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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야기] ‘KB 국민은행’에서 ‘MG 새마을금고’까지

by 낮달2018 2019.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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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괄호 밖으로 나오다(1)

▲  상호를 영어로 바꿔  2002 년 한글학회 등에 의해 제소된 국민은행과 케이티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란다. 맞다. 한때는 괄호 속에 묶이던 로마자 알파벳은 이제 그 고리타분한 포장을 벗고 공공연히(!) 한글 속에서 늠름하게 쓰인다. 일상 언어 속에서도 영어는 마치 전근대의 한자어와 같은 지위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인쇄물과 영상물에, 거리의 간판에 영자는 차고 넘친다. 대중가요에도 영어 구절이 마치 고명처럼 끼어든다. 더러는 한류를 타고 우리 노래가 바다를 건너기도 하니, 단순반복의 영어 가사를 섞어 놓은 이들 노래는 말하자면 국제화 시대의 ‘트렌드’가 된 셈이다.

 

‘괄호 밖’으로 나온 ‘로마자’들

 

▲ 엘지의 전신에 ‘락희(樂喜)’가 있었다.

기업체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쓰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표기하면서 의심 없이 영자를 쓰는 건 다른 문제다. 세계 굴지의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삼성’도 로고에는 영자로 ‘SAMSUNG(삼성)’을 표기하지만 ‘삼성’이라는 한글 이름을 같이 쓰니 말이다.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회사 이름을 영자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엘지(LG)’부터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만 해도 ‘럭키 치약’을 만든 회사 이름은 ‘락희화학공업사’였다. 럭키를 한자어인 ‘락희(樂喜)’ 대신 영어로 표기하기까지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듯하다. 이 ‘럭키(LUCKY)’와 ‘금성[GOLD STAR(골드스타)]’을 합하여 ‘엘지(LG)’가 된 것은 1995년이었다.

 

▲ 에스케이의 전신은 ‘선경(鮮京)’이다.

엘지에 이어 1990년대 말에 영자로 상호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에스케이(SK)’다. 그 전신은 알다시피 ‘선경(鮮京)’이다. 70년대 ‘장학퀴즈’의 후원기업으로 ‘스마트 학생복’을 생산하던 그 선경 말이다. 이제 영자로 된 ‘에스케이’ 상호는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포항제철이 ‘POSCO’로, 국민은행이 ‘KB’로, 케이티가 ‘KT’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는 이내 국어 관련 단체들의 반발을 불렀다. 2002년, 한글학회 등은 국민은행과 KT를 상대로 “상호를 영어로 바꿔 국어를 아끼는 국민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줬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들 회사가 ‘광고물의 문자는 한글 맞춤법·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하되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 한글과 병기하’도록 규정한 현행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현재 국민은행이 커다란 영자 ‘KB’ 옆에 조그맣게 ‘국민은행’이라고 나란히 쓰게 된 게 그 판결 덕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KB 국민은행’에서 ‘MG 새마을금고’까지

 

정부 투자 회사 ‘한국통신’의 후신인 ‘케이티’의 건물들엔 여전히 영자 간판 ‘KT’가 덩그렇게 달려 있다. 전매청에서 한국담배인삼공사를 거쳐 민영화된 담배제조회사는 간판을 ‘KT&G’로 바꿔 달았다. 수자원공사도 이 세계화 물결에 동참, ‘K WATER’를 같이 쓰고 있다.

▲ 은행들은다투어 영자로 로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민은행이 ‘케이비(KB)’, 은행권으로서는 처음으로 알파벳 로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은행들도 슬슬 이를 따라 로고에다 영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농협도 ‘NH농협은행’으로 산업은행은 ‘KDB’로, 외환은행은 ‘KEB’가 되었다.

 

지방은행도 이 추세에 기꺼이 동참했다. 대구은행은 어느샌가 ‘DGB’가 되고 부산은행도 ‘BS’를 앞세우고, 전북은행도 ‘JB’, 광주은행은 ‘KJB’가 된다. 뒤질세라 새마을금고조차 ‘MG’를 붙이는 걸 보면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이들은 옥외광고물법의 한글 병기 규정을 지키고 있으니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모모한 은행들이 실제로 얼마나 글로벌한(!) 경영을 하고 있는지, 그 업무가 영자로 표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국제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로고에 커다랗게 로마자를 갖다 붙이는 이러한 관례에 은행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고착되어 가고 있는 영어 이데올로기의 일부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영어는 한때 한문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선 우월적 언어, 문자로서 지위를 가볍게 획득했다. 한글날을 즈음해 반짝할 뿐인 한글은 이미 주류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마구 치솟는 각종 영어 인증시험 비용에 바쳐지는 땀과 재원들은 바로 그런 주류 언어에 대한 서글픈 짝사랑일 뿐이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가 가진 정체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시대를 떠나서 개별 언어와 문자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모국어와 나라글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한글을 지키려는 노력을 세계화의 걸림돌이나 진부한 민족주의적 편협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 온당하지 않다.

 

괄호 속에 묶여 있던 영자가 거리낌 없이 나오면서 한글의 위상은 더욱 초라해져 버렸다. 로마자가 주고 한글은 종이다. ‘기미독립선언서’의 문체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하면 ‘영주한종(英主韓從)체’가 된 것이다. 한글이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이 ‘가장 독창적이고도 훌륭한 음성문자’라고 명명한 문자라고 되씹는 것조차 새삼 서글퍼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567돌 한글날

▲ 한글문화연대에서 베푸는 ‘한글, 길을 걷다’ 안내 포스터 ⓒ 문화연대 누리집

내일은 오백예순일곱 돌 한글날이다. 1991년에 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22년 만의 복권, 한글날은 공휴일이 되었다. 그러나 작년까지만 해도 운영되던 ‘한글날 공식 누리집’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한글날 행사는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단체별로 따로 진행하는 모양이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면서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일, 아이들과 한글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나눌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글날을 쉬면서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한 번쯤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공휴일이 된 한글날의 소임은 넉넉하다 하겠다.

 

 

2013. 10.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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