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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미성년 소년 소녀도 강제동원했다

by 낮달2018 2020. 1. 31.

[서평] 정혜경 지음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  정혜경 지음, 섬앤섬, 2019, 20000원  ⓒ 섬앤섬

우리 대법원이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은 2018년 10월 30일이었다. 그로써 해방 직후부터 피해 보상을 요구해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가 무려 73년 만에 사법부의 판결로 확정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권리 73년에 판결로 확정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00년과 2005년에 각각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1심과 항소심은 원고들의 패소로 끝났다. 어이없게도 한국법원이 한일협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한 피고인 일본기업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2012년 5월 24일,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등의 대법원판결로 파기환송 되었다. 2013년 서울고법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가 승소하였으나, 이 재판은 ‘사법농단’으로 5년이 넘도록 대법원에 계류되다가 2018년 10월 30일과 11월 29일 최종 승소 판결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대법원판결 이후 이들의 태도는 ‘1원도 낼 수 없다’는 데서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원고 측이 이들의 국내 자산을 압류하고 현금화하는 절차를 진행하자, 대법원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 강변해 온 일본 정부는 보복성 ‘수출규제’를 시작했고, 이에 맞선 우리의 민간 주도 ‘노 재팬'(No Japan) 운동’이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정혜경이 쓴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초판 1쇄가 나온 건 2019년 8월 15일이지만, 이 책은 대법원판결에 반발하는 일본 정부를 곧바로 겨냥한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정부 기관인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아래 위원회)에서 11년간 조사과장으로 일하며 저자는 다양한 십 대 소년·소녀 강제동원 피해자 사례를 주목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느 날, 일본에서 발표할 논문을 작성하려고 통계를 확인하다가 놀라서 한동안 먹먹한 적이 있었다. 위원회가 강제동원피해자로 판정한 218,639건 가운데 최저연령 사망자가 만 아홉 살 소녀였기 때문이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미쓰이(三井) 광산(주) 소속 신비바이(新美唄) 광업소에서 일했다. 믿을 수 없었다. 실제로 아홉 살 소녀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는 아동의 출생신고를 뒤늦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확인이 어려웠다.

그다음으로 어린 사망자는 열한 살 소녀였다. 이번에는 호적 나이가 아니라 가족에게 확인한 실제 연령이었다. 1933년생으로 1945년 6월,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주) 부산공장에서 사망한 소녀. 기숙사 사감이 병원의 사망 증명서를 근거로 사망신고를 했다. 열 살에 노무자가 된 소녀였다. 사망원인을 알아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 프롤로그,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중에서

 

전문 연구자가 발견한 십 대 소년·소녀 강제동원 피해자 사례

 

▲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도착한 조선 소녀들. ⓒ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수록 사진

저자는 “이들을 세상이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 “일본이 저지른 아시아 태평양전쟁이 조선의 어린이가 동원된 전쟁이기도 했다는 점을 독자들과 나누려”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이들의 경험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세상이 알고 누군가가 기억해 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물론 그것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강제동원의 대상으로 어린이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과 상상 저편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섯 개의 주제로 강제동원된 아이들 이야기를 담았다. 남양 섬(천국의 섬으로 떠난 아이들), 군수공장(군수공장의 아이들), 소녀 강제동원(특공 정신으로 응모하라), 탄광(나이는 어려도 엄연한 소년 채탄부), 공사 현장(공사판의 어린아이들), 형무소로 간 아이들(징용을 거부한 아이들) 이야기 등인데 어떤 주제도 무심하게 읽어내기 어렵다.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실행한 인적, 물적 동원 및 자금 통제를 말한다. 전면적인 강제동원은 중일전쟁(1937년) 이후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 1938년 4월 1일 제정)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 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등 모든 지배 지역의 사람과 물자, 자금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한 전시 통제 기본법이다. 다음 해인 1939년 7월에는 ‘국민징용령’을 공포했고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할 계획도 세운다. 모법(母法)인 ‘국가총동원법’ 아래 ‘국민징용령’ 등 각종 통제 법령을 제정, 시행하였다.
‘강제동원’이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누리집

 

개인이 일제의 식민지배 양상 전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한 이해는 그 전체 양상의 일부에 그치기 때문이다. 강제동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개별화, 파편화된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우리는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징용과 징병, 정신대 등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정도로만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일제는 훨씬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 정책을 제도화하여 시행했다.

 

강제동원된 어린이들, ILO에서 제한한 ‘미성년 노동’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강제동원된 것은 실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제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전시체제기에 접어들자마자 같은 해 5월 12일 자로 공포한 광부노무부조규칙에서 ‘14세 이상 남자’가 갱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 도쿄아사이토 여자근로정신대 홍보기사. <매일신보> 1944년 3월 16일 자. 

당시 일본은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해 있었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ILO 협약을 비준했다. 일본이 비준한 협약 가운데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미성년 노동 제한 규정은 1937년에 15세 미만이었고, 그 뒤 노동 제한 나이는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일제의 1941년 근로보국대 동원 나이와 1941년 노무조정령, 1944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규정에서도 노동 제한 나이를 만 14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이 규정은 낮아져서 1945년 4월에 마련한 국민근로동원령 시행규칙은 남녀 12세 이상이었다.

