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을 같이한 책상과 책꽂이를 떠나보내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들인 가구가 목제 책상이었는데 10년쯤 쓰고 딸애에게 물려주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쓰기 시작해 손때가 결은 나무 책상은 아이가 삼십 대 중반을 넘겨 성장한 세월을 우리 가족과 같이했다. 2018년 11월,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딸아이가 책상을 버릴까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래라, 그만하면 오래 썼다, 하고 무심히 대답했는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초임 시절에 마련한 목제 책상
그 나무 책상은 1984년 초임 교사 시절 단칸방 살림 시절에 산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놈은 내가 고향 가까이 학교를 옮겨오고, 거기서 쫓겨난 뒤 해마다 이사를 하고, 5년 후 경북 북부지방의 시골 학교로 복직하고, 다시 몇 학교를 거쳐 2016년 퇴직하고도 이태를 더 가족과 함께한 거였다. 자그마치 34년 동안이나 말이다.
가구와 같은 대형 폐기물을 내놓는 11월의 마지막 월요일, 딸애는 스티커를 붙인 책상을 들어냈다. 도와달라고 해서 아이 방에 가 보니 책과 내용물을 빼낸 책상만 덩그런데, 한눈에 남루한 살림살이 티가 역력했다. 내용물을 들어내 뼈대만 남은 책상은 실제보다 더 낡고 허술해 보였다.
아이와 마주 들고 책상을 폐기물 내놓는 데까지 옮기는데 때가 묻거나 흠집이 나고, 닳아서 패인 부분이 유난스레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종이 바른 가구’가 아닌 원목이어서일까, 34년 동안이나 생활을 같이한 책상은 그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무거웠다.
때 묻고 낡은 책상과 책꽂이였지만, 초임으로 교단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거기 엎드려 무언가를 썼고, 사들인 책으로 그 공간을 조금씩 채워갔다. 쓴 글에 절망을 거듭하면서 나는 습작기를 마감했고, 서가에 늘어가는 책과 함께 이른바 ‘성실한 독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겐 책상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는 안방의 좌식 책상을 썼다. 당시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렵지 않아, 입식 책상을 들일 수 있었을 텐데 구식 어른이어서였을까, 부모님은 책상을 바꿔주지 않으셨다.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책상은커녕 밥상을 펴놓고 공부하는 게 고작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단칸방 사는 형님과 누님에게 더부살이하는 형편이라 책상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던 까닭이다. 나는 당시 유행한 포마이카 칠을 한 윤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고등학교에 2학년 때, 혼자 쓰는 자취방을 얻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인근 가구거리에서 팔던 합판으로 짠 입식 책상을 사들인 것이었다. 어깨에 둘러메고 올 만큼 부실해서 가벼웠던, 그 물건을 나는 단돈 2천 원에 샀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성큼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 물건을 이태 동안 정말 요긴하게 썼다.
대학 때에 상황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4년간 고향 집에서 버스 통학을 했는데, 오래된 흙집의 낡은 방에 새로 책상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밥상으로 책상을 대신했다.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게 영 불편하지만은 않아서였을 것이다.
