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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소설과 삶 - 작가 ‘공선옥’ 읽기

by 낮달2018 202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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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공선옥,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넉넉하고 거짓 없는 시선

▲ 내 서가의 공선옥 작품집

작가 공선옥에 관한 글을 한 편 쓰겠다고 결심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마 소설집 <명랑한 밤길)(2007, 창비)을 읽고 나서였던 것 같은데 차일피일하다 보니 4년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내 서가에는 그이의 책이 일곱 권으로 늘었다.

 

공선옥 소설의 ‘전율’

▲  작가 공선옥 (1963 ∼  ). 2008 년, 구미.

작가 공선옥을 처음 만난 건 그의 작품집 <멋진 한세상>(2002, 창작과비평)에서였다. 그 책을 산 게 2003년 12월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의 속지에다 ‘너무 늦었다’라고 썼다. 이런 좋은 작가를 왜 이제야 만났는가 하는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넉넉하고 거짓 없는 시선이 좋았다. 삶을 미시적으로 바라보되 그 본질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세련된 기법에 그치고 마는 작가들에 비기면 그녀의 소설에는 굳건한 ‘리얼리즘’이 있고, 거기 그려진 삶과 세상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렇고 그런 삶의 장면을 두고 이런저런 헤살을 짓는 듯한 여느 여성 작가들의 그것과 아주 다른 건강하고 듬직한 무엇인 것이다.

 

그의 소설집 <멋진 한세상>과 <명랑한 밤길>, 연작소설집 <유랑가족>을 읽으면서 느꼈던 전율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작품집을 꾸준히 사 모은 것은 결국 그에게서 느낀 전율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의 소설을 읽고 책을 사는 것은 마치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처럼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미덕은 문학평론가 양진오의 해설(<멋진 한세상>)로도 충분할 듯하다. 양진오는 공선옥 문학에서 ‘여성성’과 함께 ‘가난’을 중요한 축으로 지적한다. 이 가난은 ‘부부 사이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동시대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문학의 사회성’과 이어지는 ‘사회적 리얼리티’로서의 가난이다.

 

“공선옥의 문학은 세련되고 장식된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세련의 포즈와 인위적인 기교의 문학이 우세한 현시점에서 공선옥의 문학은 진짜배기 문학의 당당함을 증거하고 있다. 그 당당함은 오로지 삶과 맞장 뜨는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함이며 솔직과 정직의 태도로 작품을 쓰려는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함이다.”

   - 양진오 해설 ‘억척 어미의 여성성, 가난과 마주하는 문학’ 중에서

 

공선옥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성과 관련, 문학평론가 이상경이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현실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외로움과 가난함이 나의 힘이라고 무심한 듯 능청스럽게 말하는 공선옥에게서 나는 일제 시대 하층 여성의 대변자로서 한 시대의 인간 문제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던 작가 강경애’(<멋진 한세상> 표지)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자운영 꽃밭에서 흘린 눈물

 

지난 5월 말에는 나는 다시 그의 장편소설 <꽃 같은 시절>과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샀다. 늘 그렇듯 나는 쉬엄쉬엄 산문집부터 읽었다. 다분히 감성적인 제목과 달리 산문집은 공선옥이 기왕에 보여준 문학의 원형으로서의 시골과 거기서 사는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잘 드러내 주는 글로 가득했다.

 

나는 작가가 쓴 산문집을 좀 삐딱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글쎄, 그럴 수 있다고, 원래 작가라는 이들은 할 말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미루어 짐작하기는 한다. 그래도 굳이 작품이 아닌, 한갓진 잡문(!)으로 주절댈 만큼 긴요한 이야기라면 작품으로 말하는 편이 옳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2008년 초판 10쇄, 창비

그러나 나는 이윤기의 <무지개와 프리즘>을, 김정란의 <거품 아래로 깊이>를, 그리고 이번에 또 공선옥의 산문집을 샀다. 결국, 내 독서목록은 앞서 말한 내 삐딱한 시선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윤기와 김정란의 산문집을 산 것은 그들이 보여준 어떤 영역에서의 분명하고 명쾌한 입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공선옥의 산문집을 장바구니에 넣은 것은 그의 삶, 그 민얼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의 소설에서 드문드문 드러나는 만만찮은 장면들에서 나는 그의 삶을 일부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소설이 상상력과 허구의 조합이라 하더라도 그가 교직해내는 삶의 편린들 속에 나는 그녀가 일찍이 감내해야 했던 고단한 삶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는 2000년 6월에 초판이 나왔다. 나는 이제야 그걸 읽게 되었지만 이미 11년 전에 나온 구간인 것이다. 내가 산 책은 2008년에 나온 초판 10쇄다. 그래도 8년 동안 독자들은 꾸준히 이 책을 읽어온 모양이다.

