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고요한 밤의 빛의 된 여인

by 낮달2018 2019. 1. 28.
728x90

[서평] 헬렌 켈러 전기 < A life 고요한 밤의 빛의 된 여인>

▲ 헬렌 켈러 전기)2002, 미다스북스)
▲1955년 코네티컷주 이스턴에 있는 자택 서재에서 점자책을 들고 있는 헬렌 켈러.

대중에게 있어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박제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3중고의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그녀는 기억되고 회자된다. 역사책과 전기 속에서 그녀의 정형화된 생애는 그녀의 실존을 압도해 버린다. 그러한 점은 그녀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되는 애니 설리반(Anne Sullivan, 1866~1936)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관련 글 :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돌아가다

 

도로시 허먼, 헬렌 켈러의 실존을 복원하다

 

도로시 허먼(Dorothy Herrmann)이 쓴 그녀의 전기는 그녀의 실존을 복원한다그 여자는 ‘인간에게는 정상과 장애의 차이가 아니라상상력과 용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 생각한휴머니즘과 평등 사회를 지향하고여성 참정권과 흑인을 옹호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볼모로 삼아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체제와 이에 대한 정치적 견해'보다는 자기의 삶과 시각 장애인에 관한 얘기만을 쓰기를 바랐다. 헬렌은 전투적 노동조합을 지지한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자본가들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이겨내려는 자신의 투쟁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악명 높은 1912년의 로렌스 섬유노동자 파업과 이어진 극렬한 탄압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특이한 사람-말하자면 기형-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되었던 것이다.

 

그는 ‘전투적 사회주의자’였다

 

▲ 헬렌 켈러(1880-1968)

1913년에 펴낸 수필집 <어둠 밖으로(Out of the Dark)>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의 길을 가게 된 이유, 사회주의자들의 믿음-인류형제애, 평화, 교육-이 어떻게 자기를 감동시키고 바꾸어 놓았는지를 이야기했다. 이 책은 헬렌이 가진 천사 같은 이미지를 깨뜨려 버렸다. 사람들은 장미꽃 내음이나 맡으며’ ‘무릎 위의 점자책이나 읽는 청순한 아가씨가 아니라 서재에 커다란 붉은 기를 매달아 놓은 과격한 혁명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다. 헬렌에게 시각장애인 복지운동이 으뜸의 사명이었지만 그녀가 죽은 뒤, 식구나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급진주의를 무시했다.

 

 장애인 단체에서 펴낸 소책자에는 그녀의 인간 승리와 장애인의 평등권을 되찾으려는 노력만을 담고 있을 뿐, 그녀의 일생 가운데 전투적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은 고스란히 빠져 있는 것이다.

 

그녀가 세계 제1차대전이 노동자들을 자본에 더욱 예속시키려는 계략이라고 일갈하여 청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여섯 명의 경찰이 2천여 명의 열렬한 지지 군중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담겨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녀를 천사 같고 성인 같은 장애인 여성으로만 기억할 뿐이다. 한 감각의 상실과 결손이 다른 감각의 발달로 보상됨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의 경우, 그러한 모든 감각들을 고유한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책 <내가 사는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각-청각 장애 아이들은 끈질기게 어둠을 탐험하여 어떤 곳인지 알아간다. 그의 영혼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그곳은 늘 햇빛이 비치고 새들이 노래하는 곳이다.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 어둠은 친숙하다. 어둠 속에는 이상하거나 무시무시한 것이 없다.

 

그곳은 그 아이가 잘 알고 있는 세계이다. 손으로 더듬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조차 아이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라는 저울로 자기 삶의 무게를 잴 때에야 비로소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다.”

 

헬렌 켈러는 내 몸의 모든 원자는 진동계라고 얘기할 만큼 떨림을 자기 세상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 삼았다. 또한 그녀는 뛰어난 후각을 가졌지만, ‘어떤 설명하기 힘든 이유 때문에 후각이 다른 감각보다 뛰어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후각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감각주의자’ 헬렌 켈러

 

그녀의 감동적 산문 사흘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은 내가 군에서 갓 제대한 후, 누군가의 집에서 읽은 오래된 월간지 샘터에서 만난 글이다. 나는 그것을 찢어서 주머니에 넣었고, 30여 년 가까이 이 글을 간직해 왔다.

