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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5

[순국(殉國)] 1930년 오늘 - 청산리의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 흉탄에 스러지다 1930년 새해를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활기차게 맞았다. 지난해 7월 김좌진의 신민부가 김종진, 이을규,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와 연대하여 결성한 재만한족총연합회(한족총련)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하순 어느 날, 그는 중동선(中東線) 산시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의 도정공장으로 나갔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한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하여 위탁 판매하는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 당하지 않게 설치한 정미소였다. 이 공장에서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의 한인 박상실의 총에 맞는다. 1930년 1월 24일 오후 4시였다. 향년 41세. 1920년 항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청산.. 2024. 1. 24.
[오늘]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대선사 열반 [역사 공부 ‘오늘’]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 해방 보지 못하고 떠나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우거 심우장(尋牛莊)에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큰 스님이 오래 앓던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반대편 산비탈에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이 강골의 독립운동가는 열네 달 후에 올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향년 65세. 만해는 기미년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선언서 작성에 참여하여 공약 3장을 추가하는 등 3·1운동을 주도했고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신간회(1927)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3·1 운동 뒤 3년간 복역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 2023. 6. 29.
수훈(受勳)의 자격, 또는 훈장의 ‘품격’ 누가 훈장을 받는가, 그는 ‘받을 자격’이 있는가 ‘상(賞)’은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하 같음.)을 뜻하는 일반 명사다. 비슷한 뜻이지만 ‘훈장(勳章)’은 “대한민국을 위하여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그 공로를 기리고자 나라에서 주는 휘장”이라는 뜻의 법률용어로도 쓰이는 명사다. 상이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라면 훈장이 가문의 명예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 포상 가운데 으뜸가는 훈격(勳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상’이 아니며, 서훈의 대상이 되는 ‘공적’이 자연인 사이의 행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이바지’라는 특수성을 갖는 것이다. 논란이 된 MB의 ‘임기 말 서훈’ 따라서 훈장이 ‘.. 2020. 3. 3.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누가 받았나 유관순 열사 훈격 승급 결정에 부쳐 정부는 어제(26일) 유관순 열사의 독립 유공 훈격을 '독립장'(3등급)에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이기로 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공정하지 않아 '3·1운동의 상징 운동가'로서 그의 공적이 저평가되었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서훈의 승급은 2008년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된 여운형 선생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2005년에 여운형 선생이 추서 받은 건국 공로 훈장은 2등급의 대통령장이었다. 2008년 2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직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이 서훈의 승급이 행정적으로 처리되지 않은 듯하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해 보면 여전히 여운형은 2005년 대통령장으로 .. 2019. 2. 28.
[오늘] “우리는 우리 장단에 춤추자” 남북 모두가 존경한 독립운동가 별세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12월 10일, 납북된 우사 김규식 만포진에서 별세 1950년 12월 10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오래 앓아온 심장병과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9세. 그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 1950년 12월 10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오래 앓아온 심장병과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9세. 그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 2018.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