 

1941년 4월 19일 조선총독부가 공표한 ‘광부노무부조규칙 특례 규정’은 ‘여자 광부 갱내 취업 허가제’를 가능하게 했다. 마침내 일제는 여자들도 갱 안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16세 이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어린 열 살 소녀도 채탄부가 되어야 했다.

 

일본 연구자조차 이를 믿을 수 없다며 당혹해한다. 미성년 노동은 국제 기준에 어긋난다. 일본이 공장법이 있어서 어린애들은 동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장법은 1911년에 제정해 1916년에 시행했으나 조선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1923년 개정한 공장법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 금지조항이 들어 있었다. 일본은 자국에서 이를 지킨 대신 식민지 조선의 소녀들은 거기서 제외한 것이다.

 

‘거룩한 황국 여성의 손’이라고 미화한, 1944년 8월에 일본 정부가 칙령 제519호로 공포한 여자정신근로령의 동원대상은 12세 이상~40세 미만의 미혼여성이었다. 대상이 아니더라도 지원은 가능하도록 했는데 실제 위원회에서 피해자로 판정한 이들 중에는 채 열두 살이 못 되는 10~11세 어린이도 14명이나 있었다.

 

▲ <매일신보>(1944.8.16.) 3면 기사. 사흘 전 공포한 여자정신근로령은 동원대상을 12세 이상~40미만의 미혼여성으로 규정했다. 

아이들은 강제로, 공부도 시켜주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감언이설로 속여서, 또 집안 식구를 대신해서 관리나 모집책을 따라나서야 했다. 그러나 ‘천국의 섬’이라던 남양의 섬에서 아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가 되어야 했고, 군사비행장에서 활주로를 닦아야 했다.

 

항공병에 가는 대신 소년들은 비행기 공장에 갔고, 소녀들은 군수공장에 끌려가 보리와 콩깻묵을 썩은 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12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돈 모을 생각에 기운을 내고 나날이 심해지는 폭격을 피해가며 일했으나 전쟁이 끝났을 때 임금은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에서 일하던 학도근로대 소녀들은 피폭되어 죽거나 피폭자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광범한 청소년 강제동원, 가혹한 폭력

 

강제동원은 국내에서도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일제 말, 조선에서 가동한 방적 공장은 137곳이었는데, 일본의 3대 방적 회사는 물론 군소 기업까지 특혜를 받으려 조선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들 공장에 끌려간 소녀들은 기를 쓰고 탈출에 나섰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고,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였다.

 

탈출하다 잡힌 소녀들에겐 가혹한 폭력이 가해졌다. 발가벗겨 기숙사 방방에 데리고 다니며 망신을 주고, 감독들이 집단 성폭행한 뒤 공창에 팔아넘기는 사례도 있었다. 그래도 탈출 행렬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강경애의 장편 노동 소설 ‘인간 문제’에서도 드러나듯, 방적 공장이 어린 소녀들에겐 지옥과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 항공기 제조공장에 동원된 학도근로대의 조선인 소녀들. ⓒ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수록 사진

2017년 개봉한 영화 <군함도>를 둘러싸고 일본 우익 매체가 ‘거짓 날조’를 주장하고, <반일 종족주의>의 이영훈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하시마 탄광에 동원된 소년 탄부 최장섭이라는 실존 인물의 증언으로 이 사실은 입증되었다.

 

열다섯 살에 후쿠오카의 미쓰비시광업 가미야마다(上山田) 탄광에 동원되었던 이상업의 수기에 따르면 전남에서 이 탄광에 갔던 소년 징용부대는 50명이었다. 모두 갱에서 채탄부로 일했는데, 한 소년은 숙련 광부(사키야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곡괭이 자루에 맞아 숨졌다. 또 한 소년은 독감을 앓으며 먹은 약 기운에 취해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사키야마에게 명치 끝을 채여 갱 안 바위에 부딪혀 즉사했다.

 

이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희생이다. 치미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운데, 끝내는 먹먹한 슬픔이 목까지 차오르곤 했다. 367쪽짜리 책을 읽는 데 보름이 넘게 걸린 것은 그래서다.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진 아이들이 무차별 폭력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이야기를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기간에 조선 인민들이 당한 고통, 그중에서도 사회의 최약자층인 미성년자들의 피해 사례와 증언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한 맺힌 호소이자 피 맺힌 절규”라고 한 출판사 책 소개에 머리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분노와 슬픔을 삭여 가며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읽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강제동원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고, 상처 입은 모든 소녀 소녀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뒷사람들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다. 역사의 갈피에서 잊힌 희생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상처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성찰의 과정이 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2020. 1. 31. 낮달

 

 

 

분노가 목까지 차오르는 책, 그래도 읽어야 합니다

[서평] 정혜경 지음 <아시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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