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19년 11월 9일-김원봉,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조직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워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결사의 성격은 조직 후 만든 공약 10조의 첫 조항인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에서 유래한 단체명[의열(義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열단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으로 고문에 김대지와 황상규, 단원은 김원봉·윤세주(1900~1942)·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선출되었다.
의열,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고문인 김대지(1891~1942, 1980 독립장)와 황상규(1891~1931, 1963 독립장)는 김원봉의 동향 선배로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 영향이 컸고 뒷날 단재 신채호가 조직의 강령을 체계화했다.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은 단재가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때는 1919년, 지난봄에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일제에 대항할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항일독립운동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 방식을 불만스럽게 여긴 이들은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지향하였다.
의열단은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했다. 이들은 민중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약 10조 외에도 파괴해야 할 일제 기관 5개를 ‘파괴 대상’으로, 암살 대상을 ‘가살(可殺)’을 정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의열단은 파괴해야 마땅한 대상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중요 일제 기관으로 정했다. ‘가살’은 조선 총독과 이하 고관, 일본군 수뇌, 대만 총독과 대만 총독부 고관,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 매국노 등으로 임시정부에서 정한 ‘7가살’과 비슷했다.
“조선 총독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매년 2회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1920년 일제 고관 암살과 중요 관공서 폭파 목적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따라 밀양과 진영에 폭탄을 반입하려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일제에 사전 탐지되어 실패하였지만 이후 부산경찰서(1920, 박재혁 바로가기)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 최수봉 바로가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 상하이 황포탄 의거(192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투쟁(1923, 김상옥 바로가기) 등이 이어졌다. [의열투쟁 일람 참조]
1920년대의 의열투쟁
의열투쟁은 1924년 도쿄 궁성 앞 니주바시(이중교二重橋) 폭탄투척(김지섭 바로가기), 1926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바로가기)으로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제3차 폭탄 계획, 대구 부호 암살 계획, 북경 밀정 암살 사건, 경북 의열단 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는데, 의열단의 항일투쟁은 민족 운동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26년 이후,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열어 운영하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뒤에 의열단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조직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임시정부는 초기에 의열단의 폭력투쟁 노선을 ‘모험 행동’으로 받아들여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의열단의 김원봉은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 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 나머지 독자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격하던 김구도 의열단의 활동에 고무되어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 운영하였다.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일행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1932 바로가기)와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의거(1932 바로가기)는 김구가 조직한 의열 투쟁이었다.
최근 영화 <밀정>이 인기를 끌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였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오늘날의 청년과 피식민지 시절의 젊은이들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항일비밀 결사를 이끌어 나갔던 탁월한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주도하는 의열 투쟁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임정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은 60만 원, 김원봉에게는 100만 원이 걸렸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약 200억~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만큼 그가 벌인 의열 투쟁은 일제에 뼈아픈 것이었다.
1923년의 제2차 파괴암살계획에 따라 폭탄을 반입하려다 실패한 의열투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에서 약산은 실명으로 등장(이병헌 분)한다. 송강호가 분장한 이정출은 바로 이 계획에 참여했던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옥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약산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조직된 것은 1938년 10월이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중국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와 공작비를 지원받았다.
남북 양쪽에서 잊힌 독립운동가 김원봉
약산이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광복 후, 귀국한 약산이 고향인 밀양에 돌아왔을 때 온 군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민족주의민주전선, 조선민주청년동맹 등에 참여한 약산은 좌익 혐의로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 수모를 당한 뒤, 사흘 동안 통곡을 했다고 한다. 더러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약산이 1948년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이때의 굴욕 때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뒤, 약산은 국가검열상,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8년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전언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애국열사능에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북 어디서도 독립을 위한 약산의 풍찬노숙을 기억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 독립운동가는 이제 남북 모두에서 잊힌 인물이 된 셈이다.
약산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1931년 독립운동가 김두봉(1889~?)의 조카딸로 의열단원이었던 박차정(1910~1944)과 결혼했다.
여학교 때부터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사건(1930)으로 옥고를 치렀던 박차정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지냈고 1939년 전투 중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하여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공적을 평가받지 못하다가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 동래구에 생가가 복원되고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세워졌다. 아내에게 미친 뒤늦은 기림이 약산의 삶과 투쟁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을는지.
2016. 11. 8. 낮달
약산 서훈 문제
약산 김원봉은 ‘북도 남도 버린 인물’, ‘서훈도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의열단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독립투쟁 이력에도 서훈 논쟁이 이어지는 것은 남북을 갈라놓은 해묵은 이념 탓이다.
2005년에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를 서훈하기로 하자 유족들이 서훈을 신청했고, 밀양에서도 항일운동 기념단체들이 약산 서훈 추진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서훈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해방 후 월북, 북한 정권 수립에 이바지했다는 행적 때문이었다.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의열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김원봉 서훈 논쟁이 격렬해졌다.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 중심 보훈 혁신위원회’에서 삼일절을 맞아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도록 보훈처에 권고하면서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보훈처가 현행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으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은 선정이 불가하다고 밝힘으로써 논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광복회장이 “김원봉은 독립운동으로 평가해야 하고 해방 이후 행적 논란은 냉전적 사고”라고 밝히면서 논란은 이어졌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약산 김원봉이 신채호, 안창호, 김규식, 한용운과 같은 급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의열단 투쟁’으로 한국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때문이다. 특히 약산의 독립운동은 ‘쉼’이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귀국할 때까지 투쟁을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래 <KBS> 기사 참조)
약산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역임했지만, 그는 북한 권력의 핵심인 노동당원이 아니었다. 실제 내각에 참가했지만, 그는 권력 핵심으로 볼 수 없으며, 1958년 숙청될 무렵에는 남으로 탈출을 꾀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북한 정권 수립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서훈 논란에 대해 이헌환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재평가할 필요”와 “북한 정권에 기여한 자라 해서 배제하더라도, 숙청 등으로 북한 정권에서 배제된 자들은 그 나름의 공적을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그러므로 “남한 정부라도 먼저 과감하게 월북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훈을 개방하게 된다면 통일 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국민적 동의 이전에 ‘절대 불가’를 외치는 정치권 일각의 냉전적 사고의 극복이 시급하다. 이래저래 남북 관계의 획기적 변화가 있기 전에 약산에 대한 서훈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 사회 일각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약산의 고향 밀양에서 그는 이미 복권된 듯하다. 약산과 석정 윤세주 열사의 생가터가 있는 밀양 시내 해천 주변에는 밀양 독립운동 등 주제별로 항일운동 관련 벽화를 그리고 태극기 나무, 독립군 69인 명패, 희망 우체통 등을 설치해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또 밀양 독립운동기념관에도 밀양의 3·13 독립운동과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등과 함께 약산과 석정의 독립운동 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는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고 있다. [관련 글 : 밀양, 2017년 11월]
밀양시는 2018년, 약산의 생가터에 있던 건물을 매입하여 전국 최초로 밀양의열기념관을 개관했고, 1년여 만에 관람객 수가 1만2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의 해방 후 행적과 무관하게 그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자부심과 긍지의 원천이 된 것이다.
2019. 11. 8.
참고
· 김원봉 서훈 논란,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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