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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판’에 질식당한 죽음…그래도 행복했다

by 낮달2018 2020.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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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1991년 분신으로 항거한 안동대 김영균 열사 20주기

▲ 1991년 5월 15일, 안동대 김영균 열사의 민주 국민장. ⓒ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5월이 오고 있다. 흔히들 ‘계절의 여왕’으로 기려지곤 하는 5월, 그러나 이 땅에서 5월의 의미는 아프고 무겁기만 하다. 사람들은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그 피의 기억들로 5월을 떠올린다. 세월이 흘러도 1980년 광주의 슬픔은 거기서 스러져간 희생의 크기와 무관하게 무겁고도 무거운 까닭이다.

 

사람들은 광주의 5월만 기억하지만, 5월은 해마다 돌아온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상기도 가시지 않은 1991년의 5월도 마찬가지다. 그해 4월 26일 강경대가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이래 5월 25일 김귀정이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압사하기까지 무려 열세 명의 학생과 노동자 등이 분신과 투신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분신했을 때 우리 사회가 빠졌던 경악과 전율은 그로부터 21년 후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무려 열세 명에 이르는 청년 학생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년이다. 그때 열아홉·스무 살, 막 성년의 길목에 들어서던 젊은이들은 살아 있으면 마흔 살, 불혹으로 접어들 세월이 흐른 것이다. 기억마저 희미해질 만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한갓진 감상으로 그날이 회고될 수는 없다. 20년 전 그때, 그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하고 목숨으로 지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1991년 5월을 군부 정권의 폭압에 의해 목숨 잃은 희생자로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불사른 청년들의 죽음은 잊혀가고 있다. 그들의 희생은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 ‘분신 배후’와 ‘죽음의 굿판론’에 질타당하면서 묻혔다. 그들의 순정과 열망은 ‘무모한 자기 폭력’으로 부정되고 ‘배후설’에 따라 그 자발성마저 의심당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진 않는다. 아무리 지고 지선한 이념과 목표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포기하는 일도 절대 쉽지 않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한 방울의 피에도 망설이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그해 5월에 그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한 아픔과 열망은 무엇이었을까.

 

1991년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의 분신

▲ 학내 분향소의 김영균 열사 영정

1991년의 봄, 그 뜨거운 투쟁의 시간은 내게 스물한 살 대학생의 분신으로 다가왔다. 그해 5월은 내게 해직 3년 차의 봄이었다. 주말마다 대구 시내에서 집회가 열렸고, 최루탄과 투석전이 되풀이되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젊은이들의 부음 앞에 국화를 바치고 촛불을 켰지만, 그 죽음은 내게 여전히 낯설었다. 대의를 이해하는 이성과 그것이 죽음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현실의 감성은 다른 것이다.

 

5월 1일에 안동대 김영균(1971∼1991) 학생이 학내에서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왜 대구 시내 소재 대학이 아니고 안동대였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는 15일에 경북대 부속병원에서 치러진 민주 국민장에 잠깐 참례하는 것으로 예를 갖추었다. 부문을 달리한 운동권의 이웃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국외자’였다.

 

그리고 나는 김영균을 잊어버렸다. 세 해 뒤에 복직했고 이내 마흔 살이 되었고 전교조가 합법 조직이 되었다. 쉰을 넘기면서 나는 조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이들은 장성했다. 올봄에 20년 전의 죽음들을 떠올리는 힘은 내가 먹은 나이의 힘, 생명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김영균의 지인 몇 사람을 만났다. 20년 전 그들은 김영균과 함께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벗들이었다. 어느새 20년이 된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구성원들이기도 했다. 장년에 이른 이들은 건실한 생활인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직도 채 식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피고 있는 성실한 시민들이었다.

 

“영균이의 첫인상은 여느 서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좀 튄다’는 것이었지요. 시골아이들이 주로 듣는 편이라면 영균이는 자기주장이 분명한 똑똑한 후배였지요…. 특이했던 것은 동료나 후배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는 점이지요. 특히 여자 후배는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술자리든, 집회든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는 이는 늘 영균이었습니다.”

 

당시 안동대 반미애국학생회장이었던 선배 박명배 씨는 그렇게 김영균을 추억해냈다. 김영균은 90학번, 전교조 1세대다. 고교 시절부터 학내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안동대 민속학과에 입학한 뒤에는 민속문화연구회를 꾸려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다.

 

“초반에 똑소리 나던 아이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도서관에 처박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균이는 달랐지요. 학생운동 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이크 잡고 선동 잘하는 아이들은 글쓰기나 동아리 활동은 잘 못 하는 편인데 영균이는 특이하게도 이 둘을 골고루 잘하는 녀석이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가 분신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습니다.”

 

그해 5월 1일, 12시 20분께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강온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도중 김영균은 분신한다. 동료들은 김영균이 제 몸에 불을 붙이고 ‘공안 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을 때도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한다. 김영균은 이튿날 경북대 부속병원 화상 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 19세 6개월, 그는 스무 살을 채우지 못하고 짧았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김영균, ‘농장’으로 되살아나다

 

▲ 열사의 유품 ⓒ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그의 부친은 서울시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의 장례를 두고 국민장 장례위원회와 유족 간의 갈등도 만만찮았다. 유족은 김영균을 화장해 유골을 금강에 뿌렸고, 학생들과 재야는 안동대 뒷산에 그의 영혼을 묻었다.

