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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by 낮달2018 201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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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 발매... 해직 교사 시절 만난 그의 노래

▲ 김호철의 동료 후배들이 파업가 30주년을 기념한 김호철 헌정 음반을 발매했다.

음반을 한 장 샀다. ‘음반이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지금껏 산 음반이 채 열 장이 되지 않을 만큼 음악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탓이다. 음악애호가들이 소장을 자랑하곤 하는 엘피(LP)음반은 구경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걸 걸고 돌릴 이른바 오디오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거의 수십 년 만에 음반을 샀다. 그것도 인터넷으로 판매처(노동의 소리)를 찾아서 두꺼운 책 한 권 값인 2만5천 원을 ‘지른’ 것이다. 1천 명의 공동제작자가 함께 만들었다는 ‘김호철 헌정 음반’이다. 음반의 발매 소식을 알게 된 것은 <한겨레> 기사를 통해서였다.

 

1천 명 공동제작자가 만든 ‘김호철 헌정 음반’

 

김호철은 윤민석과 함께 이른바 ‘민중 가요계의 양대 산맥’이라고만 아는 이다. 1988년에 교육운동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익힌 노래가 그의 ‘파업가’였다. ‘흩어지면 죽는다 /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로 시작하는 파업가는 가사가 그리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단순한 리듬으로 노래하는 대중들을 묶어주는 데는 그만이었다.

 

한글 이름이 나와 같았지만, 난 거기서 특별히 동질성을 느끼지 못했다. 소설가 이호철에게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작곡가인 그에게 동류라는 생각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나는 그가 만든 노래를 통해서 시대와 변혁에 대한 열망을 그와 공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시위와 집회 현장을 달군 것은 변혁의 열망으로 모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마저 하나로 묶어준 ‘노래’였다. 이른바 이들 ‘민중가요’는 참여자들의 뜨거운 연대를 확인해주면서 동시에 때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확신으로, 두려움을 넘는 벅찬 용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쩌다가 해직이 되어 거리의 교사가 되었지만, 누구나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천적이기보다는 사변적이고, 상황을 한 발자국쯤 떨어져 바라보는 어정쩡한 태도로 운동과 투쟁의 현장을 기웃대던 자신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것은 그 시절의 거리를 메우던 ‘단결투쟁가’의 함성과 여운이다.

 

작곡가 김호철이 처음으로 ‘파업가’를 선보인 게 1988년 늦가을이다. 그리고 그는 이후 30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부르고 따라 하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지난 30년간 노동해방의 현장에 복무했다. 그를 ‘노동해방의 나팔수’라 하는 이유다.

 

그는 뜻밖에도, 졸업하지는 못했으나 한국체대 태권도학과 출신이다. 총학생회장이 되어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 징집된 그는 군악대에서 근무하면서 악기 연주를 시작하고 음악에 입문했다. 제대한 뒤, 한동안 밤업소에서 일하던 그는 1980년대 중반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한 그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그린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순 조립공’, ‘X에게’, ‘단결투쟁가’, ‘파업가’, ‘포장마차’ 등이 이 시기의 노래다. 그는 ‘노동자 노래단’을 이끌며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운동가요를 ‘민중가요’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자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고집했기에 그의 노래 ‘파업가’는 웬만한 노동자치고 모르는 이가 없는 곡이 되었다. 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이 “김호철은 고급스럽고 지적인 노래보다 노동자들이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는 노래, 그들의 삶을 정직하고 치열하게 담은 노래를 만드는 데 치중했다. 그는 군가풍 리듬이나 뽕짝 스타일을 피하지 않았다. 음악적 훈련을 받지 않은 노동자들에겐 그 스타일이 익숙했기 때문이다”(앞의 기사, 이하 같음)라고 평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돈 안 되는 ‘민중가요’만 만들며 고단하게 살아온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지난해 봄, 부인인 민중가수 황현이 희귀암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후배인 윤민석이 겪은 시련이 어떻게 그에게도 고스란히 되풀이되는지. 암이라는 중병을 다스리는 데는 경제력이 필수다.

 

2011년 아내의 암 재발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윤민석이 이듬해 트위터에 올린 구원 요청에 시민들이 순식간에 1억 5천만 원을 모아주어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김호철에게도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다. 후원주점을 통해 투병기금 1억 원을 모아준 동료들은 이번에는 ‘김호철 헌정음반’을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쳤다.

 

그의 대표작 ‘파업가’가 나온 지 30년 만이었다. 당연히 이 헌정음반은 ‘파업가 30주년 기념 김호철 헌정음반’이 되었다. 음반에는 5만 원씩 낸 공동제작자가 1천 명, 가수 27명과 4·16 합창단, 노동자 노래패 31명, 9명의 연주자가 참여했다. 300곡이 넘는 그의 노래 가운데 현장에서 널리 불린 노래 등 21곡이 엄선되어 실렸다.

