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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인도네시아 부톤섬으로 가다

by 낮달2018 2019.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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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한 도시에서 자신들의 언어 표기 문자로 한글 공식 채택

▲ 찌아찌아족 교사가 한글 교과서로 초등학생에게 첫 수업을 하고 있다. ⓒ 한겨레

한글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문자’라는 사실은 더는 새롭지 않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헌사와 찬사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글과 관련된 논의는 그런 최고의 찬사 속에 화석처럼 갇혀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정작 한글이 ‘민족문자’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했으며, 제 나라 제 국민에게서도 여전히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한글이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1997년이다.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진행된, ‘문자 없이 말만 있는 언어’ 2900여 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유네스코의 연구에서 한글은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비록 한국 정부의 후원을 받기는 하지만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도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이다.

 

▲ 인도네시아의 부톤섬. ⓒ 위키피디아

한글은 지구상 100여 개의 문자 가운데 만든 이와 제작 원리와 이념 등이 정리된 유일한 문자다. 또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 대학이 합리성·과학성·독창성·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 역시 한글이다.

 

인도네시아의 한 도시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로 한글을 공식 채택했다는 뉴스는 그러한 기왕의 한글에 대한 찬사를 증빙해 줄 수 있는 낭보다.

 

보도에 따르면 “훈민정음학회(회장 김주원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6일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부톤섬 바우바우시(市)가 이 지역 토착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할 문자로 한글을 도입했다고 밝혔다”(이하 <한겨레> 기사 참고)고 한다.

 

부톤(Buton)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남동쪽에 있는 섬이다. 섬의 대부분은 열대우림이다. 인구는 50여만 명. 바우바우는 섬에서 가장 큰 도시로 여기서 쓰는 월리오어가 주로 쓰이는데 이번에 한글을 공식문자로 쓰기로 한 찌아찌아족의 말 찌아찌아어는 부톤섬 남부에서 쓰이므로 남부톤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인구 6만여 명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은 문자가 없어 찌아찌아 말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훈민정음학회가 이들에게 공식문자로 한글 채택을 권했고, 시와 지난해 7월 교과서 제작·보급 등 한글 보급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함으로써 한글을 쓰는 ‘민족’이 또 하나 태어난 것이다.

 

찌아찌아어 교과서는 훈민정음학회가 찌아찌아족의 젊은이 두 사람을 국내로 초청해 이호영 서울대 교수(언어학) 등 연구진과 함께 만든 <바하사 찌아찌아1>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바우바우시는 지난달 21일 찌아찌아족 밀집 지역인 소라올리오 지구의 초등학생 40여 명에게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나눠주고 주 4시간씩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교과서에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와 문화, 부톤섬의 역사와 사회, 지역 전통 설화 등의 내용과 함께 한국 전래동화인 ‘토끼전’도 들어 있다고. 교과서는 우리가 쓰는 방식대로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돼 있는데, 우리는 쓰지 않는 ‘ㅂ 순경음(ㅸ)’을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일찍이 중국 헤이룽장 유역의 오로첸족, 태국 치앙마이의 라오족, 네팔 체팡족 등에게 한글을 전파하려 했으나 실패한 이래, 한글이 다른 민족의 문자로 선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이들이 쓰는 한글은 한민족의 공식문자로서 같은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자 없는 소수 민족어를 표기하기 위한 공식문자로서 한글의 진가는 이미 증명되는 추세다.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한국어와는 무관하게 표음문자인 한글 표기법만 배워서 자기 말을 읽고 쓰는 데에 한글은 다른 어떤 언어보다 기능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 향찰로`쓴 <삼국유사>의 헌화가(왼쪽)와 찌아찌아어 교과서 ⓒ 연합뉴스

따라서 이들이 쓰게 될 한글은 말하자면 일종의 ‘차자(借字) 표기’다. 신라 시대에 우리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던 향찰과 비슷한 형태로 쓰인다고 보면 되지 않나 싶다. 그 시기에 뜻글자인 한자를 빌려서 쓰다 보니 어떤 글자는 뜻을, 또 어떤 글자는 음을 취한 향찰의 해석에 우리가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달리 찌아찌아 사람들은 아주 간명하게 자신들의 말을 한글로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훈민정음학회와 바우바우시는 ‘한국문화원’ 건물을 착공하고, 교사 양성과 컴퓨터 보급 등을 통해 한글 교육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에 바우바우시에서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것은 ‘민족문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한글이 한반도를 벗어나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쓰게 되는 첫 사례다. 문자를 갖지 못한 다른 많은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읽고 쓰기 위한 문자로 한글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한글의 우수성’은 보다 널리 알려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를, 무슨 ‘문화 제국주의’니, ‘미개 문화에 대한 문명 전파’니, ‘후진국 선교 활성화’ 따위의 관점으로 바라볼 일은 없는 듯하다. 지금은 열강이 다투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도 아니거니와 설사 그들이 한글을 자유자재로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차자 표기의 발전이지, 한글이 가진 민족과 문화적 정체성과는 무관한 일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글의 공식문자 채택이 갖는 의미는 찌아찌아어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의 언급으로 정리하는 게 가장 마땅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다른 민족을 돕는 데 쓰일 수 있어 기쁘다.”
“한글은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민족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009. 8.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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