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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법의 지배’를 다시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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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지배’, 정말 그게 민주주의의 요체일까

▲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nbsp; 309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nbsp; ⓒ <한겨레>

한진중공업의 극적 노사 합의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청구한 김진숙 지도위원 등 노조 간부 5명의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것은 지난달 27일이다. 법원은 “최강서 씨 장례 뒤 피의자들이 수사기관에 자진 출석해 조사를 받았고, 노사가 원만히 합의해 피해자(회사 쪽)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각 사유로 들었다.

 

김진숙에 대한 검찰의 영장 재청구

 

그런데 정확히 9일이 지나 이달 8일 검찰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검찰은 “김씨는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불법 농성에 가담해 재범의 우려가 있고 무거운 처벌이 예상돼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점을 영장 재청구 이유로 들었다고 한다.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검찰과 법원의 시선이 자못 엇갈리는 셈인데, 그걸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심사도 좀 어지럽다. 판사나 검사는 모두 우리 사회의 이른바 최고 엘리트다. 그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가 판검사라는 다른 신분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 때문에 구속 수감하는 게 옳다는 대목에 이르면 입맛이 쓰다.

 

가끔 약국에서 고객의 요구에 따라 약을 파는 약사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전문직’이라기보다 단순 판매직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집시법 따위로 기소된 동료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마치 앵무새처럼 범죄사실을 읊조리고 ‘징역 ○년’에 처해 주십사 하고 구형을 마치는 새파란 나이의 검사를 바라보는 느낌도 비슷하다.

 

그들은 어떤 확신에 따라 범죄자의 ‘징벌’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매우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하급 관리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재판부에 구하는 형량이 한 인간의 범죄행위로 말미암은 재산형이나 신체형이라기보다는 무슨 장사치들이 주고받는 계약조건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2월 하순에 <작은책> 3월호가 왔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를 내건, 이 월정 3500원 짜리 월간지는 그 안에 꽤 묵직한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 친구 ‘미나리’의 추천을 받아 햇수로 육 년째 이 책을 받고 있는데 150쪽 안팎의 얄팍한 두께 속에 담긴 것은 인간의 삶과 현실에서 마땅히 추구되어야 할 상식과 진실이다.

 

3월호에는 <작은책>에서 매월 펴는 인문학 강좌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김진숙 편 ‘크레인에서 버텼던 309일’이 실렸다. 20년을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이 강철보다 강하면서도 풀잎만큼이나 부드러운 노동운동가는 정직하고 설득력 있는 글솜씨만큼이나 말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작은책>, 크레인에서 버텼던 309일

 

김진숙이 <소금꽃 나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글쟁이를 부끄럽게 만든 게 불과 대여섯 해 전이다. 깡패와 창녀 등의 삶을 다룬 르포집 <어둠의 자식들>의 머리말에서 작가 황석영은 “이들의 삶이 이럴진대 대체 작가란 무엇 하는 존재인가” 하고 개탄한 바 있었지만, 김진숙의 삶과 논리 앞에서 다시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 <소금꽃 나무>, 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2007

‘법과 정의’가 가난한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건 이제 구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판사와 검사가 피고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을 김진숙은 ‘쪽팔려서’라고 뭉뚱그렸다. 스스로 판관이긴 하지만 그들이 다루어야 하는 죄를 확신하지 못하는 우울한 ‘사법의 풍경’이다.

 

7, 80년대 법정의 풍경이 그랬다는 것 널리 알려진 얘기다. 구형하거나 선고하는 검사나 판사보다 피고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의젓했다고. 유신 이후 이어진 군부독재 시기엔 법이 반대자와 국민을 억압하고 단죄하는 국가폭력의 도구 노릇을 쏠쏠히 했고, 이른바 검찰과 법원은 그 하수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민주화 이후, 어쨌거나 21세기다. 그 성격과는 무관하게 권력은 합법적으로 선출되고 이른바 법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법정의 풍경이 지난 세기의 그것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법이 보편적 정의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법의 지배’를 생각한다

 

‘노사분규’라면 당연히 ‘노’와 ‘사’, 그 쟁의의 양 당사자가 엄연히 실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늘 법에 따라 구속되고 압류되는 건 노동자일까. 노동자의 법 위반은 추상같이 단죄하되, 자본이 저지른 범죄행위 앞에서 법의 발걸음은 그리 느려지기만 할까.

 

▲ 김진숙의 글이 실린 <작은책>

“……크레인에 올라갔던 것 때문에 재판을 받았거든요. 죄명이 뭐였을 것 같습니까. 국가보안법 이런 것까지 바라진 않아요. 노동쟁의조정법 이런 것도 있잖아요. 근데 주거 침입이었다니까요? 쪽팔려서 어디 얘기를 못 하겠더라구요.

생각해 보니까 걸 게 없어요. 직장폐쇄 중이었으니까 업무 방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가 희망 버스를 탔나, 다 불러 모았나, 걸 게 없는 거예요. 정리해고 막겠다고 크레인에 올라갔던 게 죄가 됐으면 그 정리해고가 합당했는지 부당했는지를 따져야 할 거 아니에요.

주거 침입이라 해 놓으니까 크레인이 주거 시설이냐 아니냐, 주방 시설이 있었냐 없었냐, 화장실이 있었냐 없었냐가 쟁점이었다니깐요. 1심에서 없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그럼 무죄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검사가 항소를 하면서 뭘 들고 나왔냐면 크레인에 기둥이 있었냐 없었냐, 기둥이 있으면 주거 시설이래요.

