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념 안동 주먹밥 나누기’ 행사 준비한 차명숙씨
이 땅의 슬픈 현대사는 ‘오월’을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계절의 여왕’과 ‘메이퀸’ 따위의 달콤한 어휘로 싱그러웠던 오월은 그러나, 1980년 빛고을의 고통스러운 항쟁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유의 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총성과 핏빛으로 거듭 피어났기 때문이다.
‘고정간첩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에서 ‘사태’를 거쳐 공식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으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빛고을의 오월은 혼란스럽다. 5·18을 ‘민중항쟁’으로 부르는 사람만큼 그것을 ‘사태’와 ‘폭동’으로 이해하는 이의 숫자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영남 사람들에게 5·18광주민중항쟁은…
스물여덟 돌 5·18을 맞아 5·18 기념재단이 벌인 설문조사 결과, 국민 열 중 하나는 여전히 5·18을 ‘폭동’이나 ‘사태’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5·18을 ‘폭동’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사는 곳에 따라 일정한 편차를 보인다. 그런데 유의미한 통계는 아니라지만, 가장 높은 대구·경북(12.6%)의 비율이 가장 낮은 광주·전라(6.8%)의 두 배에 가깝다는 사실에 오래 눈이 머무는 것은 어쩌지 못한다.
그것은 그 오월과 무관할 수 없는 경상도 지방에 산다는 ‘원죄 의식’ 탓이다. 광주항쟁 이후 오랫동안, 그것을 버리지 못한 경상도 사람들은 요샛말로 표현하면 ‘괴담’ 수준인 소문들과 싸워야 했었다. ‘경상도 번호판을 탄 차로 전라도 주유소에 가면 김대중 만세를 삼창해야 기름을 넣어 준다’는 괴담은 일종의 거짓 공포와 함께 애먼 ‘호남 기피와 혐오’의 적당한 논거가 되어 급속하게 유포되었던 듯하다.
그런 괴담의 전파자들과 핏대를 올리며 싸우면서 이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를 가르고 있는 지역감정에 숨이 막혔던 기억도 아련하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괴담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호남 사람들의 부담은 더 컸던 듯하다. 기실 피해자였던 그들은 영남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소한 불친절이 더 큰 오해로 전개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길도 가는 길, 전남 해남의 어느 밥집에서 만난 중년의 주민들도 그랬다. 느긋하게 우리의 물음에 대꾸하던 그들은 우리가 경상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매우 정중해지고 친절해졌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예의 바른 태도로 여행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고 우리 역시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그들의 친절에 화답했다. 그게 지난해 연초의 일이다.
이 한 장면의 풍경은 광주항쟁이 끝난 지 스무 해가 넘어도 ‘광주’와 ‘항쟁’ 그리고 거기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직된 시선이 여전하다는 사실의 서글픈 증명이다. 동시대의 현대사조차 사는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낯설게 이해되는 이 전도된 현실은 여전히 21세 이 땅의 우울한 초상이다.
지자체 스스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자처하는 안동은 5월 광주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경상북도 북부의 소도시다. 그 물리적 거리가 만만찮은 ‘심리적 거리’를 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빨갱이’라는 어휘를 힘들이지 않고 쓰는 사람도, 그걸 예사롭게 들어 넘기는 사람도 심상하기만 한 그런 고장이다.
광주 아닌 안동에서 ‘5·18 28돌’ 기념행사가 열리다
이 고장에서 ‘5·18 28돌 기념 안동 주먹밥 나누기’ 행사가 열렸다는 것은 ‘뉴스’가 될 수 있으리라.
웬 주먹밥? 항쟁 때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으로 시민군을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 그런데 그때의 시민군들을 대신해 대구·경북 5·18동지회에서 안동 시민들에게 그것을 돌려주는 행사를 벌인 것이다.
80년 5월 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건넸던 주먹밥은 스물여덟 해의 시간을 넘어 광주에서 가장 먼 경상도 땅에서 아직도 ‘사태’와 ‘민주화 운동’ 사이를 무심히 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민들에게 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주먹밥에는 당연히 영호남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향하는 ‘연대’의 뜻이 담겼다.
