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한글 이야기] 권위의 언어, 평등의 언어

by 낮달2018 2019. 10. 8.
728x90
SMALL

자신을 객관화하는 호칭 생각

▲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 아이들은 이 시기에 자아를 정립해 간다.

남 앞에 자신을 이를 때 우리는 대명사 ‘나’ 또는 ‘저’를 쓴다. ‘저’는 윗사람 앞에서 쓰는 낮춤 표현이고 ‘나’는 그 밖의 경우에 쓴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지위를 대신 쓸 수도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을 ‘아빠, 엄마’라 지칭하는 게 그것이다.

 

부모가 자녀 앞에서 자신을 ‘엄마(어머니), 아빠(아버지)’로 이르는 경우는 비교적 자연스럽다. 어린 자녀에게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강조하는 가르침이고 동시에 본인에게는 보호자의 책임을 확인하는 호칭인 까닭이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다. 아마 이는 학교 사회에는 일종의 문화로 정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 것을 보면 아마 교단에 처음 섰을 때의 버릇이 굳은 게 아닌가 싶다.

 

‘나’인가, ‘선생님’인가?

 

▲ 교사들은 자신을 흔히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글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일러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나를 ‘나’라고 불렀다.

 

부득이 자신의 지위를 말해야 할 때도 ‘담임교사’, ‘담당 교사’, ‘국어교사’ 등으로 중립적인 명칭을 쓴다. 초임 학교가 고등학교여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거기서도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들은 적지 않았으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교사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 지칭하는 건 일반적 현상 같다. 아동에게 서로의 관계와 위계를 강조·확인하는 뜻에서라고 보면 이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호칭이 예외 없이 쓰이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지난 5월 한 달 동안, 사범대 학생들의 교육실습이 있었다. 나는 이들 가운데 국어과 교생 두 사람을 지도했다. 3주 차에 교생들의 수업이 있어서 참관했는데, 두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서로 갈렸다. 교직을 이수한 사범대 4학년생은 ‘선생님’이란 호칭을 서슴없이 썼고, 서너 살쯤 많은 교육대학원 학생은 줄곧 ‘나’를 썼다.

 

동료 교사들과 그걸 화제로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본인들과는 의견을 나누지 못했다. 대체로 주변 동료 가운데에는 ‘선생님’ 호칭을 쓰는 이들이 조금 더 많지 않나 싶다. 나는 교육적으로 볼 때, 학생들 앞에서 교사들이 자신을 ‘나’라고 쓰는 게 훨씬 더 걸맞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말에서 남 앞에 자신을 낮추는 건 기본예절이다. 교사가 남에게 자신을 ‘김 선생, 이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언젠가 장인어른께 전화하면서 ‘장 서방’이라고 했다가 선친께 호되게 꾸중을 들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는 상대가 아랫사람인 경우라고 해서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어린이가 아닌, 본격적 자아 형성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자신을 높이는 ‘객관적 호칭’보다는 ‘나’라는 주체를 강조하는 말하기가 훨씬 바람직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호칭은 ‘권위와 위계’의 한 표지

 

사실상 호칭 문제는 한 사회의 권위주의나 위계를 드러내 주는 문화의 일부다. 봉건왕조 시대 임금의 호칭은 ‘짐’이나 ‘과인’이었다. 그것은 만인지상인 자신의 지위를 이르는 호칭이었다. 당연히 신하는 자신을 ‘신(臣)과 신첩(臣妾)’ 따위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체가 아니라 지위에 따른 상하 수직관계에 따른 호칭체계인 것이다.

 

거기 비기면 오늘날 공직자들이나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들이 국민 대중들 앞에서 깎듯이 ‘저’라고 쓰는 것은 비약적 변화다. 권력은 절대적 힘이지만 그 힘을 위임한 주권자에 대한 겸양이 필수가 된 지금은 국민주권 시대인 것이다.

▲ 2003년 대통령의 취임식의 세 전직 대통령. 전·노는 표정조차 권위적(?)으로 보인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대통령이 자신을 지칭한 방식도 흥미롭다. 박정희는 개발독재 시대의 카리스마에 걸맞게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나’를 썼다. 그의 총애를 받다가 그의 방식을 그대로 되밟아 집권한 전두환은 훨씬 더 무식하고 오만한 호칭을 즐겨 썼다. 그는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자신을 언제나 ‘본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본인’은 표준국어대사전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관계자, 해당자’의 뜻을 가진 명사로 훨씬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 지칭하면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6월 항쟁에 밀려 6·29로 항복한 노태우는 국민 앞에 바로 엎어지는 게 켕겼던지 아주 묘한 표현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보통사람’을 강조했던 이 어정쩡한 반역의 수괴는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고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뻣뻣한 권위주의(‘본인’)와 국민주권 시대의 언어(‘저’) 사이에 과도기적 문어였던 셈이다.

 

‘본인’과 ‘이 사람’, 권위주의 시대의 호칭들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을 객관화함으로써 이들 독재자는 자신의 초헌법적 권위를 과시했다. 아무도 ‘본인’과 ‘이 사람’을 넘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자신을 가리키면서 마치 제삼자를 말하는 방식을 취한, 이 말하기는 권위주의 시대의 한 초상으로 남아 있다. ‘권위의 언어’에서 ‘평등의 언어’로 바뀌는 데 적어도 한 세대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실제로 자신의 호칭을 객관화하는 예는 권위주의 사회 곳곳에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군대다. 내가 복무했던 1977년에서 80년까지는 그런 권위주의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그 시절 만난 상관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보직’이나 ‘지위’로 지칭했다.

 

당시 부대장이었던 노태우는 자신을 ‘여단장’이라고 했고, 대대장은 ‘대대장’, 중대장은 ‘중대장’, 심지어 부사관조차 자신을 ‘선임하사’라 불렀다. 나는 자신을 ‘나’라고 부른 지휘관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들의 말법은 하나같았다.

 

“여단장은 용사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대장이 생각하기에는…….”
“중대장이 한 잔 살게.”

 

군대에서 군인들이 쓰는 말법을 학교에서 교사들이 쓰는 말법과 비교할 수는 없다. 교단에서 쓰는 호칭 속에는 아이들에 대한 관계와 예절을 환기하는 교육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생들은 ‘주변인’으로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자아를 정립해 나간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에게 자신을 객관화하는 호칭보다 ‘나’라는 주체를 강조하는 말하기가 더 교육적일 수 있는 이유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수직적 권위’에서 ‘수평적 평등’의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2010. 7. 5. 낮달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