 

이 작품은 이른바 감각적 경험을 즐기는 감각주의자’(다이앤 애커맨, <감각의 역사>의 저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각은 필경은 숭고한 비장미로 우리의 진부한 일상과 둔감한 감성을 예리하게 저며온다.


사흘만 눈을 뜰 수 있다면

▲ 1942년 벅스 카운티 농장에서 조각가 조 데이비슨이 마무리한 자신의 흉상을 만지고 있는 헬렌 켈러.

나는 종종 성년 초기에 모든 사람이 며칠간만이라도 눈멀고 귀 먹는다면 얼마나 축복 받는 일일까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암흑이 시각의 감사함을 좀더 느끼게 할 것이며, 정적이 소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줄 테니까요.

 

나는 가끔 눈으로 볼 수 있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 나는 숲 속에서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한 친구에게 무엇을 관찰했나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숲 속으로 한 시간을 걸었으면서도 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나는 단순한 접촉을 통해서도 수백 가지 것들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나뭇잎 하나의 미묘한 균형조차 느끼게 됩니다. 나는 사랑스럽게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뾰족하고 털이 난 소나무 껍질에 손을 갖다 댑니다.

 

봄날, 나는 오랜 겨울잠 후에 나타나는 자연 회생의 첫 번째 신호인 새싹을 발견하기 위해 나뭇가지들을 더듬어 보기도 합니다. 때때로 운이 좋으면 내 손을 가볍게 작은 나무 위에 얹어서 노래 부르고 있는 한 마리의 새의 행복한 떨림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끔 나의 마음은 이러한 모든 것을 보려고 갈망하면서 울부짖습니다. 단순한 접촉을 통해서도 그렇게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다면야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내 앞에 나타날까?

 

나는 단 사흘만이라도 눈을 뜰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 기간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우정으로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나는 마음의 거울인 눈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단지 손끝으로 얼굴의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웃음, 슬픔, 그리고 다른 많은 분명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지요.

 

나는 친구들을 그들 얼굴 느낌으로 압니다. 근육의 움직임, 손놀림과 표정의 미묘함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당신들은 얼마나 편하고 만족스럽겠습니까? 하지만 한 친구의 내면적인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해 당신의 시력을 사용해 본 적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혹시 외모만 관찰하고 그냥 흘러 넘어가진 않았나요?

 

예를 들어 당신은 좋은 친구 다섯 명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습니까? 내 경험으로 나는 남편들에게 그들 아내의 눈동자 색깔을 물었을 때, 몇몇은 혼동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 단 사흘 동안이라도 눈을 뜰 수 있다면.

 

그 첫째 날은 분주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 모두를 나에게로 불러 그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내 마음에 심으면서 오랫동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것입니다. 나는 또한 아기의 얼굴을 바라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얼굴에서 살아나가면서 생기는 개개인의 갈등에 우선하는 순수한 미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1888년 8세였던 헬렌 켈러가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의 브루스터에서 가정교사 앤 설리번(Anne Sullivan)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다.

나는 여태까지 나에게 읽혀 오고 인간 생활의 심오한 이치를 발견해 준 책들을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충성스럽고 귀여운 스코티와 용감한 그레이트데인 개를 눈여겨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시원한 숲 속을 거닐면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황홀한 색깔의 석양의 장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역시 그 날 밤은 잠이 들 수 없겠지요.

 

그 다음 날 새벽에는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맛볼 것입니다. 나는 경외심으로 태양이 잠든 세계를 깨우는 빛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보겠습니다. 나는 이날 현재와 과거 세계를 바쁘게 일별(一瞥)할 것입니다.

 

인간 진화의 화려한 행렬을 보기 위하여 박물관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나는 고대 환경을 그대로 묘사한 동물들과 인류, 즉 왜소한 몸과 강력한 두뇌로 동물의 왕국을 정복한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지구 위를 걸어다녔던 공룡들과 마스토돈(화석동물의 총칭)들의 압축된 지구의 역사를 보고 싶습니다.

