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보신탕집 떠나는 똥만이 마음은 어땠을까

by 낮달2018 2019. 12. 20.
728x90

[서평] 박상규 기자의 자전적 청소년 소설 <똥만이>

▲ 박상규, <똥만이>(2014, 웃는돌고래 )

어린이를 위한 시와 이야기를 각각 ‘아이 동(童)’자를 써서 동시, 동화라고 부르고 이를 ‘아동문학’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매우 고전적인 분류법이다. 문학의 예상 독자를 어른과 아이로 대별할 때 구획하는 전통적 범주의 분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은 한갓진 문학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형식으로 변화해 왔고,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써 문학의 성격과 형식도 훨씬 다양해졌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독자를 어린이로만 한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동화 가운데에는 어른들이 읽어도 무방한 작품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황선미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2000)은 지금까지 150만 부가 넘게 팔려 ‘100쇄’를 기록한 작품이다. 올해에는 영문판 출간 한 달 만에 영국 대형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랐는데 영국에서 이 작품은 동화가 아닌 일반 소설로 분류되어 팔리고 있다고 한다.

 

아동을 보통 미취학 어린이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로 한정하면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끼인 중고등 학생에게도 그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세계를 다룬 문학이 있음 직하다. 그렇다면 흔히 ‘청소년 문학’이라 부르는 영역은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과도기’의 문학인 셈이다.

 

아동문학과 청소년 문학의 경계

 

사춘기,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대’를 관통하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는 청소년 문학은 그 시기적 특수성 덕분에 아동들의 ‘순진무구’에 못지않은 이야깃거리를 갖추고 있다. 1960, 70년대 이후 널리 읽혔던 조흔파의 <얄개전>(1955)이나 권정생의 <몽실언니>(1984) 등이 그것인데 당시에는 이런 작품들을 ‘소년소설’이라 불렀다.

 

청소년 문학은 2000년대 이후 김려령의 장편소설 <완득이>(2008)가 나오면서 대중과 더 가까워졌다.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른 독자들도 매료시킨 이 성장소설에는 우리 사회의 변동을 잘 녹여내 청소년 이야기로만 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아동문학과 청소년 문학은 그 시기적 구획에 따른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일반 문학과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는 추세가 되어가고 있는 듯싶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J. M. 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작품을 굳이 청소년 문학으로 한정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 있을 것이다.

 

허두가 길어진 것은 박상규 작가의 소설 <똥만이> 때문이다. 소설은 주인공 ‘동만이’의 초등학교 입학 전후를 다루고 있으니 동만이는 ‘어린이’지 ‘청소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청소년’이란 청소년기본법에선 9세부터지만 통상 만 13세에서 만 18세 사이의 중고생을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기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회성을 상실하고 비좁은 일상’만을 다루는 게 문제지, 주인공이 어린이냐, 청소년이냐는 아니니 말이다. 책을 내고서 ‘청소년 소설을 한 편 썼다’는 작가의 발언도 결국 같은 의미일 것이다.

 

박상규 작가의 인터넷 이름(닉네임)은 ‘개천마리’다. 나는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 이름을 처음엔 시내를 뜻하는 ‘개천’과 연관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게 ‘개 천 마리’라는 뜻이란 걸 알게 되면서 그가 쓴 수상집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를 읽었다. 블로그에 그 책의 서평을 쓰면서 나는 기꺼이 그의 독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관련 글 : 개천마리그 사나이의 삶과 진실]

▲ 동만이의 여동생 ‘동미’. 동만이가 살린 개로 열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 장경혜

소설 <똥만이>를 펴면서 나는 이 소설이 그의 유년 시절을 고스란히 복기하고 있는 이야기란 걸 알았다. 작가의 담담한 서술로 펼쳐지는 동만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은 전작을 통해 그의 유년을 일찌감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서평에서 일렀듯 부모의 이혼으로 빚어진 그의 가족사가 여느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 할 아주 특수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모친과 헤어져 부친과 단둘이 쓸쓸히 살아야 했던 그의 유년 시절이 누구나 겪곤 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심상한 눈길은 <똥만이>에서 담담하게 되풀이된다.

 

동만이는 외로운 아이다. 그러나 작가의 심상한 시선과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는 마치 외로움 따위는 진작 졸업한 어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착시다. 그건 아마 그 유년의 고독을 뒤늦은 회상을 통해서 넘어서고자 했던 작가가 지닌 잠재의식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배경은 동만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한 두어 해. 소설은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의 보신탕집 ‘오작교’에 남겨진 동만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씨줄, 가끔씩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만남을 날줄로 한, 외로운 소년의 성장기다.

