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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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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보다 ‘교수님’이 더 높다?

by 낮달2018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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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호칭은 무관, ‘선생님’은 동양권 최고의 경칭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상대방의 직위에다 높임의 뜻을 가진 접미사 ‘님’을 붙여서 상대를 높인다. 회사에 가면 ‘사장님’이 있는가 하면 ‘대표님’도 있다. 국회에 가면 ‘의원님’이, 청와대에는 만인지상 ‘대통령님’이 있다. (그러나 이 호칭은 부르기가 좀 불편하다. 권위주의 시대를 겪은 이들은 오히려 ‘각하’가 더 편한 호칭일 수도 있겠다.)

 

‘기자님’, ‘피디(PD)님’ 같은 호칭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이는 ‘기자’나 ‘피디’가 직위가 아닌 ‘직종’이기 때문이다. 직위에다 ‘님’을 붙이는 일반 원칙이 유일하게 적용되지 않는 경우는 초·중·고등학교다. 학교 관리자인 교장·교감을 부를 때에는 ‘님’ 대신 ‘선생님’을 붙이는 게 일반적인 것이다.

 

‘선생’은 동양권에선 최고의 존칭

 

선생(先生)’은 아마 동양권에선 재야의 지식인을 이르는 최고의 존칭이었던 듯하다. 공자, 맹자도 선생이고, 퇴계나 율곡도 선생이다. 선생이란 호칭에는 굳이 ‘님’를 붙이지 않아도 될 만한 고전적 권위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에 간 남쪽의 기자들은 ‘기자 선생’으로 불린다. 북쪽에서도 역시 ‘선생’이란 호칭이 최고의 경의를 담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 점은 연예인들이 까마득한 선배 연예인들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고 일반인도 원로 연예인들을 ‘선생’이라 지칭하여 경의를 표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선생’이라면 단연 ‘김구 선생’이다. 임시정부 수반이었지만 선생은 ‘주석’ 대신 ‘선생’이라 불리는데 이 호칭은 박사로 불린 이승만보다 훨씬 무겁고 깊은 국민적 경의를 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지지자들에게 ‘선생’으로 불리었다. 정치적 맞수였지만 김영삼은 ‘선생’과 거리가 멀었다.

 

‘선생’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인물은 어떤 형식으로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박경리, 리영희, 신영복……. 이 호칭에는 이들이 다른 공식적 직함을 갖지 않았던 것 말고도 자신의 일관된 삶에 바치는 대중들의 경의가 담겨 있는 것이다.

 

초중고에서 굳이 직위 뒤에 ‘선생’을 붙이고, 대체로 ‘선생’이 세속적 지위를 뛰어넘는 정신적 권위를 갖는 호칭이라는 사실은 대학에 가면 좀 달라진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선생님’일 수도 ‘교수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줄곧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교수를 불렀다. 그게 당연한 호칭인 줄 알았고, 거기 담긴 경의는 ‘교수님’이란 호칭에 견주어 다르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수’란 직위에 ‘님’을 붙이는 형식으로 치면 초중등학교 교사도 ‘교사님’이라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초중고와 대학의 ‘차이’라면 할 말이 없다.

 

순전히 자신의 경험이고 느낌일 뿐이다. 그걸 가지고 무슨 설문조사를 해서 통계를 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로 대학교수들의 호칭에 대한 반응은 세 부류쯤으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호칭 따위에 무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수’를 선호하는 사람, ‘선생’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는 사람 정도로 말이다.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대학으로 온 사람들은 대체로 ‘교수’라는 직위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에게도 나는 서슴없이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는 못하는 기색이었다.

 

‘교수’가 선생보다 존귀하다?

 

이런 이들에게 대학은 초-중-고라는 급별 교육기관의 최고 과정이고, 이들은 당연히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신은 초중등학교의 교사들과는 다른 호칭으로 불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은 다르고, 중고는 같은 중등과정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초등 교사보다 증등교사가, 중학교 교사보다는 고교 교사가 위계가 높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고교교사인 아버지에게 자기 담임 선생님을 혼내달라고 말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처럼.

 

물론 사회적 지위로서 초중등 교사와 교수는 다르다. 봉급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대우나 존경도도 감히 다툴 수 없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친다는 본질에 있어서 둘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선생’이란 호칭이 초중고나 대학에서 공통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도 마땅한 호칭으로 부르기 무엇한 이들을 선생이라 부른다.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후배도, 한 문화 관련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도, 농민회장을 지낸 원로 운동가도 내겐 선생이다.

 

병원의 진단의학과장인 의사를 내가 ‘과장’이라 부를 일은 없다. 나는 그의 직위와 무관한, 서로를 존중하는 정도의 선후배 관계이기 때문이다. 문화 단체의 실무자도 ‘사무국장’ 대신 나는 ‘선생’이라 부른다. 이 경우도 선생이란 호칭은 그에 대한 존중의 뜻이 담겼다.

▲ <시사매거진 2580>의 '공포의 집합'의 한 장면 ⓒ MBC 화면 갈무리

대학교수들 가운데는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게 아주 못마땅한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어떤 대학의 학생들의 폭력을 다룬 문화방송(MBC) ‘시사매거진 2580’의 ‘공포의 집합’ 편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후배들을 두들겨 패면서 지엄한 선배들은 말한다.

 

“야! 교수님이 시키면 토 달지 말고 그냥 해!”
“(교수님에게) 선생님이라고 한 새끼 나와 봐!”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책임은 학생들에게만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건(폭력) 우리 대학의 전통’이라고 말하는 교수들도 있다. 이들은 학생들의 폭력으로 유지되는 선후배 사이의 위계와 질서가 자신의 권위로 이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폭력과 공포를 통해 세워지는 질서와 권위의 체계는 제도로 존재한다. 교수는 그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있는 사람이다. 대학교수들이 조교나 대학원생들에게 무소불위의 존재로 군림하는 것도 그들이 가진 권력 때문이다.

 

그런데 첫머리에 든 학생들의 말을 새겨보면 꽤 재미있다. 첫 번째 말 속에 들어있는 전제는 ‘교수님이 시키는 데 토를 단 학생이 있다’이고, 두 번째 말의 그것은 ‘교수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정보는 ‘교수님’에게서 나온 게 확실하다.

 

‘권위호칭무관하다

학생들은 ‘교수님’으로부터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너희들이 알아서 이를 바로 잡으라’는 언질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확한 것은 자신들을 ‘선생’이라 부르는 시건방진 놈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언질을 받은 선배들의 ‘군기 잡기’를 통해 그 ‘시건방’은 교정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선배를 부추긴 교수에게 그렇게 해서 유지할 만한 ‘교수의 권위’란 게 있기나 할까 싶다. 권위는 왕왕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 권력으로 오인된다. 그러나 권위란 공포나 폭력, 불이익의 위험,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신념 따위로 지켜지는 게 아니다.

 

하긴 자신을 ‘부장’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덜떨어진 초중등학교의 보직 교사들도 있으니 ‘교수’ 호칭에 집착하는 대학교수들을 나무랄 일만도 아닐지 모르겠다. 초중등과 대학으로 갈리긴 하지만 이들은 그런 호칭을 통해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사이좋게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앞에 든 경우와는 무관하게 나는 지금껏, ‘선생’이라 불리며 살아왔다. 물론 이는 내가 존경 받을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직업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내가 ‘선생’이란 호칭으로 불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과분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2011. 5.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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