근데 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게 지부 크레인이라 아주 튼튼한 다리가 네 개 있잖아요. 그 다리 밑에 바퀴가 달려서 레일을 타고 움직인단 말이죠, 우리는 발이라 주장하고, 그 사람들은 기둥이라는 거예요. 아니 어떤 미친 기둥이 바퀴가 달려서 움직이냐고요.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판검사들이 모르겠습니까. 저들도 쪽팔리죠. 재판을 하는데 고개를 못 들어요. 제가 재판 때마다 검사님 괜찮습니다, 고개 좀 드세요, 판사님 얼굴 좀 봅시다. 이러면서 재판을 받으니 피고인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판사가 판결문을 읽으면서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 처벌을 할 수밖에 없대요. 저는 솔직히 물의가 일어난지도 몰랐대니깐요. 희망 버스 한 번도 못 탔어요. 물의는 여러분들이 일으켰잖아요, 그죠?

판사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노동자들이 물의조차 일으키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돌아봅디까, 쌍용자동차 비정규직들까지 3천 명이 넘게 잘렸습니다. 그때까지 스물두 명이 죽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잘리고 줄어 갈 동안에 대한민국의 법원은 뭐 했습니까.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6년째 길바닥에 있는데, 그 사실을 판사님께선 아십니까? 판사가 판결문을 읽으면서 고개를 못 들던 재판. 제가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 벌금이 하루에 백만 원이었잖아요. 제가 3억9백만 원어치를 살고 온 사람이라니깐요. 그걸 판결했던 사람이 김신 씨라고 이번에 대법관이 된 거잖아요.

한진중공업이 얼마나 급했는지, 제가 1월 6일 날 올라가자마자 그날 밤에 법원 야간 당직실에 얘를 벌금을 매겨주세요, 말을 한 거예요. 또 판사님은 어찌나 급했는지 바로 ‘하루에 백만 원 땅땅땅. 제 얘기는 단 한마디도 안 듣고요.

    - 김진숙 ‘크레인에서 버텼던 309일’ 중에서(읽기의 편의를 위해서 문단을 나눔)

 

하도 오랫동안 제기된 문제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이런 논의를 웬 뜬금없는 수작이냐는 듯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새삼스럽게 정색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냉소와 체념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리의 사법 현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매겨지게 되었겠는가.

 

교과서는 ‘법의 지배(Rule of law)’란 “‘인(人)의 지배’나 ‘폭력의 지배’를 배제하며, 국왕이나 국가기관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법원이 행사하는 보통의 법(regular law)의 지배를 받는다는 원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사회 현실에서 그것은 기득권 계급의 질서가 온전히 미치는 사회, 사회적 강자의 논리가 보편적 질서의 원리로 통용되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수억, 수십억의 부정을 저질러 구속된 전임 권력의 측근들은 마지막 특사로 풀려나 무죄를 강변하고 공익과 사회정의를 위해 ‘떡값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국회의원은 유죄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폐암 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라거나 “도둑을 신고했더니 도둑은 놔두고 신고한 사람을 잡아가는 격”이라는 여론 앞에서 이 나라 최고 법원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다.

 

▲ 김진숙 ⓒ <작은책> 백남호

어쩌다가 벌어지는 특수사례가 아니라 이런 현실은 대한민국에선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쿠데타와 시민들의 저항을 유혈로 진압하고 권력을 강탈한 전직 독재자는 뒤에 내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현실 권력’이다. 100억 원대의 횡령과 세금포탈, 수백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그의 동생은 징역 5년 선고에도 실제 수감은 2개월, 여전히 호화생활로 이 나라 기득권이 누리는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관련 기사 “사기죄 5년 선고에도 실제 수감은 2개월, 누구?”]

 

검찰이 재청구한 구속영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 잘난 ‘법’을 떠나서 우리네 사람들의 상식에 따르면 그건 마땅히 다시 기각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른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법률가들의 논리는 워낙 출중해서 때로 형식 논리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니 말이다.

 

“불법 농성에 가담해 재범의 우려가 있고 무거운 처벌이 예상돼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검찰의 영장 재청구 사유에도 ‘법’이 차고 넘친다. ‘불법’ 농성과 ‘재범’과 ‘처벌’과 ‘도주’와 ‘증거’ 인멸 따위의 낱말에 담긴 ‘법’의 ‘서슬’은 시퍼렇다. 그러나 ‘상식’과 ‘인간’을 ‘법’보다 우위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법은 그 위엄과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을 새삼 씁쓸하게 확인한다.

 

 

2013. 3. 10. 낮달

 


7년 뒤

 

▲ 김진숙 지도위원 ⓒ 가톨릭뉴스

우연일까, 이 글을 쓴 게 2013년인데, 꼭 7년 후인 올해 <작은책> 2월호에는 사진작가 장영식이 쓴 ‘친구의 집을 향한 여정’이 실렸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대구까지 130km에 이르는 도보 대장정을 기록한 글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대구 영남대 의료원 옥상에서 176일째 고공농성 중인 친구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만나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 항암 투병 중에도 힘든 여정을 시작했고, 도중에 합류한 조합원, 시민들과 함께 182일째 날에 무사히 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방문 뒤 박문진 지도위원의 농성은 45일 동안 더 이어졌고, 지난 2월 12일, 227일 만에 농성을 종료하고 74m 지상으로 내려왔다. 노사합의로 박 위원은 13년 만에 일터로 복직하게 되었다. 13년 동안의 투쟁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2011년에서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지 9년이 지났다. 그러나 박문진의 농성에서 보듯 세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김진숙이 지적한 대로 ‘노동자들이 물의조차 일으키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하는가 말이다.

 

지금도 고공에서 외로운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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