 

그러나 사태는 장례로 끝나지 않았다. 당국은 ‘분신 배후’를 조작하려다 여의치 않자, 조직 사건으로 엮어 박명배 씨를 비롯한 10여 명의 학생을 구속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후 여러 달 동안 수감되었다가 대부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때 그 주인공들이 올 2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는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의 핵심 구성원이다. 추모사업회는 세월의 부침과 무관하게 지금도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박명배 씨는 그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당국이 꾸미려다 실패로 돌아간 ‘분신 배후’ 찾기가 조직 사건으로 비화하면서 구성원들의 결속이 강화되었다는 점과 김영균 유족과의 화해로 이루어진 교류가 그것이다.

 

“어떻든 장례 과정에서 유족과 학생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쯤 뒤에 아버님께서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주시면서 교류가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영균이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을 받게 되자, 아버님은 그걸 저희에게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보상금을 은행에 넣어 두었던 김영균의 부친은 그것을 추모사업회로 넘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언’의 무게는 유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추모사업회에도 선택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넘겨받게 된 추모사업회는 고민에 빠졌다. 장학회를 만들까? 평화재단을 꾸릴까? 고민 끝에 어느 날 한 회원이 툭 던진 한마디가 해답이 되었다.

▲ 김영균 농장에서 감자 파종하는 모습 (2011년) ⓒ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그러면 땅 사서 농사나 지읍시다, 농사지어 좋은 일 하는 분이나 단체에 농산물 보내주고 하면 좋지 뭐.”

 

그렇게 ‘김영균 농장’이 만들어졌다. 농장은 2006년 예천군 감천면에 매입한 땅에 세워졌다. 농사는 분신 배후로 구속되었던 김영균의 선배 김구일 씨가 맡아서 짓는데 회원들이 가끔 울력을 한다. 농사로 얻은 고구마나 쌀 등은 김영균 열사가 생전 ‘마음에 담았던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곳’에 한 포대씩 보내진다. 지난 이태 동안 고구마 농사를 지어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 민중의 소리, 구로푸른학교 지역아동센터 등에 보냈다.

 

넉넉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던 김영균은 자기 삶만은 귀하게 꾸미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균 농장에서 해마다 조금씩 대동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농산물 꾸러미는 말하자면 청년 김영균의 뜻을 기억하고자 하는 작은 선물인 셈이다.

 

올 2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는 회원들의 손길은 분주하다. 저마다의 삶이야 다르지만 외롭게 떠난 한 친구를 기억하는 일에 모으는 마음이 어찌 다를 것인가. 이들을 하나로 묶고 20년 세월을 하나로 꿰어준 것은 역설적이지만 20년 전에 떠난 벗 김영균인 것이다.

 

그의 20주기, 대학의 ‘태평성대’

▲ 안동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김영균 열사 추모비

지난 25일부터 분향소가 설치된 대학 구내에서 선전전과 강연, 영화 상영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안동대학교를 29일 찾았다. 애당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추모제를 알리는 몇 개의 펼침막을 빼면 봄이 무르익고 있는 교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뒷산에 있다는 묘소를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회관 앞 추모비 옆에 친 천막 안에 마련한 분향소를 지키는 학생들도 알지 못했다. 분향소의 영정 안에서 갓 스물한 살, 김영균은 그 나이 그대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분향소 오른편 잔디밭에 김영균 추모비가 서 있었다. 그 앞의 표석 옆에 피어난 철쭉 꽃잎이 피처럼 붉었다. 학생들은 무심히 분향소 앞을 지나가지만 20년 전 한 선배의 선택을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사학과 학생들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터였다. 2011년, 대학은 ‘태평성대’ 같아 보였다.

 

미술대학 뒷산 김영균의 무덤에는 민속학과 후배들이 묘역을 가꾸고 있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봉분에 이제 띄엄띄엄 새 풀이 돋아났다. 학생들은 작업을 끝내고 무덤에 막걸리 한 잔을 바쳤다. 근엄한 태도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어린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선배의 죽음일까, 군부독재기의 전설일까, 아니면 민주주의와 시대정신일까.

▲ 김영균 열사의 무덤을 정비한 민속학과 학생들이 절을 하고 있다 .

사진을 한 장 찍어주고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 죽음을 알고 있느냐고.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 경북대 병원에서 그를 배웅했지만 나는 그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알 듯한데, 아마 여러분들도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어야 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내 말의 속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리라.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그 신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죽음으로 증언하고자 한 것이 타오르는 ‘증오’가 아니라 넘치는 ‘사랑’이란 사실도.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학교를 떠나는데 학생회관 앞에 걸린 펼침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누리집에 있는 구호다. 김영균뿐 아니라 당시 벗들이 모두 즐겨 외었다는 구호다. ‘희망이 있는 싸움’이란 무엇일까. 김영균은 결국 그 희망을 위해 몸을 던진 것일까.

 

김영균은 생전에 누구보다도 전태일 열사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무 살에 산화한 전태일 열사를 만나러 그는 전태일이 떠난 지 20년, 자신의 나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모란공원을 찾았다고 했다.

 

김영균이 존경한 전태일이 간 지 4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전태일은 이 땅에서 현재형이다. 1991년 그 봄에 자신을 불사른 김영균 열사의 삶과 죽음은 현재형일까 아닐까. 스무 해 전 한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 채 무르익고 있는 5월의 교정을 나는 천천히 빠져나왔다.

 

2011. 4. 30. 낮달

 

덧붙이는 글 |

김영균 열사 추도식 전야제 ‘열사의 정신으로 함께하는 추모와 연대의 밤’은 4월 30일(토) 오후 3시부터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진행되고, ‘김영균 열사 20주기 추도식 및 기제사’는 5월 1일(일) 오전 10시부터 안동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열린다.

 

 

 

'죽음의 굿판'에 질식당한 죽음...그래도 행복했다

[추모] 1991년 분신 항거한 안동대 김영균 열사 2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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