로 파묻혀 있다는 표제를 읽은 것은 오늘 정오께다. ‘대구 인근 미군기지’라면 더 볼 게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기사는 그 기지가 칠곡군 왜관읍에 소재한 ‘캠프 캐럴’이라고 전하고 있다.

 

1978년 캠프 캐럴에 묻힌 ‘에이전트 오렌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왜관읍은 칠곡군청 소재지다. 조선 시대 일본인이 통상을 위해 머물던 집단 거주지였던 보통명사 ‘왜관(倭館)’이 고유명사로 남은 고장이다. 아시아 최대 군수 보급기지라는 캠프 캐럴(Camp Carrol)이 왜관에 자리 잡은 것은 1959년이다. 군은 아니지만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미군이 들어온 것이다.

 

다음 스카이뷰에서도 나타나 있지 않은 이 부대는 자그마치 97만 평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라고 한다. 스카이뷰에서 보면 읍내 시가지는 강과 기지 사이에 끼어서 길쭉한 모습이다. 한산한 정문 쪽과는 달리 후문 쪽에는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하는 각종 상가가 발달했고,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한창때는 이른바 ‘양공주’ 수십 명이 미군들을 상대했다.

▲ 고엽제 매립을 증언한 퇴역군인의 당시 근무 사진

그런데 1970년대에 이 부대에서 근무한 미군이 기지 안에 수천 킬로그램의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묻었다고 폭로했다. 미국 애리조나주 지역 방송인 KPHO-TV(미국 CBS 계열)의 최근 탐사보도를 통해서다. 중장비 기사로 복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는 인터뷰에서 1978년, 55갤런짜리 드럼통 250개를 땅에 파묻었는데 일부 드럼통에는 ‘베트남 지역 컴파운드 오렌지’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KPHO-TV는 “에이전트 오렌지와 관련해 미국 국방성은 ‘월남전 당시 쓰고 남은 것은 바다에 폐기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번 폭로와 관련해 미 국방성이 조사에 나섰다”고 전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소식은 이게 다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10여 종의 암과 신경장애, 당뇨, 기형아 출산 등을 유발하는 맹독성 고엽제다. 6, 70년대 베트남전 당시 대량 살포돼 당시 주민들과 참전 병사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남긴 사용금지 화학물질이다. 국내에서 보상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고엽제 관련 단체의 회원들은 모두 베트남전에서 피해를 본 이들이다.

 

1978년도에 묻었다니 30년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고엽제의 폐해를 일반이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왜관 땅 어디엔가 묻혀 있을 이 고엽제가 주변의 생태계나 주민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어왔는지, 또는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거기 사는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스카이뷰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궁리해 봐도 고엽제를 묻었다는 지역이 어디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그 부대를 구경한 게 고작일 뿐이니 나는 기지의 정·후문의 이미지로만 캠프 캐럴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비행기로 맹독성 농약 고엽제(위)를 살포하였다.

어디 없이 군 기지는 후문 쪽이 번성한다. 캠프 캐럴도 마찬가지였다. 대구로 빠지는 간선도로변에 있는 정문 앞은 민가였고, 변변한 가게도 하나 없었던 것 같다. 번쩍이는 헬멧을 덮어쓴 미군 병사들이 위병을 서는 정문 아치에는 ‘우리는 만족한 고객을 원한다’는 구호가 한글과 영문으로 각각 쓰여 있었다.

 

‘만족한 고객’을 원한다던 미군기지

 

▲ 캠프 캐럴의 정문 벽의 표지.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해 주말마다 시골에 다녀갈 때마다 버스 차창 너머로 부대 정문을 바라보면서 ‘만족한 고객’이 무슨 뜻일까를 곰곰 생각해 보곤 했다. 그것은 읍내 창고 문이나 밀가루 포대에 찍혀 있는 큼지막한 성조기와 태극기 아래 악수하고 있는 손 그림을 떠올리게도 했다.

 

한적한 정문 쪽과는 달리 반대편 군도(郡道) 쪽의 후문 주변은 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1Km 남짓한 후문거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잡화점과 술집은 물론, 양복점과 구둣방, 사진관과 가구점 등이 영문 간판을 단 채 미군 병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설픈 시골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근방에 포진한 양공주들이었다. 늘씬한 팔등신의 미인들이 껑충한 흑백의 병사들에게 매달려 거리를 오가는 것을 바라보며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쨌든 캠프 캐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한동안 한적한 소읍이었던 왜관 경제에 활기를 더했던 것은 틀림없다. 양공주와 계약 동거를 하는 미군들이 지출하는 달러가 바로 왜관 경제에 실한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던 듯하다.

