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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궐선거와 아내의 ‘비관주의’

by 낮달2018 2020.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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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29 재보궐 선거

▲ 이번 재보선 결과는 우리 내외의 추측대로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오마이뉴스

“그거 보우. 내가 뭐랬수? 맨날 그 모양이라니까.”

 

어제 서울과 경기, 인천, 광주에서 실시된 보궐선거 결과에 대한 아내의 촌평이다. 선거를 앞두고 파문이 일었던 이런저런 정치적 스캔들 등 집권당의 추문과 무능을 표심과 연결해 보는 선거 보도나 희망 섞인 관측에 대해서 아내는 진작 무 자르듯 그렇게 잘랐었다.

 

“아나~. 김칫국은 그만! 두고 보우. 이번에도 또 1번이 다 될 거니까.”

 

최근 현안에 대한 유권자의 정치적 선택이 꼬이고 막힌 정국을 풀어내는 단초가 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게 기대라면 기대다. 세월호 정국을 늪으로 밀어 넣은 지난해 보선 결과에 대한 학습효과인 셈이었다. 참사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배배 꼬인 상황은 그래도 지지받을 수 있다는 집권당과 정부의 배짱과 속셈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물론 아내의 예측이 무슨 정치적 안목의 결과는 아니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태어나 한 번도 지역을 떠난 적이 없지만 다소 별난 이력을 지닌 남편과 삼십 년 넘게 살다 보니 아내도 진보의 가치를 이해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아내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남편과 정치적 의견을 같이하긴 해도 ‘변혁’을 바라보는 관점은 절대 상식적인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 혹은 우리들의 ‘비관주의’

 

그래서일까. 아내는 정치적으로 비관주의자다. 극우에 가까운 지역의 보수주의에 대해 좌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의제와 전망에 대해서도 아내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날 그래 봐라, 하나라도 제대로 바뀌는 게 있기나 할까.” 하고 우정 빈정대듯 말하는 아내의 속내도 아마도 시커멓게 타고 있을 것이다.

 

아내의 비관주의는 주변 환경 탓도 있을 것이다. 지역이야 보수 일색이지만, 그래도 나는 주변의 진보적 동료들과 교유하는 편이다. 그러나 아내 주변의 이웃들은 하나같이 이 보수 영남의 정치적 입장을 의심 없이 따르는 이들이다. 그들 속에서 그들의 정치적 의견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아야 하는 심정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구태여 아내의 비관주의가 아니더라도 대중들이 여당의 압승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만큼 오래전부터 선거 때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게 야당이었으니까. 그러나 선거가 정치집단들의 공과를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라는 걸 이들 선거에서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집권당의 무능과 무책임, 부패 추문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선거를 통해 면죄부를 받는다. 유례없는 약체 정당으로, 기득권 구조에 안주하며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한다고 비난받아온 야당은 그런 이유로 다시 선택지에서 제외되는 상황이 거듭된다. ‘심판’은 결국 여당이 아니라 야당에 겨누어진 형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선거가 ‘평가와 대안의 모색 과정’ 맞아?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은 흐른다. 1년을 허송한 세월호 문제도, 한 기업인의 자살로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 등 관련 부정부패 문제도 시나브로 덮이고 묻혀갈 공산이 크다. 서둘러 덮어서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권력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기억과 싸움을 시작한 시민들의 전선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유달리 이른 꽃소식이 왔던 봄이었다. 그런데 정작 꽃을 서둘러 피워놓고도 날씨는 우중충하기만 했다. 큰 일교차에다 걸핏하면 비가 찔끔대는 궂은 날씨가 계속되었고, 날씨는 4월답지 않게 쌀쌀했다. 모두 아마 올해는 봄을 생략하고 여름으로 바로 가는 듯하다고 혀를 차 대었던 봄이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야 흔한 이야기다. 봄 같지 않은 봄이야 어제오늘의 일인가 말이다. 아이들 방과 후 교재에 나오는 이성부 시인의 ‘봄’을 펴내 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7, 80년대 군부독재 시기에 암울한 시대 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겨울과 봄에 빗대어 노래한 이 시는 여전히 우울한 함의로 다가온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오는 봄은 그러나 ‘더디게 온다. / 더디게 더디게’ 온다. 그 모습이 ‘눈부셔 /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는 그는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다. 민주주의의 ‘역사적 필연’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열망으로 뜨거웠을까.

 

습관처럼 오래된 노래 ‘꽃다지’를 틀어놓고 그 선율을 마치 하나하나 되짚듯 따라간다. 아내와, 아내와 다르지 않은 숱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비관주의 뒤에 숨어 있는 소박한 희망과 꿈을 생각한다. 그 곰삭은 분노 뒤에 감추어진 낙관적 전망을 무엇으로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이 ‘봄 같지 않은 봄’에 우리가 봄을 사유하고 기다리는 방식인 셈인가.

 

 

2015. 4. 30. 낮달

 


2015년 4월 29일에 치러진 보궐선거를 전후하여 우리 내외가 나눈 우울한 전망과 그 결과에 관한 글이다. 아내의 말과 다르지 않게 선거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과 무소속이 승리를 나누어 가져갔다. 전반적인 야권과 진보진영의 분위기는 저조했지만, 이듬해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제1당이 되는 반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4년 뒤인 지난 4·15 총선거에서는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아내와 나는 좀 근심스럽게 지켜보긴 했지만, 패배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내의 비관주의가 쑥 들어가 있을 정도로 야당이 된 미래통합당이 워낙 죽을 쑤어버린 탓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다고 진단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새롭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권자들의 현실 인식과 정치의식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2020.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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