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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 ‘투명인간’에서 ‘여성’으로

by 낮달2018 202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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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의 ‘인간 선언’에 부쳐

▲ 파업에 나선 청소노동자들. 파업은 그들의 ‘인간 선언’이었다. ⓒ <경향신문>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제일 먼저 스스로 깜짝 놀랐던 것이 화장실에서였다. 사업장 화장실에서 서서 볼일을 볼 때 청소하는 여성 노동자가 들어와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태연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갔었다. 노동운동을 하고 노동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나서야 그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남자 화장실에서 마주칠 때 흠칫하게 되더라. 그전에는 청소노동자를 사람으로 인식하지도 못했던 거다. 소변기, 대걸레, 비품 상자 같은 사물이나 다름없었다.”

    - 장귀연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니다’(2011.8.30, <한겨레> ‘세상 읽기’) 중에서

 

한 남성 노동자의 고백이다. 장귀연은 ‘존재해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노동자’로 청소노동자를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은 청소를 위해 구부정하니 굽힌 그들의 등허리를 여과 없이 통과할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홍익대에서 시작된 청소노동자의 ‘인간 선언’이 뉴스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 것은 고작 지난해부터의 일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투명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때로 학교와 병원, 지하철역과 공항 등 공중화장실의 배경이었고, 때론 정물이기도 했다. 남성들은 우정 그렇게 말한다.

 

“저런, 그랬지. 그러나 우린 그들이 일하는데 걸리적거리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맞아, 그들은 마치 그 공간 안에 원래부터 있던 집기 같았어. 우린 무심히 볼일을 보고 나왔을 뿐인걸.”

 

남자들에겐 위의 남성 노동자가 보인 반응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청소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장면 중의 하나로 여길 뿐, 그 의미를 굳이 캐려 하지 않는다. 즉, 화장실은 남녀가 유별한 공간이지만 거기서 청소하고 있는 여성을 굳이 ‘여성’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 청소노동자는 대체로 4·50대 이상의 여성들로 이들 앞에서 남성들은 굳이 내외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들이 남녀 간에 지켜야 할 예절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여성성’을 갖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성성’이란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의 가치’를 뜻하는 여성성과는 다른 의미다. 그것은 문화로서의 ‘여성성’보다는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고 더러는 할머니가 되면서 남성들과 무관한 ‘인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 여성들이 대체로 ‘어머니’, 즉 ‘모성’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편하고 만만하다. 그런 어머니를 굳이 ‘여성’으로 의식하는 성인 남성은 많지 않을 듯하다.

 

나이와 ‘여성성’

 

요즘이야 좀 다르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의 흡연에 대한 매우 차별적 인식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듯하다. 2, 30대 젊은 여성들의 흡연은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40대 이상의 여성들의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는 것은 그 좋은 예다.

 

“여자 나이 마흔이 넘으면 인왕산 호랑이도 안 물어간다.”라고 하는 얘기는 그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글쎄, 마흔이란 나이가 구체적으로 그것의 어떤 잣대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그것은 마흔이란 나이가 앞서 말한 ‘여성성’의 경계가 된다는 뜻일 터이다.

 

오래된 일이긴 하다. 나는 남탕에 들어온 목욕탕 주인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탕에 들어오긴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남자는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는 탕 밖에서 “하는 수 없어요. 나 들어가우.”하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50대쯤 되었으리라. 그런데 여자는 치마를 뒤집어쓰고, 눈만 빠끔 내놓은 채 욕탕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왔다. 욕객은 대여섯쯤. 그러나 탕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자세로 알몸을 열어놓고 있었다. 여자가 가린 건 눈 아래일 뿐, 정작 눈은 실내를 향해 열려 있었다.

 

여자가 일을 보고 나가면서 “미안하구마는…….” 했고, 남자들은 “괜찮우. 필요하면 언제든 들어오우.”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젊을 때였지만 나는 그 분위기가 전혀 외설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치마를 뒤집어쓴 것은 일종의 의례적 행위다. 여자는 ‘볼일을 보러 들어간다’고 밝혔고, 탕 안의 남자들은 그것을 용인했던 것일 뿐이었다.

 

이런 장면을 굳이 ‘여성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할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장면을 너그럽게 나누는 이웃으로서, 남녀구별과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나누는 교류로 이해되니까 말이다. 성적 정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남녀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우정인 셈이니까.

▲ 노동조합을 만든 이화여대의 청소노동자들 ⓒ <프레시안>

이 두서없는 논의는 나의 고유한 정서와 여성관 위에 서 있다. 이는 이 논의가 남성으로서 내가 가진 성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글 앞머리에 제시한 남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 역시 여느 남성과 다르지 않은 여성관의 소유자일 뿐이었다.

 

청소노동자, ‘투명인간’에서 ‘여성’과 ‘인간’으로

 

여성을 나이에 따라, 또는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게 바라보는 것도 편견일 수 있다. 내가 그를 ‘어머니’로, 또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바라보는 것과 그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어긋나지 않는다. 어떤 존재이든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여성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임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지금 학교에서도 화장실을 청소하는 이들은 용역업체 소속의 여성 노동자다.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고 있어서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쉰은 충분히 넘긴 이들 같아 보인다. 이들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시간은 대체로 8시부터 9시까지다.

 

나는 위의 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무심히 이들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에도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등을 보이면서 태연히 볼일 보긴 민망하여 소변기 대신 대변기 칸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나는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들을 투명 인간처럼 보아 온 것이었다.

 

내가 그들이 청소하는 시간에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다. 이들을 만나면 수고하신다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전임 학교에선 커피를 한잔 타서 갖다주기도 했는데 교무실에서 대접하지 못하고 일하는 데 그걸 갖다주기가 민망해서 그만두었다.

 

이들 청소노동자가 투명 인간이 아니라 사람으로, 그것도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에 달린 것이다. 이들의 노동은 여느 노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정갈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청소된 쾌적한 화장실에서 배변의 즐거움을 누릴 때는 마땅히 이들 노동자의 수고로움을 기억해 볼 일이다.

 

아파트 승강기에서 승강기 청소를 하는 여성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역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르내린다. 주민들은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승강기에 오르지만, 이들은 단지 거기 머물며 청소를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따라 26층을 오르내린다. 어제는 이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여기 사는 이들은 대강 다 아는데 잘 모르겠네요.”

“아, 우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그러시구나.”

“청소를 자주 하시네요.”

“아, 매일같이 하지요.”

“아, 그렇지요. 그럼 애쓰세요.”

 

승강기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는 할머니를 남기고 돌아서는 마음은 뭔가 좀 허전하다. 이내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것도 역시 예의 글을 읽고 난 다음에 생긴 증상이다. 그것은 청소노동자들에게 인사를 하지 말라며 눈을 부라렸다는 대학교수란 위인들이, 궁금하다 못해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2012. 5.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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