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식 이름을 생각한다
이름이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의 표지로 인식된다. 그것은 비단 개인의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나라·민족과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사람의 이름에서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유추해 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름, 개인 정체성의 표지
‘톰’이나 ‘메리’가 영어권의 이름이라는 것과 ‘미찌꼬(美千子)’와 ‘장웨이(張偉)’가 각각 일본과 중국의 이름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로마노프나 고르바초프처럼 ‘-프’로 끝나는 이름이 대체로 슬라브족을 이른다거나 무하마드가 아랍인의 이름이라는 건 상식이다.
우리의 이름은 어떨까.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배우는 가장 표준적인 한국인의 이름은 ‘철수’와 ‘영희’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이름을 붙이는 법도 진화를 거듭해서 요즘은 그런 촌스러운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출생신고 때 한자를 써야 하는 제한이 없어지면서 갖가지 한글 이름이 등장했지만, 그 쓰임새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한자로 반듯하게 이름을 붙이는 관행을 벗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순우리말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에릭, 찰스, 알렉스, 앤디 들은 내가 알고 있는 연예인의 예명이다. 글쎄,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살다 온 까닭에 거기서 쓰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런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이 거북해지는 걸 어쩌지 못한다. 외국인과의 혼혈도 아니어서 평균적인 한국인의 모습 그대로인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보면서 바야흐로 시방이 글로벌 시대임을 새삼 확인하기도 한다.
연예인, 특히 가수들이 이름에 외국어를 섞어 쓴 역사는 꽤 오래된 듯하다. 60년대의 패티 김이나 쟈니 리, 김세레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이름의 특징은 성을 반드시 명시한다는 점이었다. 그룹 이름에는 외국어가 그대로 쓰였다. 펄시스터즈를 비롯하여 블루벨스, 라나에로스포, 뚜아에모아 등이 그것인데 이 시기에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도 더러 쓰이었다.
영어식 이름에 담긴 무의식적 선망
신군부 집권기에 생뚱맞게 이들 가수와 그룹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해 김세레나가 김세나가 되고,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어니언스가 양파들로 바뀐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을 의식한 신군부가 벌인 일종의 유사 민족주의의 시늉이 아니었나 싶다.
연예인에게 이름은 자기 지명도를 높이려는 전략의 일부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도 있으니 이는 일거양득의 전략인 것이다. 이를 무어라 탓하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외국식 이름 속에 담긴 무의식적 선망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모든 표준을 외부에서 구하는 전도(顚倒)를 겪었다. 우리는 양악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잣대로 국악을 바라보고, 서양 미술을 통해 한국화를 이해하는 엄청난 가치 전도의 시대를 살아왔다.
내부의 잣대를 당당하게 갖지 못하고 늘 외부(서구)에서 표준을 가져오는 오래된 관습으로 자신과 우리 문화 자체에 대한 폄훼를 내면화하게 되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이 시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가진 고유한 관습을 서구의 그것 밑에다 놓는 사고의 식민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외국식 이름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옛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80년대쯤이었던 듯하다. 꽤 명망 있는 인사들이 낀 어떤 사회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서 이들 엘리트 그룹들이 자기 동아리 속에서 따로 영어식 이름으로 호칭한다는 게 우연히 밝혀졌다. 당시 언론의 비판은 매서웠다. 역시 이름을 민족적 정체성과 이은 결과다.
그러나 이른바 이 밀레니엄 시대, 글로벌리즘과 세계화 시대는 영어식 이름으로 넘치는 느낌이다. 연예인 그룹 이름으로나 쓰이던 영어가 개인의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본격적인 개인의 시대가 시작된 걸까. 연예인 중에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지 않을 만큼 국제화된 시대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이 개인 정체성의 표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에 한 영어 학습서의 저자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영어 이름에 대한 우리들의 무감각을 꼬집고 있다. 그는 직업 때문에 가끔 영어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받곤 하지만 그에겐 영어 이름 따윈 없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영어학원에선 한글 이름 쓰면 안 돼?(2007. 10. 9)]
그는 한 미국인으로부터 왜 한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 이름을 쓰는지를 모르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흔히들 한글 이름이 발음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걸 '배려'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고 그는 반문한다. ‘서로 동등한 입장이라면 상대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배려’라고 그는 지적한다.
되지도 않는 영어를 더듬더듬 진땀 빼며 하고 있는데 그들은 고작 당신의 이름 하나 제대로 발음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름까지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면 그만큼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배려’가 아닌 ‘굴욕’이다.
그는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유독 영어에만 넘치는 현상을 주목한다. 일본어나 중국어 이름을 가진 한국인을 본 적이 없노라면서. 해외에서 활동하지만, 박지성이나 박세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서는 상대방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 주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 어디서든 자신의 이름은 하나라면서 그렇게 독자들에게 반문하면서 글을 맺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글로벌, 국제화·세계화 시대라는 시대적 추세를 굳이 부인하거나 한물간(?) 민족주의를 새삼 들먹일 생각은 없다. 문제는 위 기사의 필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한 ‘세계화’가 유독 영어 쪽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점이다.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이름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거기 담긴 게 ‘무의식적 선망’일 수 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낼 뿐이다.
영어, 주류이자 선망의 문자
재외동포들의 경우, 국적을 얻은 나라 식으로 이름은 따르면서도 성은 쉽게 버리지 않는 듯하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도 비슷한 것 같다. 반대로 영연방 국가인 자메이카의 육상 선수들인 ‘우샤인 볼트’나 ‘아사파 파웰’은 성은 영국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름만은 제나라 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민족적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대중가요의 가사에 한 소절씩 영어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그게 일종의 추세가 되어버린 느낌마저 있다. 뭐 복잡한 내용은 아니고 아주 단순한 구절에 불과한데, 이 역시 영어에 대한 선망의 다른 표현 같다.
- You do live in my heart. I've always breath in your heart(넌 내 마음 안에 있어. 난 언제나 네 마음과 함께 숨 쉬어)
- I can't live without your love (난 너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어)
- Tell me that you love me can not stand that you're never mine you really break my heart (나에게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난 당신이 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은 정말 내 마음을 부숴놓는군요.)
아이들에게 ‘왜 그러는지’를 물었더니 주저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멋있잖아요!”
그렇다. 이미 이 땅에서 영어는 모국어를 밀어내고 이미 주류의 언어, 그러나 미처 다다를 수 없는 선망의 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 횡행하고 있는 영어 광풍의 까닭이 달리 있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에겐 ‘철수’보다 ‘찰리’가 훨씬 멋있는지 모른다. 거기엔 돈 들이지 않고 맛볼 수 있는 이국에 대한 선망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니 국어교사의 한갓진 영어 이름 타령을 여기서 그만두어야 할까 보다. 그래도 내게는 여전히 철수가 훨씬 정겹고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자신을 짐짓 위로하면서…….
2008. 12.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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