 

나는 아주 차분하게 이 책을 마저 읽었다. 텔레비전이나 화장실 선반 위에 얹어두고 손이 가면 읽고 또 며칠쯤은 까맣게 잊기도 하면서. 10년도 전의 글인데 작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는 이야기도 아니다.

 

책의 1부는 작가의 고향인 전남 곡성의 한 농가에서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푸른 것들에의 꿈’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시골에서의 삶을 통해 어머니로서, 주민으로서 그녀는 시골 사람들의 인정과 공동체, 그리고 느림과 불편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시선 아래서 ‘모든 꽃은 열매가 된다.’

 

“강가의 자운영 꽃밭에 몸을 던져놓고 노래 불러봅니다. 즐거이 노래 부를수록 왜 마음은 하염없이 슬퍼지고 눈물이 샘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운영 꽃밭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요?

……아이들에게 눈물 보이는 게 쑥스러워 꽃 무더기 속에 얼굴을 묻어버렸습니다. 나 죽어 없어지면, 그때 우리 아이들도 자운영 꽃밭에 얼굴을 묻고 제 아이들 몰래 울까 모르겠습니다. 제 엄마 자운영 꽃밭에 얼굴 묻고 울던 때가 생각나 그렇게 울까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제 어미와 함께 놀았던 섬진강 가에서의 한때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 그렇게 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운영 꽃밭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아름답고 그리고 너무 슬프군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오월 들녘으로 나가보세요. 거기 불붙는 슬픔이 당신의 가슴을 흔들어놓을 테니까요. 슬픔은 때로 저 자운영 꽃밭처럼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 모양입니다그려.

    -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중에서

 

왜 자운영 꽃밭에서 울었냐고 물을 일은 없겠다. 그것은 한갓진 감상이 아니라, 삶이 가진 그 무심한 얼개와 거기 담긴 순환에 대한 깨달음일 터이니. 무릇 모든 어버이라면 자운영 꽃밭에서 그이가 흘린 눈물에 고개를 끄덕일 터이니. 그이가 느꼈던 슬픔에 고즈넉하게 젖을 터이니 말이다.

 

2부 ‘어린 사랑’은 ‘모성’ 또는 ‘꼬물꼬물한 어린 것들에 대한 사랑’의 노래다. 시골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겪는 어머니의 따뜻한 시선 아래 드러나는 아이들의 성장은 아름답다. 그리고 거기서 자각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모성은 ‘자운영 꽃밭’에서 흘리는 눈물로 태어나기도 한다.

 

소설은 그의 무심한 ‘삶의 일부’

 

이혼 후 세 아이를 데리고 이른바 ‘모자가정’을 꾸린 이래 겪는 고단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여성 작가와 모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에 대한 사랑, 어린 생명을 품고 기르는 모성을 가진 여성 작가에게 다가오는 연대는 ‘작고 여린 것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의 시대여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3부 ‘세상의 따순 것’에는 작가의 유년기 추억, 아름다운 기억과 풍경들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들, 80년대와 광주, 그 고통과 열정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1985년 여름, 그는 시골 직행버스의 안내원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간 친구들과 달리 그는 거기서 벌어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동생을 학교에 보내고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던 가장이었다. 그가 소설에서 다루는 가난이, 가난한 사람의 삶이 결코 한갓진 허구가 아니라 몸에 살갑게 감겨 있는 이유일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거듭 확인한다. 그의 문학이 그의 삶의 아주 무심한 일부라는 것을. 그는 가장 정직하게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을. 그가 그리고 있는 삶의 어떤 부분이 이 시대의 가장 아픈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좋은 작가’라는 것도.

 

 

2011. 6.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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