시골 여학교에 임용되어 근무를 시작했을 땐, 금방이라도 제대로 모양을 갖춘 책상을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책상 구매를 가을까지 미룬 것은 아마 단칸방 전세금을 이웃에게서 빌려 나갈 만큼 여유가 없어서였던 듯하다. 퇴근해 집에 돌아와도 진득이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는 일도 없으면서 책상 들이는 일을 잊지 않은 것은 시원히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면서도 책상에 앉아 궁싯거리는 저 습작 시기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가난한 글쓰기와 독서 편력 지킴이
정기 고사 때마다 밥상에 앉아서 출제하느라 끙끙대는 모습을 보아온 아내의 동의를 얻어 그해 가을, 나는 읍내의 한 가구 대리점에서 원목 책상 세트를 샀다. 말레이 제도 한가운데에 있는 큰 섬의 이름을 딴 그 가구 브랜드가 한창 잘나갈 때였다. 들인 비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 무렵 내가 받은 본봉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책상 위에다 고정하는 책꽂이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선반을 포함하여 3단이어서 거길 채우려면 좋이 수십 권의 책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에 사서 읽은 단행본과 전공 서적들로 공간을 채웠는데 그래도 한 단쯤이 비어서, 나는 내 빈약한 장서 앞에서 조금 부끄러워졌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인근 도시의 큰 책방을 드나들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다. 두어 시간쯤 서점에서 머물며 많으면 일여덟 권, 적으면 대여섯 권의 책을 고르고, 그것의 합계액과 내 주머니 사정을 저울질해보며 보낸 시간은 지금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꽂이가 모두 차자, 나는 책장을 새로 들여야 했다. 지금도 베란다 한쪽을 차지한 어두운 우드 빛깔의 길쭉한 5단 책장이 그때 들인 것이다. 책장은 하나둘씩 늘거나 더 큰 규격으로 진화하면서 내 독서 편력을 채워갔다. 그리고 거기 꽂힌 책들은 좌충우돌하며 한 시절을 살아온 나를 그나마 성장케 한 자양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편식성 독서를 극복하고자 역사와 인문·사회과학 쪽의 책 읽기에 힘썼는데, 그게 내 지적 균형에 얼마만 한 이바지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해 겨울 화랑교육원의 무슨 연수를 받으면서 강의 듣기를 포기하고, 세로쓰기에다 국한문 혼용의 을유문화사판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 Frazer)의 <황금의 가지> 상하권을 이 잡듯이 읽었던 걸 그나마 기특한 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 여학교는 사학치고는 괜찮은 학교였지만, 일과가 끝나면 모여서 소주를 과음하던 젊은 교사들에게 학교 교육은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우리는 아이들과 교감하면서 발견한 희망에 부풀었고, 어떤 열정조차도 중화해 버리는 교단의 모순과 관성 앞에서 좌절했다. 그때, 우리의 자학적 방황은 그것들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고통의 통과의례였다.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며 지리멸렬한 교육을 뒤엎을 궁리를 하다가 다음날 냉엄한 현실로 돌아오는 변화무쌍한 일상에서 독서는 일종의 피안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만나게 된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 특히 <베트남 전쟁>을 읽었을 때의 전율과 할라즈(Nicholas Halasz)의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은 실천적 삶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한 좌충우돌식의 난독(難讀)을 거치면서 나는 내 취향이 <황금의 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인류학의 보고를 훔쳐보는 재미에 몇 년간 푹 빠져 있었다.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와 요한슨(Donald Johanson), 헬렌 피셔(Helene Fischer)를 읽었고 한국의 무속에도 한동안 잔뜩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 9월에 자주적 교원 조직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결성되었다. 죽이 맞는 동료와 함께 지역 교사협의회를 세우자는 모의를 하면서 그해를 보냈는데, 이듬해 고향 근처의 남학교로 옮기면서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대신 옮겨온 지역에서 교협을 만들었고, 이듬해에 전교조 결성에 참여하면서 나는 그 남학교에서 해임되었다.
5년 가까이 이어진 해직 시기에 나는 해마다 이사를 하면서 월 이삼십만 원의 생계비로 버텼다. 수명이 다한 가재도구도 엔간하면 고쳐서 쓰는 등, 새것으로 바꾸지 않는 맷집을 키운 시기였다. 다리미를 비롯하여 브라운관 컬러텔레비전, 흑백텔레비전, 전자레인지, 선풍기 따위를 십몇 년에서 20년 넘게 쓰게 된 이력은 거기서 비롯한 것이었다.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다리미는 울산의 유명 알루미늄 회사에서 만든 물건인데, 아내는 그걸 정확히 17년 동안 썼다. 물론 그것은 스팀이 자동으로 나오는 신식 물건이 아니라 다림질할 때마다 분무기를 써야 하는 구식이었다. 10년을 넘기면서 코드의 헝겊 피복이 벗겨져서 내가 굵다란 전선으로 갈아준 다리미를 아내는 대여섯 해쯤 더 썼다.