 

80년대 들어 주둔 병력이 줄면서 후문거리는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영내로 들어가 지갑을 채워 버렸고, 계속되는 불경기에 양공주의 숫자도 점점 줄었다. 기지에서 간접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나마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들은 80년대 후반쯤이면 대구로 나가 출퇴근하는 타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미군들이 지역에 떨어뜨리는 건 똥밖에 없다’는 인식이 퍼져나간 게 이때쯤이 아닌가 싶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인식이 확산하면서 주민들도 좀 냉정해졌던 것 같다. 기지의 존재가 지역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바라보는 관점도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 경제에 도움을 준 ‘자유의 십자군’ 정도로 생각하던 주한 미군에 대한 인식은 냉철하게 이해를 짚어보는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실제 왜관에서 4Km쯤 떨어진 면 지역에서 태어난 데다가 중학교 때부터 대구로 나가 자라서 지역과 미군에 대한 내 이해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미군 범죄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러나 기지와 미군에 대한 주민들의 시선에서는 애증이 엇갈리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미국과 미군의 존재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과 미군은 그것 자체로 절대 선(善)이었다. 공산군의 마수에서 나라를 건져준 은인인 이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강대국 앞에서 그것의 실체를 생각해 보는 일은 언감생심,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게다.

▲ 1950년대와 현재의 왜관 시가지 전경 ⓒ 칠곡군

지난해 5월, 부대 창설 50주년을 맞은 캠프 캐럴은 부대를 일반인에게 공개했던 모양이다. 한국군과 미군의 항공기, 전술 차량과 장비가 전시되고 각종 공연과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가 베풀어졌다고 한다. 나는 아스라하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찾았던 기지를 떠올린다.

 

기지와 군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애증’

 

그때도 5월이었는데 그 당시 캐럴 부대는 해마다 ‘미군의 날’이라는 행사로 부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말고 마땅한 축제가 없었던 당시 칠곡에서 미군의 날 행사는 최고의 축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새벽밥을 먹고 도시락을 사 들고 20리 길을 걸어 그 행사에 참여했다.

▲ 캠프 캐럴의 부대 개방 (2010년 5월) ⓒ 칠곡군

엄청난 키와 큰 코, 털북숭이 몸을 한 미군 병사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부대 안의 온갖 시설물과 전시된 탱크와 항공기 따위의 병기들 앞에 시골아이들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것은 온몸에다 색색의 페인트를 칠한 털북숭이 백인들의 모습이었다. 그게 ‘바디페인팅’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이다.

 

▲ 다음 스카이뷰로 본 왜관읍

그때, 친절하게 시골아이들을 안내해 주고 껌과 초콜릿을 나눠준 미군 병사들에 대한 기억은 당연히 우호적이다. 우리가 미국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광주항쟁’이었고, 이 나라의 정치적 변화는 저들의 이해에 알맞게 조정되고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깨우치면서 우리는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저들의 기억을 바래갔던 것이다.

 

3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나는 만 6년을 왜관에서 살았다. 1년 반은 지역의 고교 교사로, 나머지는 해직 교사로.

 

아웃사이더로 바라본 왜관은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사람들은 애증 사이에서 약간 혼란스러웠던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미국, 혹은 미군은 ‘양놈들’이라는 도매금으로 불리는, 경원하여야 할 어떤 존재였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들이 온몸으로 체현하는 선진 문화 앞에서 주눅이 들기도 했다.

 

지역의 유지들이나 중산층들은 가끔 기지 안의 피엑스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 모임을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생활양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아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사용자인 미군 앞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기지는 치욕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고향을 드나들면서 가끔 이 소읍과 후문 부근을 스쳐 가기도 한다. 끝도 없이 이어진 철조망의 벽, 기지 안에 수백 대씩 열 지어 선 탱크와 항공기들, 철조망에 섬뜩하게 쓰인 경고- 무단으로 침입하면 발포함-를 지나치면서 우리는 이 나라와 미국의 거리를 생각하곤 한다. [관련 글 : 좋은 이웃인가, ‘힘센 이웃인가, ‘우리 안의 미국과 우리 밖의 미국]

 

조금 전 9시 뉴스에서 환경부는 전직 미군의 증언에 따라 캠프 캐럴 주변에 대한 환경조사에 들어간다고 한다. 또 이 결과를 바탕으로 미군 측과 공동조사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미군 주둔지에서의 환경오염 문제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여전히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고려하면 캐럴 부대에서 벌어졌다는 이 가공할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2011. 5.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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