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글꼴과 ‘한글’을 이용한 탁상출판
대대 행정서기병으로 현역 복무 중이었던 나는 1970년대 후반의 마지막 2년여를 중고 레밍턴 타자기를 쓰며 보냈다. 그러나 복사기가 보급되기 이전이어서 늘 먹지를 썼고 주번 명령 문서를 흔히 ‘가리방’이라 불리던 등사기로 밀어야 했다.
철필로 써서 만든 등사원지를 등사기 판에 붙이고 잉크를 골고루 묻힌 롤러를 밀어서 한 장 한 장 수동으로 인쇄를 하던 시절도 이미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타자기가 나오면서 손이 해방되었고, 곧 복사기와 컴퓨터가 나오면서 이른바 ‘인쇄 혁명’이라 부를 만한 ‘혁신’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1980년에 전역해 대학으로 돌아온 나는 그해 연말께 국산 타자기를 사서 이 혁신의 대열에 동참했다. 나는 수동 타자기에 이어 일제 전자 타자기를 쓰다가 1992년에 컴퓨터를 장만하면서 마침내 문서편집기 사용자가 되었다. [관련 글 : 세벌식, 한글 이야기(1)]
1989년에 시장에 나온 ‘아래아 한글’(이하 ‘한글’)을 나는 뒤늦게 1992년에 만났지만 이후 26년째 이 ‘한글’과 함께 하고 있다. 초창기만 해도 불법 복제품을 쓰다가 정품 사용자가 된 것은 ‘97 8·15 특별판’부터다. 이후 2000년에 나온 ‘워디안’에 이어 ‘2010’(2010), ‘오피스 2014 VP’(2014)를 사 썼다.
아래아 ‘한글’과 탁상출판
지난해 12월에는 ‘한컴오피스 2018’ 가정용·학생용 다운로드형(1PC용)을 사 최신판 ‘한글’ 사용자가 되었다. 굳이 최신판을 사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간 한글로 누린 편의만으로도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여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관련 글 : 1989년 오늘-<아래아 한글>, 시장에 나오다]
문서편집기 ‘한글’의 등장은 이른바 ‘탁상출판’(DTP: Desktop Publishing)을 현실에서 실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단행본이나 사전 등의 출판물을 디자인하는 작업’이라는 탁상출판의 본질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긴 했다.
그러나 전문 탁상출판 프로그램이 아닌 ‘한글’만으로도 각종 팸플릿, 소책자, 홍보선전물 등을 편집할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나 노동, 시민운동에서 한글은 가장 손쉽게, 그리고 싸게 유인물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었다.
기본글꼴이 명조, 고딕, 샘물, 필기체밖에 없었던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여기에 적당한 장평(長平)을 주어 제목을 뽑아야 했다. 글꼴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고, 글자의 크기도 제한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책자나 팸플릿 등을 편집해 보면 가장 아쉬운 게 선택할 수 있는 글꼴이 몇 안 된다는 점이었다.
복직한 이듬해 처음으로 학급문집을 만들면서 컴퓨터로 편집을 했다. 아마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만들어 출시한 글꼴을 구매한 게 이때였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마 글꼴 세 개를 묶어서 1만5000원에 샀던 것 같다.
문서 편집과 글꼴들
산돌 독수리, 숲, 물방울 같은 한글 글꼴을 사서 매우 생광스럽게 썼다. 이후에도 한 차례 더 산돌 글꼴을 사서 썼는데 산돌 여사서, 화룡도, 방각본 같은 옛 글씨 형태의 글꼴이었다. 지금도 일부 글꼴을 쓰고 있는데 이후 산돌에서는 더는 그런 방식으로 글꼴을 팔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요즘은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에서 개발한 글꼴을 공개하고 있어서 저작권 걱정 없이 무료를 내려받아 쓸 수 있다.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내려받을 수 있는 글꼴이 이미 수백 가지다. 아래는 이 무료 한글 글꼴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뜻밖에 글꼴 회사인 ‘아시아폰트’(200종)와 ‘클립아트코리아’(73종), ‘윤디자인’(1종) 등에서도 ‘영리 목적 아닌 개인용도로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수백 종의 글꼴을 공개하고 있다. 아시아폰트의 경우엔 워낙 선택의 폭이 넓어 취향에 따라 몇 개를 골라서도 쓸 수 있다. [표 참조]
나는 이런 글꼴로 만든 문서를 피디에프(pdf) 문서로 변환한 뒤 이를 오려서 그림 파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단지 그게 편해서인데 글꼴에 따라서는 pdf로 변환이 안 되는 것(‘페이지 정리 중 오류’ 메시지가 나온다.)도 있다. 대한인쇄문화협회에서 공개한 ‘바른체’나 제주서체 등 지자체의 글꼴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글꼴로 만든 문서를 인쇄소에서 인쇄하려면 pdf로 변환해 가는 게 가장 편리한데 pdf로 바꿀 수 없는 글꼴이라면 곤란해진다. 물론 해상도가 좋은 인쇄기가 있다면 집에서 인쇄하여 인쇄소로 가져가면 된다.
공개글꼴이 나누는 ‘베풂’
‘한글 2018’은 쓸 수 있는 글꼴만도 수백 가지가 되니 굳이 다른 글꼴을 쓰지 않고도 품격 있는 인쇄물을 만들 수 있다. 선택할 글꼴이 많다고 해서 지나치게 여러 가지 글꼴을 쓰는 건 별로다. 단일한 문서에 글꼴이 어지러운 것은 오히려 글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출시된 초창기에 비기면 이제 한글은 환골탈태, 못할 게 없는 문서편집기다. 물론 전문 편집 프로그램과 비길 수는 없지만, 엔간한 팸플릿, 소책자, 홍보물 만드는 데는 과부족이 없다. 요즘 ‘한글 2014’부터는 인쇄방식에 ‘소책자 모양으로 찍기’를 지원한다. B4를 접어 4면으로 만드는 B5 편집을 하면 소책자 형식으로 나누어 인쇄해 주기 때문에 한결 편하다.
공개글꼴은 문서 편집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요긴하게 쓰인다. 이철수 글꼴로 나는 내 방의 ‘북봉재’ 편액을 새겼고, 거실에 걸린 나무판에는 (사)더불어숲의 신영복 글꼴로 성경 구절을 새겼다. 저작권을 독점하지 않고 이웃들과 나누고자 하는 이들의 베풂이 새삼 기껍게 다가오는 이유다.
2018. 2.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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