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황석영’을 다시 읽으며

by 낮달2018 2019. 9. 17.
728x90

작가 ‘황석영’과 그의 소설들

▲ 내 서가의 황석영 작품집. 발간 순으로 묶었다. <심판의 집>(1977), <객지>, <돼지꿈>(1980)

올해 고등학교로 돌아와 작문 시간을 맡았다. 내게 주어진 시수는 주 1시간. 이 시간은 아이들의 ‘소설 발표 수업’으로 진행한다. 아이들이 주어진 소설을 공부해 와서 두세 명씩 발표하는 형식이다. 한 학기에 한 차례씩 돌아가니 지난 1년간 아이들은 모두 두 편씩의 소설을 발표한 셈이다.

 

소설 선정은 우리 현대소설을 망라한다.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고등학교 필독 소설, 단편 소설이 중심이다. 우리는 학기당 서른 편씩, 모두 60여 편의 소설을 공부했다. 아이들은 주로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수집·가공하여 유인물을 만들어 발표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아이들은 만만찮은 이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루는 작품들은 대체로 내가 이미 읽은 것들이지만, 때에 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읽지 못한 소설은 새로 읽어야 한다. 정작 읽은 작품이어도 공부하면서 예전의 내 이해가 매우 천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많다. 젊었던 때여서, 왕성한 읽기 능력에 비겨 내 소화력은 그리 실하지 못했던 셈이다.

 

▲ 황석영(1977년)

단편 ‘삼포 가는 길’에 이어 2학기에 중편 ‘객지(客地)’를 공부하면서 새삼 그것을 분명하게 깨우친 느낌이다. ‘객지’를 읽은 건 74, 5년께가 아닌가 싶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였다. 어느 간척지 공사장에서 착취당하는 인부(그 당시에는 노동자라는 낱말도 낯설었다.)들의 저항을 다룬 이 소설을 나는 ‘이야기’로 읽었을 뿐, 그 이야기 속에 묵직하게 담긴 ‘노동’과 ‘세상’을 읽지는 못한 듯싶다.

 

이른바 80년대 민중문학과 노동 문학의 계보는 그의 소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태일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당대의 모순적 노동 현실에 저항한 때가 1970년이었고, 황석영이 ‘객지’를 발표한 것은 이듬해(계간 <창작과 비평> 봄호)였다. ‘객지’가 분단 이후 ‘남한 최초의 노동소설’로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조세희가 문제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발표한 것은 1978년이었다. <난·쏘·공>에서도 공장 노동을 다루었으나 그것은 황석영이 취한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노동소설이 백화제방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이었으니 70년대의 벽두를 장식한 ‘객지’의 문학적 성취는 만만찮다.

 

‘객지’의 문학적 성과는 흔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단순한 옹호나 노동자의 투쟁이 승리한다는 환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평가된다. 실패로 끝나는 파업을 지도한 이는 ‘학출’(대학 출신)도 아닌 평범한 일용 노동자 ‘동혁’과 ‘대위’다. 작가는 그들을 단순한 계급의 대표라기보다 ‘자신의 계층을 뛰어넘고 상승하려는 폭넓은 상상력을 지닌 인간’으로 파악한다.

 

작가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미래와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확인하는 주인공 동혁의 다짐을 서술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것은 작가가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 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라고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
   - ‘객지’ 중에서

 

황석영의 작품은 대부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작품의 짜임새가 가진 리얼리티와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머릿속에서 조합된 생경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득한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품을 쓸 때마다 배우고, 또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많다. 쓰는 중에 자신이 잊고 있었던 체험의 어느 부분이나, 당시에 발견했던 진실들이 더욱 선명해져서 완전히 알게 될 때가 많다. 관념과 행동의 중간을 연결하는 역할이 바로 작가의 작업으로 여겨진다.

