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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거부하는가 - 5·18의 수난

by 낮달2018 2020.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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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5·18 기념식 의전에서 뺀 정부

▲ 다시 5월을 맞건만…. 2009년 5월, 망월동

서른세 돌을 맞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수난을 겪고 있다. 반역사, 몰역사적 극우세력의 준동이 일상화된 가운데 수구 종합편성채널조차 비열한 방식으로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에 가담했다. 끝내는 정부에서도 행사위원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5·18 기념식 의전에서 빼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에 공식 기념곡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그 이유가 거의 만화 수준이다.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일부 노동·진보단체에서 민중 의례 시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이며 정부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일어나 주먹을 쥐고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 등이 제기돼 제창 형태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라고 했단다.

 

줄이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여서, 참석자들이 주먹을 쥐고 흔들며 부르는 노래라서 공식 기념곡으로 쓰기에 ‘거시기’하다는 것이다. 거기엔 무슨 5·18의 역사성과 민주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과 지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 따위가 개재될 여지가 없다. 거기엔 주먹을 쥐고 흔든 민중들의 죽음을 불사한 항쟁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아픈 전제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다.

 

“5·18은 역사다”

 

물론 행사 의전에 부르는 노래를 부르는 문제에 권력이나 현 정부의 의지가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현 정부에서 유임된,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를 찬양하고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종북 활동으로 폄하한 DVD 동영상을 배포해 물의를 빚은 이가 보훈처장이라는 사실에 이르면 앞뒤 문맥이 시원스레 트인다.

 

현지의 분석대로 이 노래를 둘러싼 논란을 ‘박근혜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정리하면 정부와 권력의 의중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어이없는 논란을 방치함으로써 정부는 이 방향이 자신들의 의중과 다르지 않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역사적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의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강변하면서도 보훈처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왜곡·폄훼도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TV조선>에서는 전 북한 특수부대 장교 출신 탈북자라는 한 남성이 출연해 5·18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라고 하면서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북한 게릴라”라고 주장했다. <채널A>에서도 5·18 당시 “남파 지휘 총책임자 호위 역할로 남파됐다”고 주장하는 한 탈북자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30년이 넘어 5·18은 역사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이 순정한 시민들의 거룩한 항쟁은 그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제연합이 역사로서의 ‘5·18’을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5·18을 역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극우세력들의 준동 때문이다.

 

거대 신문재벌이 운영하는 두 종합편성채널이 ‘무책임하게’ 방영한 5·18 관련 방송은 ‘탈북자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제시했을 뿐, 그것을 입증할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진실 보도의 전제로서의 ‘팩트’에 대한 이들의 편리한 감각은 이 방송을 기획하면서 멈춘 것일까.

 

글쎄,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들 방송이 예의 주장을 방송한 속내야 뻔해 보인다. 두 방송사에서 이 탈북자들의 주장이 진실과 관계가 멀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때는 만화방창, 진보적 역사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난만한 보수 정권의 치세. 권력과 그 주변의 환심을 사고 나라 안의 우경화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니 물실호기의 기회라 여긴 것은 아닐까.

▲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에 종편도 끼어들었다. <채널A>와 <TV 조선>의 화면 갈무리

일베라는 극우 사이트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광주 호남, 5·18, 민주화 투쟁 등에 대한 폄훼와 조롱도 우리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에 편승한 역사 인식의 일탈과 지리멸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지금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이 연출하는 반역사적, 반문명적 극우 발언에 묻어 있는 일본의 우경화를 나무랄 자격이 우리에게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해 준다.

 

언제부터일까. 억압과 공포가 횡행했던 군부 정권 시절조차도 ‘정의’나 ‘역사’는 모두의 것이었다. 그 시절인들 왜 ‘수구 세력’과 ‘극우’가 없었을까. 소수의 청년과 민주투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헌신이 사회적 공동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정도의 차이였지, 그 시절의 ‘상식’이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

▲  집단 발포 후 (1980. 5.021)  ⓒ  5·18 재단

그 ‘상식’은 자신의 관점과 어긋나더라도 ‘옳은 것은 옳다’는 사회적 합의로 이어졌다. ‘나는 거기 동조하지 않지만 그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소수에 의해 주도된 민주화의 가장 든든한 기초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다시 보수 세력이 집권하고 이른바 ‘잃어버린 10년’론이 떠오르면서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잃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진 것은 그런 사회적 합의와는 반대되는 의견들이 공공연히 통용되기 시작하는 사회적 보수화, 우경화 탓이 아니었나 싶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정부 운영과 정책의 집행이 얼마나 상식과 어긋나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는가. 나는 최고 권력에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억지와 거짓으로 일관되는 뻔뻔함이 그 시기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로 꼽은 ‘수오지심(羞惡之心)’(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의 상실기였다. ‘부끄러움’을 잃은 시대였다. 국민의 비판과 반대를 ‘괴담’으로 치부하며 부정과 비리로 점철된 정권을 일러 ‘가장 도덕적인 정권’이라 강변하는 전 정권의 모습은 청와대에서 ‘대포폰’을 사용하는 대담함에서 보통 시민들의 상상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전 정부의 비리와 부패, 불법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당사자들 가운데 이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의 불법행위가 단지 국정원장의 개인 비리가 아니듯 전 정부에서 자행된 모든 불법과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해서 집권당의 책임소재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현 정부의 전 정부와의 차별화다. 당 이름과 대통령, 그리고 내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인가. 그러나 5·18과 관련된 논란은 기본적으로 현 정부가 전 정부의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시사한다.

 

이명박 정부 때에 이어 다시 재연된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은 ‘방아타령’ 소동에 이어 이 한편의 코미디가 연면히 이어지는 이 나라 보수 세력들 역사의식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미니어처라는 사실의 아픈 확인이다.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강변했지만, 그들 핏속에 흐르는 ‘정체성(아이덴티티)’은 세대를 넘어 유전하고 있다.

 

보훈처의 결정에 반발하는 광주의 시민단체들이 기념식 불참을 공언하는 가운데 자칫 반쪽짜리 행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이어진다. 그러나 진실로 저어되는 것은 행사의 파행이 아니다. 오히려 5·18 민중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결국은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조차 보위하지 못하는 반역사·몰역사의 퇴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2013. 5. 17. 낮달

 


7년 뒤…

 

그러나 여전히 5.18에 대한 폄훼와 모독은 이어지고 있다. 이번 4.15총선을 통해 5월 광주학살의 후예인 미래통합당이 궤멸적 참패를 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상황이 나아지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광주와 항쟁에 대한 폄훼로 정파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무리들이 존재하는 한, 법으로 그 폄훼를 엄정하게 다스리게 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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