 

그 다음 들릴 곳은 미술관입니다. 나는 손으로 만져서 고대 이집트의 신과 여신들의 조각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파르테논의 조각으로 모방한 장식벽을 만져 보았으며 웅장한 아테네 용사의 율동적인 아름다움도 느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암흑을 알고 있으니까요.

 

역시 둘째 날도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조사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촉감으로 느꼈던 것들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좀더 화려하고 웅대한 그림의 세계가 나에게 열려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피상적인 인상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심오하고 진실된 예술의 감상을 위해서는 눈을 훈련시켜야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선과 구성, 형태와 색깔의 장점을 고찰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내가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감상할 수 있을까?

 

둘째 날 저녁은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보낼 것입니다. 화려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치장을 한 매력적인 자태의 햄릿이나 거친 휠스타프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내 손으로 만져지는 한정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율동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비록 가끔 마루를 통해 느끼는 리듬으로 율동의 기쁨을 어느 정도 알지만, 러시아의 발레리나 파블로바의 우아함은 다만 희미하게 환상으로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 자기 반려견인 '토마스 경(Sir Thomas)'이라는 이름의 보스턴 불 테리어와 함께한 헬렌 켈러.

나는 율동이 이 세계에서 가장 기쁨을 주는 광경 중의 하나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율동의 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조각된 대리석을 손으로 더듬어서 모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정지된 우아함이 이처럼 사랑스러울 수 있다면 움직이고 있는 우아함을 보는 스릴은 얼마나 클까요?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한 번 해 뜨는 광경을 바라볼 것이며,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아름다움의 표현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셋째 날인 오늘, 나는 삶의 영위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인간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도시가 나의 행선지가 되겠지요.

 

첫째 나는 분주한 길모퉁이에서 서서 다만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일상 생활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일부분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웃음을 보면 행복할 것이고 신중한 결정을 보게 되면 나 또한 긍지를 느낄 것이며, 고통을 보면 동정을 느낄 것입니다.

 

5번가(뉴욕의 번화가)를 천천히 내려오면서 어느 한 곳을 집중해서 쳐다보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색깔의 만화경을 빼고는 특별히 볼 것이 없을 테니까요. 떼지어 다니는 여인들의 옷 색깔들은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 멋진 광경일 것이라 나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볼 수가 있다면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복장에만 신경 쓰고 하나하나 색깔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5번가로부터 도시의 여기저기를 여행하겠습니다. 빈민가, 공장, 아이들이 노는 공원으로 가 보겠습니다.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도 방문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외국 여행을 대신할 수 있겠지요. 항상 나의 눈은 행복과 불행한 모든 광경을 보기 위해 활짝 열려 있어서 어떻게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가는지를 알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광명의 셋째 날이 막을 내립니다. 아마 남은 몇 시간을 모두 바쳐야 할 많은 중요한 과제들이 있겠지만 마지막 날 저녁에 다시 영화관이나 유쾌한 연극 구경 가기가 두려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 영혼의 함축된 코미디가 있을 테니까요.

 

어둠뿐인 영속적인 밤이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이 짧은 사흘 동안에 내가 보고 싶어한 모든 것들을 다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암흑이 다시 내게로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보지 못하고 남겨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아마 이 짧은 개요는 당신이 장님이 될 운명을 알게 된다면 당신 스스로가 결정한 계획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만약 그러한 운명에 처한다면 전과 같이 당신의 눈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았던 모든 것들은 당신에게 아주 귀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포옹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아름다운 세계가 바로 당신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장님인 나는 볼 수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고 싶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물체를 내일이면 만져 보지 못하게 될 것처럼 만져 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와 맛을 못 느낄 것처럼 꽃향기를 마시며 매 숟갈마다 맛을 음미하십시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모든 감각 수단을 통해 당신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기쁨을 찬미하십시오. 하지만 모든 감각 중에 아마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즐거우리라 확신합니다.

 

 

2006. 12. 10.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