 

‘개천마리’ 박상규의 유년과 ‘똥만이’

 

술 잘 마시고 노름을 좋아해 어린 아들을 따돌리고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를 둔 아들은 때로 아비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을 떠나버린 엄마, 그래서 홀로 남겨져 어린 아들을 보살펴야 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욕망과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동만이가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은 아버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동만이는 새엄마가 된 고씨 아줌마를 ‘엄마’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그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버지와의 불화 끝에 오작교를 떠나려는 그녀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다, 끝내 그녀를 보내고 울음을 터뜨리는 동만이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자신뿐 아니라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조숙한 아이기도 하다.

 

동만이는 ‘오작교’와 엄마가 사는 ‘창신여인숙’을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단 하루지만 아버지 대신 자신을 챙겨 준 뻥튀기 아저씨와, 엄마 대신 아버지를 도왔던 새엄마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마치 엄마의 가족 같았던 남영이 누나, 소영이 누나를 통해서 동만은 외로움은 나누며 이긴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들은 동만이와 그의 엄마 아빠처럼 무엇인가가 모자란 이들이다. 뻥튀기 아저씨도, 새엄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남영이 누나,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술에 취해서 자신을 때리던 아버지를 떠나온 소영이 누나도 결핍의 아픔을 이웃과 나누며 넘는 이들이다.

 

“사람은 외롭기 때문에 친구도 사귀고, 다른 사람을 가슴에 간직하는 거야. 외롭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친구를 사귈 수 없어. 사랑도 못 하고.”

 

“외롭고 슬픈 일이 많아서 나중에 좋은 사람 되겠다”는 말에 왜 그러냐고 반문하는 동만이에게 들려준 남영이 누나의 말이다. ‘다리 병신’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을 떠나 도회로 온 이 착한 처녀는 세상과 삶에 부대끼면서 그 외로움을 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동만이가 엄마의 새집 대신, 아버지의 오작교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 이웃으로부터 ‘외로움’을 어떻게 넘는가를 배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엄마와 남영이 누나 등과의 ‘외롭지 않은 삶’ 대신 동만에게는 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삶’이 밟혔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내가 없어도 남영이 누나랑 소영이 누나가 엄마를 잘 지켜 줄 거 같아. 근데 아버지는 지켜줄 사람이 없어. 나뿐이야. 술도 많이 마시니까 누가 옆에 있어야지. 술 취해 비틀거리다 계곡에라도 떨어지면 어떡해. 화투 치고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엄청 쓸쓸하잖아.”

▲ 아버지가 오작교를 세우고 가족 사진을 찍던 때가 동만이에겐 행복했던 시절.

나는 <똥만이>를 수능시험을 치른 이후, 널브러져 버린 고3 아이들 교실에서 읽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두엇씩 모여서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 책을 읽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소년의 유년에 푹 빠져들고는 했다.

 

가끔 책을 덮고, 눈발이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느닷없이 북받쳐오는 설움에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는 젖어 드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잠깐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어야 했다. 무심한 척, 슬퍼도 내색하지 않는 꼬마 동만이의 모습에서 우리의 성장기는 어떤 부분에서 겹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일찍이 전작을 통해 짐작했던 작가의 아프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무심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이다.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를 떠올리고 그 시절의 장면을 복기하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담백하다. 그리고 그런 심상한 태도 너머에 담긴 진정성은 한 소년의 성장기를 넘어 독자들의 원형적 체험의 어떤 부분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고 있다.

 

동만이가 이웃과 함께 넘은 ‘외로움의 언덕’

 

책 뒤에 붙인 ‘작가의 말’은 ‘남영이 누나, 소영이 누나, 뻥튀기 아저씨, 그리고 새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다. ‘사는 건, 무수히 언덕을 넘는 일’이라며 작가는 ‘때로는 혼자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언덕’도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어 여기까지 왔다’라고 술회한다.

 

그렇다. 삶을, 세상을 혼자서 넘는 독불장군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소설 <똥만이>를 통해서 더러는 남루한 삶이 빛나는 것은 그 언덕을 함께 넘어 준 이웃들로 인해서라는 걸 확인한다. 그들과 나누었던 슬픔과 아픔, 외로움과 쓸쓸함이 우리를 더욱 여물게 해 주었다는 걸 거듭 깨우치면서 나는 오작교를 떠나는 ‘똥만이’를 마음으로 배웅할 수 있었다.

 

 

2014. 12. 13. 낮달

 

보신탕집 떠나는 똥만이 마음은 어땠을까

[서평] 박상규 기자의 자전적 청소년 소설 <똥만이>

www.ohmynews.com

 

 

 

똥만이

박상규 작가는 인터넷에서 ‘개천마리’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신탕집 아들로 산 덕분에 고등학생 때는 개고기를 도시락으로 싸 다녔다는 작가는 지금까지 개를 천 마리쯤은 먹은

www.aladi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