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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고추30

[2010 텃밭일기 ②] 파종 이후 텃밭에 퇴비를 뿌리고 난 뒤 이내 비닐을 덮으려고 했는데 차일피일했다. 비가 오거나, 다른 일이 겹쳐서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깐 둘러본다고 들렀더니 우리 몫의 두 이랑에 얌전히 비닐이 덮여 있었다. 아뿔싸, 한발 늦었다. 밭 옆 학교에 근무하는 선배께서 당신네 일을 하면서 덮어 주신 것이다. 일을 덜어 고맙긴 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따로 공치사하는 대신에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제 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치기는 어디서나 표가 나는 법이다. 어린이날에 미리 처가에 들렀다 오는 길에 장모님으로부터 고추, 가지, 들깨, 땅콩 등의 모종을 얻어왔다. 돌아와 바로 옷을 갈아입고 밭에 나갔더니 선배와 동료 교사 한 분이 고구마를 심고 있었다. 뒤늦은 공치사는 거기서 했다. 여러 해 거기서.. 2020. 6. 21.
[2008] 수확, 그리고 파농(罷農) 고추농사, 수확과 동시에 밭을 엎었다 내 고추 농사가 끝났다. 지난 10월 30일에 마지막, 몇 남지 않은 고추를 따고 나서 나는 고춧대를 뽑아 얌전하게 고랑에다 뉘어 놓는 것으로 2008년도 내 텃밭 농사를 끝냈다. 마땅히 검은 비닐마저 걷어내야 하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밭 한쪽의 가지도 포기째로 뽑아 놓았다. 여느 해처럼 올 농사도 우연히 시작했다. 밭을 일구어 고추 모종을 심은 게 지난 5월 10일이다. 땅이 척박해 제대로 작물이 자랄 것 같지 않았던 농사였는데, 자연과 생명의 힘은 놀랍다. 내 고추는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쏠쏠하게 내게 풋고추를 선사해 주었고, 얼마간의 고춧가루가 되어 주었다. 그간 여러 번 딴 얼마 되지 않은 익은 고추를 아내는 가위로 썰어서 베란다의 부실한 햇볕.. 2020. 6. 19.
[2008] 미안하다. 내 고추, 가지야 늦은 봄에 파종하고 나서 ‘척박한 땅’이라고 천대하며 내버려 두었던 땅이다. 자연 임자들의 가꾸고 다독이는 손길은 멀어졌다. 다락같이 오른 기름값도 한몫했다. 밭에 한번 가봐야지 않으려나? 내버려둬. 자라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지, 뭐. 내외는 번갈아 가며 타박을 했다. 하긴 제대로 줄기도 실해지기 전에 힘겹게 열매를 매단 녀석들이 안쓰럽긴 했다. 빈약한 줄기와 잎 쪽에 새까맣게 붙은 진딧물을 없애려고 농약을 사서 분무기로 뿜어준 게 한 달쯤의 전의 일이다. 고랑에 불붙듯 번지고 있는 바랭이를 뽑느라 진땀을 흘리다 만 게 한 보름쯤 되었다. 바랭이를 뽑으면서 위태롭게 달린 고추 몇 개를 따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텃밭은 서글프기만 했다. 그리고 어제, 좀 느지막하게 밭에 들렀는데 맙소사. 한발 .. 2020. 6. 19.
우리 반 고추 농사(Ⅰ) 신록(新綠), 고추 심기 4월도 막바지다. 중간고사가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일제히 ‘열공’ 모드로 들어갔고, 며칠 동안 출제 때문에 끙끙대다 다시 맞는 날들이 어쩐지 수상하고 어수선하다. 한 학기가 ‘꺾여서’인지 다소 숨 가쁘게 달려온 두 달간의 팍팍한 시간이 불현듯 막연해진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가, 블로그를 살피고 돌보는 일도 시들하고 심드렁해졌다. 모두들 바쁜 모양인지 오블도 대체로 그런 분위기로 느껴진다. 이웃들 집을 한 바퀴 도는 일도 뜨악해지고, 퇴근해서는 아예 컴퓨터 근방에도 가지 않기도 했다. 학교 주변에서 만나는 신록이 그나마 변치 않는 감격을 선사해 준다. 학교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언덕길 오른편은 조그만 숲인데 이 숲은 시방 .. 2020. 6. 17.
[2017 텃밭 일기 ①] 기어코 농약을 치고 말았다 텃밭 농사와 농약, 그 ‘윤리적 딜레마’ 지난해 농사는 좀 늦었었다. 무엇보다 퇴직 이후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좌충우돌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 새 5월이었다. 시기를 놓쳤는데 농사가 되기는 할까, 저어하면서 텃밭에 고추와 가지, 방울토마토 등을 심은 게 5월 하순이었다.[관련 글 : 텃밭 농사, 그걸 기름 값으로 환산할 순 없다] 미리 이랑을 지어 검은 비닐로 씌우는 이른바 ‘멀칭’ 과정을 생략하고 시작한 농사에 우리는 잔뜩 게으름을 피웠던 것 같다. 매주 한 번꼴로 밭을 둘러보다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밭에 들르는 일이 뜸해졌던 것이다. 9월 중순께 다시 들렀을 때 텃밭은 바랭이와 쇠비름 같은 풀이 우거져 마치 흉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임자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졌어도 우리 .. 2020. 5. 18.
초농기(初農記), 첫 농사의 기록 학교 한귀퉁이의 텃밭에 지은 첫 농사 올봄에 학교 가녘에 있는 밭의, 한 세 이랑쯤의 땅을 분양받았었습니다. 물론 이 분양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에 대한 것입니다. 분양을 받고서 한동안은 엄두가 나지 않아 버려두었다가 가족들과 함께 일구고, 비닐을 깔고, 고추와 가지, 그리고 상추 등속을 심었지요. 이게 제대로 자라기나 할까,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채. 그러나, 씨앗들은 주인의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릇파릇 움을 틔워 새잎으로 자라났습니다. 의심 많은 임자는 그제야 새잎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주는 기쁨에 조금은 우쭐대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수업이 빌 때마다 거기 들러 그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보람은 남달랐지요. 농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따로 농사짓기의 경험이 없.. 2019.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