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내몰린 세 가족, 극단적 선택
대구에서 가난에 내몰린 일가족 셋이 자살했다. 남편 부도로 이혼한 뒤 어렵게 두 자녀와 함께 살아온 어머니(41)가 가스가 끊기고 집세를 마련하지 못하자 딸(18), 아들(16)과 함께 방안에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다. [관련 기사]
포털마다 양념인 듯 떠 있던 그 기사는 이내 사라졌다. 나는 제목만 읽었다가 뒤에 그 기사를 정독했다. 기사 앞에서 우리는 망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다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아려와 울컥했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들 일가의 죽음과 그것이 환기하는 이 비정한 사회의 야만성 앞에서.
이 나라는 가난에 지친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른바 ‘동반 자살’을 감행하는 곳이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어린 자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모의 뜻에 따라 아이들이 희생되는 것은 ‘살인’과 진배없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 행태를 ‘동반’이라는 말로 꾸밀 수 없다는 세간의 지적은 옳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선택을 따랐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기로 작정한 어버이들이 어린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기는 쉽지 않다. 세상의 풍파에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는 것보다 데리고 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게 부모들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자식의 생명을 앗는 부모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 어떻게 자랄 것인가를 부모들은 경험으로 일찌감치 꿰뚫고 있다는 얘기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어린것들 이야기에 분노하고 눈물 흘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을 보듬고 기를 수 있는 제도와 법의 뒷받침이 없는 나라와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대구의 세 가족이 선택한 죽음은 앞서 말한 죽음과는 달라 보인다. 18, 16살짜리 딸과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자신들이 견뎌야 할 가난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데 동의했다. 가족들은 ‘죽는 방법’을 논의했고 극단적 선택을 감행했다. 딸은 남긴 일기에 그렇게 적었다고 한다.
“동생, 엄마와 함께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것보다 차라리 일산화탄소를 마시고 죽는 것이 편안할 것 같다고 얘기하고 연탄가스를 피워 죽기로 했다…….”
누나는 열여덟, 동생은 열여섯. 각각 고3과 고1, 법적으로야 미성년이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능력은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진 짐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머니의 짐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어머니가 선택한 길에 동참하는 거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증명한 것일까.
나는 기사를 읽고, 또 이 글을 쓰는 내내 이들 남매의 모습을 지금은 장성한 내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 보았다. 자신들의 선택을 또박또박 일기로 기록했던 여자아이의 모습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하지만, 이들은 낙엽 구르는 소리에도 깔깔대고 넘어갈 싱그러운 10대들이다. 주변인으로서의 방황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조차 가뿐히 뛰어넘을 ‘무한 가능성’의 세대다. 그러나 현재의 가난과 절망이 그 미래의 부박한 희망을 압도해 버렸다. 이 착한 아이들은 어머니의 짐을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와 삶을 포기한 것이다.
우리도 이 사회와 제도의 일부일 뿐
나는 이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기로 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보낸 시간을 잠깐 그려보았다. 일산화탄소를 만들기 위해 야외용 그릴을 방안에 들이고, 거기 네 장의 번개탄에 불을 붙인 건 동생이었을까, 누나였을까. 남매는 나란히 침대 위에, 어머니는 방 바닥에 누웠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을까.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의 크기와 무게는 7, 80대 노인에게나 10대의 소년 소녀에게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주 의연하게 그걸 결정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죄스럽고 아프다.
작가 황석영은 그의 소설(아우를 위하여)에서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고 했다. 신영복 선생은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고 썼다. 나는 나 역시 그들 남매의 꿈과 미래를 앗아간 이 비정한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저 착한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이 얼마나 값싼 것인가도 깨닫는다. 나는 저들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다만 이 비극 앞에서 무력한 소시민에 불과한 자신을 눈물로 위무하는 것은 아닌가.
지난 겨울방학 동안 급식이 끊긴 아이들이 7만 명이었다는데, 권력 주변은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라 강변한다. 한발 더 나아가 “무상급식을 하면 극단적으로 옷도 사주고 집도 사줄 것이냐”고 덧붙이는 위인이 이 나라 경제부처의 수장이다. 이처럼 ‘복지’와 ‘민생’을 바라보는 권력의 천박한 인식이 ‘선진화 조국’의 현주소다.
맞벌이 영세민 부부가 문을 걸고 일을 나간 사이, 집에서 놀던 어린 남매가 불장난 끝에 방안에서 질식해 숨진 사고를 노래한 정태춘의 노래를 기억한다. 그 노래, <우리들의 죽음>의 끝부분에서 다섯 살, 세 살짜리 어린것들은 가만히 살아남은 엄마 아빠에게 속삭인다.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아름다운 말로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안녕…….”
나는 번개탄을 피워놓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 어머니와 남매의 대화를 마치 생시인 듯 듣는다.
“얘들아, 미안하다. 못난 엄마를 용서해 주겠니?”
“엄마, 우린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래요. 가난도 슬픔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시간, 행복한 가정을 꾸려요.”
“엄마, 우린 편안해요. 가난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야. 사랑해요, 엄마.”
“엄마, 사랑해요.”
“그래, 나도 사랑한다…….”
그 어머니와 남매의 선택은 결코 미화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 선택을 우리는 쉬 나무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들이 마지막 인사에서 나눈 것처럼 가난과 슬픔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다. 그러나, 정녕 저 착한 아이들과 어머니는 저세상에서 만날 수는 있을까…….
2010. 3. 8. 낮달
꼭 십 년 전 이야기다. 이 글을 쓰면서 자책한 것은 내가 이 사건을 값싼 슬픔으로만 소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의식 때문이었다. 10년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다소 나아졌다. 무상급식은 제도화로 정착했고, 이제 그걸 시비 거는 정치인이나 관료는 없다.
끼니나 생명을 다투는 가정에는 이른바 ‘취약위기 가족 돌봄 지원’이라는 복지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다. 여전히 ‘복지’를 ‘퍼주기’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의 경제력에 비겨 ‘복지’가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도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은 우리가 갈 길이 여전히 멀다는 걸 확인한다. 최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죽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의무를 당당히 요구하는 시민이 늘어야 한다. 인간을 죽음으로 모는 가난은 더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이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202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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