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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나이 듦’ 받아들이기

by 낮달2018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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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이든, ‘노화든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 혈압약은 혈관의 압력을 낮추고 낮은 압력을 유지할수록 혈관은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고 복용 중이다.

며칠 전 일이다. 퇴근하면서 며칠간 미뤄두었던 병원을 찾았다. 지난해 건강진단에서 나는 고지혈증 의심 판단을 받았고, 콜레스테롤을 떨어뜨리기 위해 지난달부터 약을 먹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 약이 떨어졌고 새로 약을 처방받으러 다시 병원에 들른 것이다.

 

내가 들른 병원은 가정의학과 의원이다. 젊은 의사가 시간에 쫓기지 않는 느긋한 자세로 매우 친절하고 상세하게 진료해 주어서 우리 가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금 불안해지는 기분을 간신히 가누고 있었다.

 

지난번 진료에서 혈압을 재고 의사는 ‘많이 높다’고 말했다. 나는 지난해 치른 두 번의 내시경 검사 때 쟀을 때 정상이었다고 대답하면서 무언가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혈압이 늘 일정한 수치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잴 때마다 ‘정상’과 ‘높음’을 넘나드는 수치 앞에서 나는 늘 떨떠름했었다.

 

혈압에 관한 한 우리 가족력은 이상이 없다. 나는 체질이나 기질적으로 가장 선친을 많이 닮았는데 아버지는 저혈압이셨다. 불과 3, 4년 전까지만 해도 내 혈압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나는 그걸 지나치게 믿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혈압이 가끔 정상을 상회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두 해 전이다. 한 번은 정상인데, 또 한 번은 조금 높게 나오는 형식이었는데, 그래도 따로 생활에서 불편하지 않았으니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자꾸 늘어나는 체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체중은 감당할 수 없다. 고등학교 입학 이래 30대 초반까지 나는 64Kg을 늘 유지했다. 군 생활 중에 70Kg을 상회한 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전역하면서 다시 원상을 회복한 나는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다.

 

단순히 잘 앓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면 나는 ‘지극히 건강’한 사람이다. 그걸 지나치게 믿었던가, 건강진단에서 받은 고지혈증 의심 판정을 아마 서너 차례나 나는 뭉갰다. 그러다가 지지난해부터 조금씩 거기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르내리는 혈압도 한몫했다.

 

혈압이 정상보다 높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예순도 되기 전에 혈압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체중을 줄이면 혈압 문제도 해결되리라는 다소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체중 줄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최근에 다시 80Kg을 넘어선 이래, 식이(食餌)로 체중을 줄이겠다고 덤볐지만, 저울의 눈금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당분간 단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최근이다.

▲ 내가 매일 복욕하는 혈압약과 고지혈증 약.

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다소 착잡한 기분이었다. 지난번 진료에서 오늘 혈압을 다시 재보자고 약조한 터였다. 나는 여전히 일상적으로 혈압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혈압측정기 앞에서 내 피는 용솟음을 친 건가. 나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왼팔을 폈다. 의사는 얄미울 만큼 차분하게 혈압을 쟀다. 나는 호인 풍인 의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높네요. 많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순간 나는 어딘가 낯선 곳으로 내침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 글쎄, 뭐랄까. 지금껏 내가 나의 방식으로 유지해 온 내 삶의 어떤 윤곽 같은 것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나는 사로잡혔다. 내일……, 한 번 더 재어 보고 결정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다시 모든 게 막연해졌다.

 

좋아요, 처방해 주시지요. 나는 앞선 말을 번복하고 그렇게 요청했다. 의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환자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꺼림칙하시면 시간을 두고요……. 아니요, 처방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더 이상의 유예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유예가 실질적으로 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나머지 고지혈증약 처방까지 받아서 병원 계단을 내려오는데 기분이 참 스산했다. 아래층 약국에서 나는 혈압약과 고지혈증약을 각각 한 달분을 탔다. 혈압약은 아침에 먹으라고요? 물었더니 약사는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대답했다.

 

‘위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그게 실제로 내 일상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압력이 높아진 내 ‘위험한 혈관’을 생각하고 그걸 위해서 잠 깨는 아침마다 알약을 삼켜야 하는 일상의 불편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집으로 돌아와서 맥을 놓고 있었더니, 아내가 위로했다. 괜찮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주변의 지인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약을 먹고 있는가를 강조하고, 약을 먹는 게 훨씬 이롭다는 걸 되뇌었다. 어차피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어제 아침 식전에 첫 알을 삼켰고, 오늘 아침에는 두 번째 약을 먹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상에 새로운 순서가 하나 더 편입된 셈일 뿐이다. 무어 그리 께름칙하게 여길 일도, 공연히 마음이 싸아해졌다고 엄살을 피울 일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무심해지기로 했다.

 

방금 이 글을 쓰면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후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로 답이 날아왔다.

 

“혈압약 복용의 이점을 뭐라고 했지?”

“압력 곱하기 기간의 계산 값이 낮을수록 혈관의 수명이 길어집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혈압을 낮게 유지한 기간이 길수록 혈관에 좋습니다.”

 

복잡할 게 아무것도 없다. 약은 혈관의 압력을 낮추고 낮은 압력을 유지할수록 혈관은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내가 내 삶에 대해 응당 지켜야 할 도리이고 예의일지 모른다.

 

글쎄, 겨우 이 나이에 ‘노화’를 말하는 게 민망하고 외람되긴 하지만 멀쩡하던 혈관의 압력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이 기관의 기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좋든 싫든 그걸 받아들이는 건 우리네 삶의 거역할 수 없는 과정 같은 게 아니겠는가…….

 

 

2009. 5.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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