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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그 어머니의……, 영화 <그을린 사랑>

by 낮달2018 2018.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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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원제 Incendies)(2010)

▲ 어머니 나왈은 자신이 기독교도라 밝히고 학살에서 살아남는다.

 

어제 오후에 영화 <그을린 사랑>(원제 Incendies)을 보았다. ‘예술영화 대박 낸 힘이라는 <한겨레> 기사를 보고 아니, 그럼하고 찾아보니 영화는 지역의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에서 일주일 전부터 상영하고 있었다.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쉬고 있던 아내를 채근하여 우리는 서둘러 영화관으로 갔다.

 

144석 극장에서 다섯 명이 본 예술영화

 

<한겨레> 기사는 이 130분짜리 영화가 17일 오전까지 관객 48천여 명을 모았다고 전한다. 예술영화의 흥행기준이라는 ‘1만 관객을 벌써 4배나 넘긴 것이다. 독립·예술영화 중심 상영관에서만 틀던 CGV가 관객의 반응이 좋자 일반 상영관 4(서울 목동, 일산, 대전, 대구)를 더 확보하는 이례적 결정을 한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가진 이라는 거다.

 

▲ 안동의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극장

영화 누리집에 게시된 개봉관은 27개다. 27개 가운데 안동 중앙시네마가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서둘러 상영시간을 확인하고 아내를 채근해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그랬다.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곳은 대구·경북에선 대구와 안동밖에 없어. 굳이 대구로 가지 않아도 되니 안동사람들은 복 받은 거지.

 

 안동 중앙시네마에선 상영시간표나 상영 영화에 굳이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관련 글 : “사장님, 이거 말고 딴 영화 틀어주세요”) 예술영화 전용관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여기서도 매일 여러 편의 영화가 교차 상영된다. 그러나 필요하면 상영시간표에 얽매이지 않고 순서를 바꾸어서 관람하는 게 가능하다. 가뭄에 콩 나듯 드는 소수의 관람객에게 맞춤형 영화를 틀어주는 것은 전적으로 영화관 여사장 김영희 대표의 재량이다.

 

 3층의 중앙시네마에 도착했을 때, 김영희 대표는 카운터 바깥에 나와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는 바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관객은 우리 둘뿐이었다. 그게 좀 민망할 법도 했지만 우리는 굳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으니 캄캄한 극장 안에 있는 고여 있던 뜨듯한 공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팸플릿으로 부채를 만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아내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순간 이 묵은 영화관의 냉방이 매우 부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 잔뜩 사로잡혔다.

 

 나는 휴게실로 나가 여벌의 영화소개 리플릿을 여러 장 가져왔다. 그걸로 여차할 경우, 더위를 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 내외는 그걸 기우로 넘겨 버릴 수 있었다. 김 대표의 말대로 중간쯤에 앉았는데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이내 실내를 매우 쾌적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둘이서 영화를 관람하게 될 판이라고 여겼는데 뜻밖의 관객이 우리들의 단독관람을 방해(?)했다. 하얀 베일을 쓴 수녀 한 분이 들어와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느라 헤맸던 것이다. 한 이십 분쯤 지나서 또 두 명의 관객이 합류했는데 그 중 한 분도 수녀였다. 나는 은근히 안도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관객의 호응이 남다르다는 영화를 둘이서만 쓸쓸히 본다는 것은 그리 개운한 일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영화 누리집에 걸려 있는 상영관 안내
▲ 르왈은 그 자신은 기독교인이면서 난민편에 서서 기독교민병대 지도자를 사살한다.
▲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는 딸의 여정은 점점 더 충격적인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 등장인물들. 왼쪽부터 주인공 나왈, 딸 잔느, 아들 시몬, 변호사 르벨, 아부 타렉

144석짜리 극장, 다섯뿐인 관객은 숨을 죽이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디지털 필름이어선지 화면도 음향도 괜찮았다. 복합상영관의 고막을 찢을 듯한 음향을 꺼리는 아내에겐 그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중동 지역의 배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깐 후회했다. 서둘러 영화를 보러 왔지만 정작 영화에 대한 정보가 그게 다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앞뒤의 관객들도 그랬다. 나는 약간 멍한 채로 엔드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아내와 나는 웃을 듯 말 듯한 미소를 나누며 극장을 나왔다. 뒤늦게 관람료를 내느라 김 대표와 나눈 일상적 대화가 없었다면 우리의 침묵은 더 길어졌으리라.

 

극장을 나와 주차장으로 갈 동안 아내와 나는 약속한 듯이 말을 아꼈다. 주인공들의 여정을 따라 드러난 진실과 그것이 주는 충격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은 것이다. 아내는, 너무 가슴이 아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한 어머니가 쌍둥이 남매에게 유언을 남기고 숨진다. 유언은 죽은 줄 알았던 생부와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된 형제를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하라는 것. 또 편지를 전할 때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담겼다. 어머니의 삶의 흔적을 따라 딸은 중동의 어느 나라로 떠난다.

 

영화의 전편에서 드러나는 배경인 중동의 황량한 풍경이 주는 삭막함과 낯섦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관객은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중동의 종교 내전 가운데서 벌어지는 학살과 보복을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는 딸의 여정이 점점 더 충격적인 진실을 직면하게 될 때도 관객들의 아픔이 객관성을 잃지 않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진실충격의 어긋난 조합은 당연히 신파적 상상력으로 이어질 우려가 다분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알몸을 드러낸 진실은 형식적으로는 극단적형태 신파로 이해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진실이 던지는 실존적 질문 앞에서 더 이상 신파적 상상력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던져진 ‘실존적 물음’

 

 일체의 가식과 외피를 벗고 알몸을 드러낸 진실과 그 사실성을 받아들이는 데 낯선 중동 지역의 종교와 민족 갈등 따위에 대한 이해는 무관하다. 그래서 그것은 그때 거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로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감동은 관객 스스로가 어머니 나왈 부르완이 되고, 그녀의 상처와 고통을 내화하며 인간 일반의 문제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찾는 여정의 끝에 이들 남매가 만나는 참혹한 진실 앞에서 영화는 답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과거와 현재를 일별하며 유언장을 통해서 어머니가 내린 결론은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고’, ‘함께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관객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그 답을 쉬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망연자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오래 영화의 여운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혹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의 삶 앞에 던져진 화두다.

 

어머니는 자신을 기도문 없이 알몸으로묻어달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도록 머리를 아래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아들의 어머니로서 오누이의 어머니로서 나왈 부르완이 자신의 답에 대한 세상의 양해를 구하는 방식이었을까.

 

 

2011. 8.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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