 

헌정음반이 나온 건 지난달. 시디(CD) 2500장을 찍었는데 모두 나가서 1500장을 더 찍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난 20일 구매한 시디는 새로 찍은 1500장 가운데 한 장이겠다. 기사를 보자마자, 시디를 사야겠다고 생각해 놓고는 나는 한동안 그걸 까맣게 잊고 지냈다.

 

80~90년대를 지나온 이들은 모두 그에게 빚지고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나는 지금껏 산 음반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게 열 장이 채 안 되는 음악의 문외한이다. 그런데도 김호철 헌정음반 기사를 읽으면서 이 음반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지만, 우리가 함께 나눈 게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우쳤던 듯하다.

 

그가 지은 노래 몇 곡을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목청껏 부른 게 다지만, 어찌 우리가 나눈 게 고작 몇 곡의 노래뿐이었겠는가. 우리는 그가 묘사한 세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현실에서 공유한 동시대인이었다. 우리는 공동의 적을 향해 같이 분노했고, 세상의 진보와 변화를 위해 함께 싸웠다.

 

그게 어찌 알량한 노래 몇 곡의 인연에 그치겠는가 말이다. 김호철은 얼치기 교육 노동자인 나와 달리 치열하게 싸웠고, 숱한 사람들의 영혼과 의지를 고무했다. 나와 동년배인 그가 노래를 통해 걸어온 투쟁의 길 30년은 내가 지나온 교단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 교단의 삶이 동료와 제자들의 기림을 받은 것처럼 그의 노래 30년도 기려져야 마땅한 것이다.

 

헌정음반은 데스크톱 컴퓨터에 삽입해도 실행되지 않았다. 엠피(MP)3로 변환한 뒤에야 나는 첫 곡 ‘꽃다지’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파업가’보다 ‘단결투쟁가’보다 그의 노래 ‘꽃다지’가 훨씬 좋다. 그건 내가 덜 투쟁적이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노래가 안겨주는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류금신·최도은이 부르는 ‘꽃다지’의 힘

▲ 음반에는 한 장의 시디와 함께 가사와 김호철 노래 연대기를 기록한 소책자가 들어 있다.

헌정음반의 꽃다지 2009년에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썼던 글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에 올렸던 인천민중문화예술운동에서 만든 꽃다지와는 결이 또 다르다. 그 선이 굵은 여성의 목소리와 달리 이번에는 류금신과 최도은이 부르는 맑고 담백한 목소리다. 담담하게 1절을 노래하던 목소리는 2절에서 물기를 띠기 시작했고, 왜 이러지 하는데 저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꽃다지’가 결이 달라진 것은 헌정음반의 정윤경 음악감독의 의도 때문이다. 그는 “‘파업가’, ‘단결투쟁가’처럼 익숙한 노래는 최대한 원곡 분위기대로”, “나머지 노래들은 감성적인 노랫말을 느끼며 감상할 수 있도록 담백한 포크 스타일 등으로 바꿔 편곡했다”고 밝혔다. “집회장에서 소비되는 형태가 아니라 집에서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꽃다지’는 감옥에서 느끼는 애상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지만 ‘나약한’ 노래는 아니다. 화자는 감옥의 언덕길에 핀 꽃다지를 보면서 동지를 생각하고 사무치는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할 뿐이다. 그 강제된 휴식의 순간에 사무친 사랑과 그리움이야말로 새로운 투쟁을 예비하는 일 아닌가. ‘꽃다지’를 들으며 우리가 다시 희망을 그리고 힘을 얻는 이유다.

 

김호철은 강고한 투쟁을 노래하다가도 “아른아른 옛사랑 풋향기에 젖어 쑥스러워 가는 것이 세월이야”(‘세월’)라고 하면서 “나의 슬픔도 가져가거라 나의 눈물도 가져가거라”(‘희망의 노래’)고 노래한다. 힘은 크고 강한 데만 있지 않다. 유연함과 너그러움 속에 더 강한 힘이 숨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헌정음반을 들어보라. “노동은 사랑이야 하나가 되는 아픔이야”라고 노래하는 그의 실루엣이 낯설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파업가를 부르며, 단결투쟁가를 목놓아 외치며 싸워온, 그의 노래에 얼마간 빚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파업가" 30주년 기념 김호철 헌정 음반>의 표지 ⓒ 노동의 소리

 

2019. 1. 24. 낮달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 발매... 해직 교사 시절 만난 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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