가령 ‘객지’는 노동자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축소한 것이다. 나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썼으나 노동계층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계층이 노동자여야만 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층들이 그들 저변층과 맺는 관계의 과정을 향하여 쓰는 것이다. 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공(機工)·소시민·군인·여대생·소년·갈보 등등의 각계각층의 등장인물들을 보여주지만, 보다 바람직한 인간의 삶에 기여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근본적으로 잊은 적이 없다.”
   - <심판의 집>(1977·열화당)에서

 

이러한 작가의 문학관은 ‘자신의 체험과 시대의 아픔을 이 땅에서 사는 민중의 운명으로 체화’했다던가 ‘현실의 억압이 가중될수록 현실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더욱 깊고 풍요로운 문학 세계’를 펼쳐냈다는 평가(최원식 외)로 이어지는 것이다.

▲ 대하소설 <장길산>(1985), <무기의 그늘>(1985), <손님>(2001)

한편 그는 자신의 서술 기법을 ‘카메라의 눈’이라는 형식으로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기술 방법에 있어서 객관성과 구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카메라의 눈-이라는 서술인데, 내게는 ‘그리움’을 그대로 쓰느니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장면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역·철길·기차·접힌 우산·비 그리고 처마 끝에 섰는 사람, 등등으로 그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에 걸맞은 이미지들을 주워 모아서 그림을 그려내듯 써 내려간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주관적인 자각의 의식을 애써 배제하려 한다. 형용사를 줄인다. 내면적이거나 추상적인 생각의 잔상들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구체적으로 그리려고 애를 쓴다. 감정을 절제하노라면 자연히 문장은 삭막하고 건조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그리려는 상황에 알맞게 형상화되는 것이다.”
   - <심판의 집>(1977·열화당)에서

 

작가의 서술 기법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일정한 수준으로 나타나지만 ‘몰개월의 새’에서 그것은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몰개월의 새’는 그의 단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베트남 파병을 앞둔 특수 교육대의 병사와 주변 술집 작부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삶의 가치’가 모든 사람의 범상한 삶 속에 존재한다는 진실을 확인해 준다.

 

파병을 위한 출동을 앞두고 부대를 무단이탈한 주인공은 서울을 찾는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젊음과 방황, 잃어버린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귀대 열차에 오른다. 그는 열차 승강구에 기대어 플랫폼에서 작별하는 두 연인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저이들은 나를 모르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불빛이나 소음이나 바람의 부분으로 나를 끼워 넣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키 큰 중위의 웃음을 나는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그 여자의 깡충거리던 작별의 동작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회한 덩어리였던 나의 시대와 작별하면서 내가 얼마나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내가 가끔 못 견디도록 시달리는 것은 삶의 그러한 편린(片鱗)들에 의해서다.”
   - ‘몰개월의 새’ 중에서

 

한편, 특교대가 생기자 하나둘 들어선 몰개월의 주막에 깃든 작부들은 저마다 전쟁터로 떠날 병사 중 애인 하나씩을 골라서 편지질을 한다. 그 여자들은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낸다. 그들은 가끔 들려오는 병사들의 전사 소식에 몸부림치지만, 곧 잊고 새로운 애인을 만들면서 자기 삶과 그 슬픔을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미자는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애인의 전사 소식에 만취한 채 시궁창에 널브러진 그녀를 일으켜 씻어준 연으로 주인공은 그녀에게 애인으로 ‘찍혀’ 버린다. 면회를 오고 ‘노랑띠 담배’를 들여주는 등 미자는 주인공의 애인 노릇을 톡톡히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녀를 ‘먹지’ 못한다. ‘식구를 먹어주는 놈이 있겠는가.’ 낯을 씻겨 주면서부터 그들은 이미 무관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교대에서의 마지막 밤에 주인공은 미자에게 가는 대신 주머니를 털어 그녀에게 보낸다. 출동의 새벽, 손수건과 꽃을 흔들며 트럭 대열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바로 몰개월의 여자들이다. 미자는 무엇인가를 주인공을 향해 던진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南支那海)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의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 ‘몰개월의 새’ 중에서

▲ <오래된 정원>(2000), <삼포 가는 길>(2003), <심청>(2003)

황석영의 소설 속에 나타난 여인들, 특히 작부나 창녀들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여덟 명의 군인 죄수를 뒷바라지한 ‘백화’(삼포 가는 길)나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서 죽어간 애인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미자’의 삶은 동질적이다. 그들이 일하는 곳이 똑같은 ‘갈매기집’이라든가 ‘포구의 불빛’ 따위의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진부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갖는 동질성의 형식적 표현이다.