5월 17일 오후 4시부터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베풀어진 이 행사는 대구·경북5·18동지회가 주최하고 ‘열린 사회를 위한 안동시민연대’와 5·18기념재단이 후원했다. 날씨는 쾌청, 선선하고 맑았고, 안동의 도심인 문화의 거리는 소도시다운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행사의 의례와 기념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시민들은 행사의 의미에 관심을 보였고,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간 역사, 박제된 시간의 울타리를 넘어와 5·18은 마치 현재의 역사처럼 거리 곳곳에서 부활하는 듯했다. 여고생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여배우 이요원 역의 실존 인물이 여기 있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느닷없이 안동에서 ‘주먹밥 나누기’ 행사를 기획한 이는 지난 18년 동안 안동에서 살아온 전라도 사람 차명숙(47) 씨다.
지난해 5월, 광주에 갔다가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했던 그이는 대구·경북5·18동지회와 안동시민연대에 이 행사를 제안하고 시민·지인들과 함께 늦도록 주먹밥을 준비했다. 어떤 이는 전단지 인쇄비를, 어떤 이는 노력과 노래 봉사 등으로 이 행사에 힘을 보탰다.
잊을 수 없는 5월,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기억
80년 광주항쟁 때 차명숙은 스무 살이었다. 5월 19일, 그녀는 도청 앞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옥주 씨와 함께 학생·시민군에게 물을 떠다 주는 것으로 항쟁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이 시작되면서 그녀들은 시민들에게 현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앰프와 확성기를 빌려 가두 방송을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빨리 나와서 광주를 지킵시다.”
차 씨는 22일 거리 방송 중 도청 앞에서 체포됐다. 그녀는 계엄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간첩 20만 명을 동원해 200명을 사살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렸다. 9월, 차명숙은 계엄 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장기 15년, 단기 10년형을 선고받고 10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짐작했듯 그녀는 우리 나이로 스무 살, 소년범이었다.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서 자랐고, 항쟁 당시 광주에 있던 이종 오빠의 사진관 일을 도우며 양재학원을 다녔던 앳된 처녀였다. 그녀는 성당을 다니면서 당시 군부 독재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우쳤다고 했다.
“체포되고 조사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될 때까지의 기억이 내겐 비어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거짓말처럼. 정말 나는 왜 그걸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몰라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걸까. 그때에 관한 한, 그이의 기억은 지금도 공백으로 남아 있다.
차명숙은 1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이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당국의 감시와 주변의 의심 등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이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명동성당을 오가며 신앙생활에 매진하다가 남편을 만났고, 90년에 남편의 고향인 안동으로 왔다.
여전히 성당을 다니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성당의 사제에게 자신을 밝힌 것은 98년, 떠도는 이야기로 자신이 죽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안동에서도 그이의 삶은 쉽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운영했던 돈사(豚舍)를 화재로 잃고 난 뒤, 주변의 도움으로 ‘홍어 삼합’을 파는 식당을 열었다.
주먹밥 나누기 행사를 치러 피곤하지만, 그이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행사에 이어진 광우병 반대 촛불 문화제를 마치고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 ‘행복한 집’에 몰려온 지역 시민단체 회원 등 지인들을 대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몸은 피로했지만, 그이는 행복해 보였다.
“광주가 다른 지역에 광주 정신을 되돌려줘야”
그녀를 ‘전라도 사람’, ‘광주사태 소요 분자’가 아니라 다정한 이웃으로, 한 시대의 상처를 함께 나눈 동지로 받아들여 준 지역의 이웃과 지인들 때문이다. 80년 5월에 광주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이는 이 경상도의 외진 도시에서도 ‘공동체의 힘’을 느낀다고 했다.
“늘 주변에서 힘을 주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그이는 말했다. 그이의 행복은 성당을 오가며 실천하는 독거노인 반찬 만들기, 소년소녀가장 도시락 싸주기 등 봉사활동을 통해서 확장되고 전파되고 있는지 모른다.
18년째 살고 있지만 어쨌든 이 고장은 타관, ‘아무하고도 쉬 얘기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어서 그녀는 지금도 ‘광주와 오월’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의 행방을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다.
“온 나라에서 광주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이제는 광주가 다른 지역에 광주 정신을 되돌려줘야 해요.”
그것이 그녀의 처방이다. 돼지보쌈과 삭힌 홍어, 갓김치를 곁들인 ‘행복한 집’의 홍어 삼합은 영남과 호남 그리고 5월 광주의 눈매 푸른 정신과 어울려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이가 잃어버린 28년 전의 기억을 되찾고 ‘광우병 쇠고기’와 ‘한미 FTA’, ‘공교육 파탄’의 정국을 꿰뚫는, 새로운 희망의 시간과 역사를 열어 가리라.
2008. 5.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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