그놈의 수명이 다한 후, 할부로 5만 원이 조금 넘는 새 다리미를 사 온 아내가 저절로 스팀을 뿜어내는 그 신식(!) 물건을 쓰면서 억울하다는 듯 내뱉은 탄식을 아직도 우리는 추억처럼 되뇌곤 한다. “이리 좋은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거기 담긴 건 가족이 함께 건너온 세월
그러나 우리 집 ‘골동품’의 백미는 그 초임 학교에 근무하던 1987년, 두 번째 전셋집에 살 때 마련한 선풍기다. 이 고물 딱지 물건을 버리나 마느냐 하고 있는데 딸애가 ‘얼마나 오래된 거’냐고 물어 그렇다고 했더니 햇수를 어림해 본 아이는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아빠, 21년이에요.”
스무 해를 넘긴 선풍기는 일찌감치 회전 기능을 잃었고 단종된 모델이라 탈이 난 부품도 갈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여름을 지내고 나서 그걸 전자제품 폐기물로 버렸다. 아이는 ‘골동품 공화국’이라고 농을 했지만, 오래된 물건에 담긴 건 가족이 함께 건너온 세월이라는 걸 아이도 안다.(관련 기사 : ‘가족 헌법’ 1조, 우리 집은 골동품 공화국이다)
1994년 경북 북부지역으로 복직해 컴퓨터 책상을 들여 쓰게 되면서, 나무 책상은 이듬해 중학교에 들어간 딸애가 물려받았다. 낡은 책상이었지만, 아이는 그래도 튼튼하고 넓고 편하다며 군말 없이 그걸 제 방에 들이고 매우 만족스럽게 썼다.
책꽂이를 제 책으로 채우고, 책상을 정성스레 관리하면서 아이는 고등학교와 대학 공부까지 마쳤다. 책꽂이 맨 밑단이 책 무게 탓에 내려앉기 시작해서 나는 두툼한 나무토막으로 그걸 받쳐주는 임시 변통을 했다. 탈이 난 건 의자부터다. 좌판과 기둥의 결합이 어긋나더니 빠졌고, 뼈대가 되는 기둥도 부러졌다. 그게 2017년 말께의 일이다. 아이가 버리려고 내놓는 의자를 보고 나는 책상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폐기물로 내놓기 전에 나는 책상과 책꽂이를 사진기에 담았다. 그리고 폐기물을 싣고 가기까지 그 주변을 지날 때마다 물끄러미 책상을 바라보곤 했다. 무언가 아쉬웠다는 얘긴데, 버리는 게 아깝고 안타까워서가 아니라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주인의 삶과 성장을 지켜 보아온 책상과 책꽂이는 마침내 소임을 다하고 그렇게 떠나갔다.
사진은 흐르는 세월을 정지 화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오래 손때 묻히며 써 온 가재도구에는 그것과 함께한 세월, 한 시절의 슬픔과 기쁨이 배어 있다. 농부가 오래 써 온 낡은 농기구를 애지중지하고, 바느질로 살아온 장인이 가위나 자 같은 데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다.
나는 거기 앉아 무언가를 썼고, 서가에서 책을 뽑아 읽고 손 닿는 데 그걸 보관하면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런 뜻에서 떠나보낸 책상과 책꽂이는 내 가난한 글쓰기, 편식성 독서 편력을 말없이 지켜봐 준 도반(道伴)이었다. 또 나무가 품고 안아 준 숱한 파지들과 손때 묻은 책이야말로 내 생각을 여물게 해 준 스승이었다.
조선조 순조 때 유씨(俞氏) 부인은 품 안에 지녀온 바늘을 부러뜨리고 ‘조침문(弔針文)’으로 그것을 조상했다. ‘미망인’ 유씨가 바늘을 조상하면서 그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았듯 15개월 전에 떠나보낸 책상과 책꽂이를 내가 뒤늦게 불러낸 것은, 새삼스럽지만 지난 삶을 허허로이 돌이켜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2020. 3. . 낮달
* 덧붙이는 글
1년을 훌쩍 넘긴 일을 새삼 되새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미처 살지 못한 삶은 아마도 그것과 함께한 세월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젊음의 시간이란 덧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과 같이한 시간이야말로 내 삶에서 가장 치열한 시기가 아니었을는지. 하여 이 글은 오래되고 익숙한 것과의 작별을 마무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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