▲  황석영 (2015)  ⓒ 한겨레 사진

스무 살을 전후해 황석영을 만났던 내가 50대로 진입하는 동안 그의 문학도 깊고 넓어졌다. 베트남전쟁을 제삼세계의 입장에서 그려낸 장편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전쟁을 다룬 소설 가운데 발군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고교 이래, 그의 삶도 극적이었던 것 같다. 전격적 북한 방문과 망명 생활, 수감생활을 거쳐 1998년 사면된 이후 발표한 <오래된 정원>(2000), <손님>(2001), <바리데기>(2007) 등은 그의 소설 세계를 넓혀준 작품들이다.

 

요즘 작가 지망생들은 본이 되는 작품을 필사하는 방법의 습작기를 두는 모양이다. 필사는 사실 매우 적극적·분석적 독서이다. 손수 작품을 공책에다 베끼는 일은 힘들긴 하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정서적 동화 체험을 통해 공부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짧고 성긴 습작기를 거쳤지만 나는 직접 필사해 본 경험은 없다.

 

그러나 20대를 전후해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법을 나는 황석영에게 배웠다. 그의 매우 건조한 문체도 썩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황석영 따라 하기’에 골몰하기도 했다. 인물들의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상황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장면 구성이나 기법은 쉽게 흉내 내기 어렵다. 지금도 내가 쓰는 문장의 어떤 부분들은 여전히 황석영의 흔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 황석영은 현실에 뛰어드는 일도 작가의 시대적 책무로 여겼다.

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과 그 작가를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지 모른다. 나는 박경리 선생을 존경하고, 황석영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작가를 좋아하지만, 아직 한 번도 그들을 만나고 싶다거나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인상과 작품에 대한 이해는 나의 것일 뿐, 굳이 그들의 해설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정치적 지향이나 현실 정치에 대한 개입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조심스럽다.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드러난 그의 모습을, 나는 곤혹스러웠지만, 시대와 역사에 대한 한 작가의 선택이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했다. 때로 현실 정치와의 절연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는 일보다 거기 뛰어드는 것도 작가의 시대적 책무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한겨레>는 황석영이 한 주류회사에서 주는 상(로얄 살루트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싣고 있다. 이 상은 ‘문화예술계에서 한 해 동안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긴 인물을 선정해 주는 상’으로, 1회와 2회는 박찬욱 감독과 이어령 씨가 각각 수상했다. 상금은 2천만 원인데, 수상자가 지정한 단체에 수상자의 이름으로 전액 기부된다고. 작가는 기름 유출 재해 현장 복구를 돕기 위해 태안군청 재난대책본부를 기부처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 땅에서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산다는 일은 확실히 선택된 일임이 틀림없다. 원고료가 적다고 회의에 빠지고, 마음대로 쓸 수 없어 만년필을 던지던 나와 나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단편을 두어 편 한 달 내내 찢고 쓰고 또 찢고 쓰고 나서 쌀값이 모자라 쩔쩔매던 내가, 신문 연재를 맡고서는 남에게 술도 살 형편이 되었다.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받는 돈은 동시대의 임금 노동자에 비하면 거의 열 배나 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나는 이 열 배의 간격을 내 창작을 통해서 보상해 나가겠다는 결심으로 의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노력할 작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에서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일은, 분명히 하나의 부끄러움이다. 훌륭한 시대가 온다면 나의 모든 작품과 생활은 호된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며, 그 비판의 폭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나는 끝없이 부끄러워할 테고, 공짜로 먹고 살지 않도록 노력할 작정이다.”
    - <심판의 집>(1977·열화당)에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갓 생활고에서 해방된 작가의 목소리는 비장하고 결의에 차 있지만, 그 세월에도 그 초심을 잊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부끄러움은 계속될까.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처음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면, 아직도 부끄러움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 세계는 더 깊고 그윽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2008. 1. 7.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