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밭에서 자란 마지막 열매를 거두다
텃밭 이야기를 한 게 지난 7월 초순이다. 게으름을 피우며 간신히 밭을 가꾸어 가면서도 그 손바닥만 한 텃밭이 우리에게 주는 게 어찌 고추나 가지 열매에 그치겠냐고 방정깨나 떨었다. 그게 빌미가 되었던가 보았다.[관련 글 : 텃밭 농사, 그걸 기름값으로 환산할 순 없다]
날씨는 끔찍하게 더웠고, 움직이는 게 힘겹던 시기여서 잔뜩 게으름을 피우다가 보름쯤 뒤에 들렀더니 텃밭 작물들은 거의 빈사 상태였다. 고추도 가지도 바짝 말라 쪼그라들고 있었으므로 아내는 탈기를 했다.
“그렇게 나 몰라라 하고 내던져 뒀는데 무슨 농사가 되겠우? 올핸 글렀으니 내년에 어째 보든지…….”
물 구경을 못 한 고추는 자라다 만데다 병충해까지 꾀었다. 익은 것과 성한 것들만 따서 거두어 돌아서는데 어쩐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제대로 임자 노릇을 못 한 게 겸연쩍고 미안해서 우리는 마치 싸운 사람처럼 입을 닫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폭염이 이어지던 8월에 이사한 뒤 뒷정리한다고 이래저래 바빴고, 그러다 보니 이내 명절이었다. 한 달 가까이 텃밭은 아예 잊어버리고 산 것이다. 버린다고는 했지만 켕기는 마음이야 어쩔 것인가.
어제 아침에 아내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기에 물었더니 밭에 가서 풀이라도 뽑아야 할 것 같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혼자 보내기 무엇하여 따라나섰다.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있고, 날씨는 선선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다 말고 우리는 잠깐 말을 잃었다.
텃밭은 무릎까지 자란 풀밭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밭은 바랭이와 쇠비름 같은 풀이 우거져 마치 흉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맨 앞에 심어놓은 부추는 풀 속에서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모름지기 임자의 발걸음 소리로 여물어가는 게 농작물이라고 했던가. 우리 내외는 그 밭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밭으로 들어갔다. 빽빽이 우거진 풀을 뽑고 걷어내는 데 좋이 두어 시간이 걸렸다. 굵게 자란 쇠비름이야 쉽게 뿌리가 뽑혔지만, 땅에 바투 붙어 번져나간 바랭이는 쉽지 않았다. 호미로 뿌리를 캐어가며 한 움큼씩 풀을 걷어내니 조금씩 밭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풀밭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추와 가지, 호박은 그러나 그냥 있지 않았다. 한 차례 익거나 성한 놈을 골라 따냈는데도 고추는 새로 열매를 맺거나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추석을 전후하여 며칠 동안 이어진 비로 짜부라지던 작물들은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이었다.
그뿐인가, 누렇게 익거나 제법 굵어진 호박이 풀숲에 숨어 있었고, 가지도 팔뚝만 한 놈 등 여러 개가 달려 있었다. 아내는 비닐봉지를 가져와 고추를 따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남은 풀을 걷어냈다. 버려두었던 텃밭에서 마치 보물처럼 찾은 수확물은 잠시 고단함을 잊게 해 주었다.
언제쯤 ‘농부의 마음’에 이를까
오랜만에 흘린 땀으로 조금은 고단했지만 돌아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묵히고 있는 마당 저편의 텃밭은 언제 날을 받아 풀을 뽑고 씨 뿌릴 채비라도 하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지난 7월에 약조한 ‘배추 농사’를 부도낸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내년에는 한 마장쯤 떨어진 미나리꽝에 감자를 심자며 풍성하게 지었던 ‘말 농사’도 기약할 수 없다. 멀어서, 꾸준히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매양 그게 말 농사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야, 핑계야 늘 있다.
중요한 것은 심어놓은 작물들을 염려하는 ‘농부의 마음’이다. 임자의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작물들을 떠올리면서 조바심을 내는 그 연민의 마음 말이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물에 콩 나듯 들여다보는 게을러빠진 우리에게 어찌 그걸 기대할 수 있을는지.
아내는 지난밤에 딸애와 함께 고추를 다듬으면서 ‘약도 한 번 안 친 건데’ 하면서 고추 이파리와 호박잎을 따로 챙겼다. 그리고 오늘 아침 밥상에 찐 호박잎과 고추 무름(고추를 쪄서 무친 것)이 올라왔다. 식탁에 오른 채소야 그것 자체로도 생광스럽지만 내가 지은, 아니 저절로 자랐던 채소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2016. 9.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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