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훈장을 받는가, 그는 ‘받을 자격’이 있는가
‘상(賞)’은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표준국어대사전>이하 같음.)을 뜻하는 일반 명사다. 비슷한 뜻이지만 ‘훈장(勳章)’은 “대한민국을 위하여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그 공로를 기리고자 나라에서 주는 휘장”이라는 뜻의 법률용어로도 쓰이는 명사다.
상이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라면 훈장이 가문의 명예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 포상 가운데 으뜸가는 훈격(勳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상’이 아니며, 서훈의 대상이 되는 ‘공적’이 자연인 사이의 행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이바지’라는 특수성을 갖는 것이다.
논란이 된 MB의 ‘임기 말 서훈’
따라서 훈장이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나 소나’ 다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받아야 할 이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노름판을 엎으면서 선심 쓰듯 나누어 먹는 판돈이 아니다. 국민 다수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는 포상일 때 받는 사람과 그것을 주는 나라도 빛나게 되는 것이다.
29일 이 대통령 주재의 국무회의에서 강만수 회장 등 129명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안건을 심의·의결했다는 소식[기사 바로 가기]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이다. 기사의 제목은 이 훈장 수여가 갖는 성격을 압축하고 있다.
사면에 이어…MB, 측근들에 무더기 ‘훈장 선물’
임기 말에 시행한 사면도 ‘셀프 사면’이라 하여 말이 많았는데(오늘 자 <한겨레>의 관련 기사 제목은 “친구·형님 친구·사돈 ‘면죄부’…떠나는 권력의 ‘막장드라마’”였다.) 이제 측근들에게 ‘훈장 선물’을 안겼다는 것이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경률 외교통상부 녹색환경 협력 대사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김인규 전 <한국방송> 사장은 ‘은탑산업훈장’을 받는단다. 보도는 강 전 장관이 외환위기 사태의 책임뿐 아니라, 현 정부에서도 부자 감세와 고환율 정책으로 경제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는 점과 김인규 전 사장이 재직 시 ‘공영방송의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 포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점은 온 세상이 아는 일이다. 강만수는 20년 이상 대통령과 같은 교회를 다닌 교우(敎友)로 이른바 ‘측근 중의 측근’이고, 김인규는 2007년 대선 당시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이다. 그가 노조를 비롯한 구성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과의 관계 덕분이었음도 세상이 다 안다.
정권 막바지에 시행된 이 포상을 바라보는 국민의 반응은 어떨까. 이 포상이 합당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서훈이라고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이 공직 수행을 통하여 이룬 잘못과 무관하게 단지 측근이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상훈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지는 않을까.
전문 식견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물론이거니와 이들이 받은 훈장의 등급도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5등급으로 나뉜 국민훈장에서 ‘무궁화장’은 최고등급에 해당한다. 역시 5등급의 산업훈장 가운데 은탑산업훈장도 금탑에 이은 제2등급의 훈격이다.
강만수와 안경렬이 받았다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내게 일제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집안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구호)’를 부르짖었던 골수 친일파, 이 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1900~1979)을 떠올리게 했다.
창씨명을 일제의 팔굉일우 이념에서 따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지을 만큼 화려한 친일 행각을 벌였던 주요한이 1944년 1월, <매일신보>에 발표한 ‘천인침(千‘人針, 처녀 천 명이 수를 놓아 총알을 막아준다는 배띠’)‘은 낯 뜨거운 황민 문학의 으뜸(?)이다. 그는 이 글에서 천인침에 엉긴 것이 ‘좁게 말하면 이천 오백만 조선 동포의 정성이요, 넓게 말하면 일억 황국 국민의 모두’의 ‘붉은 정성’이라 예찬했다.
천인침에는 강제 동원된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어머니와 여인들의 안타까운 사랑과 연민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정작 일제는 거기 담긴 모성을 ‘전쟁과 파시즘 찬양’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 말하자면 주요한은 일제의 그러한 잔꾀에 적극 장단을 맞춘 셈이었다.
이육사와 주요한, 그 ‘부적절한 서훈’
이처럼 적극적 친일 활동을 통해 일제에 ‘보국(報國)’했던 시인 주요한은 해방 후 민의원을 거쳐, 2공화국 시절엔 장관을 역임하는 등의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79년 그가 죽자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기렸다.
이광수 다음으로 많은, 모두 43편의 친일작품을 썼던 친일 부역자 주요한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이가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다. 17차례에 걸친 투옥과 구금, 일상적 탄압과 고문 속에서도 항일투쟁의 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이 순혈의 저항 시인은 주요한이 ‘천인침’을 발표할 무렵에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리고 해방 조국이 이 민족 시인의 저항과 애국의 삶을 기린 것은 해방 45년이 지난 1990년이었다. 마흔 살로 요절한 이 민족해방 투사에게 추서된 것은 건국훈장 애국장이었다. 건국훈장 애국장은 대한민국장(1등급), 대통령장(2등급), 독립장(3등급)에 이은 4등급의 훈격이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흰옷 입은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이라는 낯 뜨거운 헌사로 식민지 종주국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했던 반민족행위자 주요한에게 주어진 1등급의 국민훈장과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에 젊음을 바치다 감옥에서 순국한 민족 시인을 기린 4등급의 건국훈장. 이 어처구니 없는 불균형은 식민지 시대의 역사 청산에 실패한 이 나라 현대사의 민얼굴인지도 모른다.
훈장의 등급을 단순히 우열의 문제로 다룰 일은 아니다.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이 서로 다른 영역의 훈격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나라의 서훈 과정과 결과는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수훈의 자격’에 문제가 있는 서훈자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행정안전부가 <경향신문>에서 요청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자 59명의 명단공개’를 거부한 것은 그런 이유라고 추정된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그런데 그 공개 거부의 사유가 어이없다. 행안부는 그 사유로 ‘개인정보 보호’를 들었다. 무슨 부끄러운 범죄 기록도 아니고 자랑스러운 수훈을 공개하는 게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게 된다니 그런 억지 논리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공적 제도’로 ‘사적 이해’ 관철하는 슬픈 ‘전근대’
하긴 대한민국장 수훈자 가운데에는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윤봉길 의사 같은 분들처럼 마땅히 민족의 사표로 기려져야 하는 분들 외에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도 끼어 있다. 자신에게 이 훈장을 수여한 그는 군사 반란으로 처벌받은 뒤 이 서훈을 취소당했다. 정부가 서훈자 명단의 공개를 꺼리는 것은 이처럼 ‘부적절한 수훈자가 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부분이다.
하다못해 초등학교 어린이에게 주는 상도 공정하고 합당해야 상의 권위가 선다. 하물며 국가에서 국민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서훈이라는 ‘훈장’에 있어서랴. 유난히 ‘국격’을 중시한 현 정부는 자신이 내세운 원칙마저 저버리고 ‘훈장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궁금한 것은 ‘훈장 선물’을 나눠 가진 측근들은 국민의 비아냥거림을 받아도 그 서훈이 자랑스러울까 하는 것이다. 서울대 이준구 교수는 이번 대통령의 특사에 대해 ‘의리나 보은이라는 건 조폭 사회에서나 높이 평가되는 기준’이라고 일갈했다. 공적 제도를 빌려 사적 이해를 다스리는 이 슬픈 ‘전근대’를 우리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2013. 1. 30. 낮달
* 독립유공자 훈격이 부적절하다는 여론 때문에 훈격이 상향 조정된 예도 있다. 1962 독립장(3등급)을 받은 유관순(1902~1920) 열사에게 2019년에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고, 2005년에 2등급 대통령장을 받은 여운형(1885~1947) 선생에게는 2008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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