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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한 청년의 죽음에 부쳐

by 낮달2018 202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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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에 우리 사회가 답하여야 한다

 

오늘 자 <한겨레> 사회면의 한 기사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제목은 “죽음으로 내려놓은 ‘등록금·취업 짐’”이다. 무슨 기사인지는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등록금 문제와 취업 문제로 고민하던 한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하다는 내용이다.

 

1998년 고려대 정경대에 입학했던 청년은 가난(등록금) 때문에 휴학과 복학, 자퇴를 거듭했다. 2000년 자퇴, 다른 사립대 입학, 자퇴, 고려대 재입학, 휴학과 입대……. 그러다가 그는 결국 2006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전역 후에도 학비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까닭이다.

 

지난해 8월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고시원에 머물던 그는 고시원 월세를 체납한 상태에서 1월 중순께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는 가출 신고 40일 만인 지난 9일 오후에 서울 마포구 서강대교 근처 밤섬 모래사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없었고, 고시원에는 체납을 알리는 쪽지만 남았다던가.

 

그는 가난에 시달리면서 성격도 바뀌었던 모양이다. 고교 때까지는 밝은 성격이었는데, 학교 자퇴 후부터 사람 만나기를 꺼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내 인생, 나,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물신(物神)이 횡행하는 이 축복받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생활고나 금전 문제로 인한 죽음이야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유례없는 불황의 여파로 생존이 위협받는 이들이 나날이 느는 상황임에랴. 그러나 이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 그게 숱한 죽음 중의 하나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사연이야 이 땅에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2009년 벽두에 들려온 이 청년의 죽음은 전혀 예사롭지 않다. 이른바 ‘등록금 1천만 원 시대’에 드러난 두 번째 비보다. 작년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전주의 한 대학에서도 등록금을 비관한 한 대학생이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자, 명백히 상반된 의견들이 다툼을 벌였지만, 여전히 어떤 해결점도 찾지 못한 것 같다. 등록금 상한제나 등록금 후불제를 주장한 시민단체에 맞서 대교협은 ‘대학 경쟁력’ 운운하며 이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지지난해 대선에 공약으로 등장했던 ‘반값 등록금’은 총선을 거치면서 실종되었다.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조차 ‘내가 언제?’라고 되받는 상황이니 ‘반값 등록금’은 거의 물 건너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등록금 이야기를 하니 옆자리의 동료는 서울로 유학 보낸 딸아이의 등록금으로 정확히 1150만원을 썼다고 말했다. 모자라는가 넘는가의 문제일 뿐, '등록금 일천만 원 시대는 이미 현실이다.

 

고금리 학자금…, 대학은 ‘우골탑’도 넘었다

 

작년 하반기의 학자금 대출 금리는 7.8%로 사상 최고였다고 한다. 고금리이다 보니 정부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그러나 대학생 중 약 40%가 학자금 대출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대출을 갚기 위해 다시 대출을 받거나, 사금융을 이용하기도 한다. 학자금 대출 연체자가 3만2천여 명에 달한다는 것은 대학이 ‘우골탑’ 수준을 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올해부터 기초생활 수급자 가정의 대학생 전원에게 무상으로 장학금이 지급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등록금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다.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는 상황이니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국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등록금 문제는 사회적 의제가 아니라 개인이 부담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교육열이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두루 아는 일이다. 교육은 두말할 것 없이 미래에 대한 투자다. 그런데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오늘, 황소 한 마리로도 대학 교육을 보장하지 못한다. 숱한 학생들이 빚을 내가며 학업을 계속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자금 대출금 상환에 목을 매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회문화평론가 하재근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감세 규모(연간 10조~20조 원)라면 ‘청년들의 비명’을 방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무상으로 시키는 데 필요한 돈도 10조에서 20조 원 사이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감세’ 대신 재정을 교육에 투여해야

 

전문가들은 경제를 살린다며 건설 토건에 뿌리려는 재정을 교육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곧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과문하여 이 주장이 얼마만큼 합리적인지는 판단할 능력이 내게 없다. 그러나 ‘지금 사람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부산 피난 시절, 그 어려운 시절에도 노천 천막 아래서 이루어진 것은 교육이고, 그것이 경제 재건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지났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계급과 미래를 결정짓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진 파이를 더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몫인 파이를 찾기 위해서 어렵게 공부하는 청년 학생들의 미래마저 앗아갈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리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제도적 모순을 혁파해야 할 의무는 국가와 우리 사회의 몫이라는 것은 스스로 명백한 일인 것이다.

 

그것은 공부하려고 가난과 힘겹게 싸워왔던 한 청년의 죽음이 지금 우리 사회와 나라에 던지는 근본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정부가 거기 답변해야 할 차례다.

 

 

2009. 3.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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