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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역적’ 허균, 목이 떨어져 저자 바닥에 내걸렸다

by 낮달2018 202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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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618년 10월 12일, 교산 허균 능지처참 형으로 스러지다

▲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세워진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 허균. 허난설헌기념공원 안에 봉안된 허균 영정

중세의 모순과 맞서 싸운 시대의 이단아 허균, 형장에서 지다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 ‘역적’ 허균(許筠, 1569~1618)의 목이 떨어져 저자 바닥에 내걸렸다. 그는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結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무려 400년 전의 인물을 새삼스레 불러낸 것은 그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명멸해 간 숱한 문인들의 삶과 다른 울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교산(蛟山) 허균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정작 그가 중세의 모순과 맞서 싸웠던 시대의 이단아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관련 글 : 허균, 자유와 혁명을 꿈꾼 로맨티시스트의 초상]

 

교산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초당 허엽(1517~1580), 허성(1548~1612)과 허봉(1551~1588), 허초희(1563~1589, 난설헌)가 형과 누이니 그는 당대의 가장 ‘빵빵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당쟁에 따른 부침(浮沈)을 빼면 그는 비교적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타고난 시적 재능 덕분에 품계도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관련 글 : 능지처참 반역자아닌 시대 앞선 혁명가였던 허균]

 

그는 열일곱에 한성부 초시에 합격한 이래,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했다. 3년 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된 이후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던 그는 마흔한 살에 당상관(형조참의)에 올랐으니 가히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굳이 그의 가문과 출사를 되뇌는 것은 그가 당대의 서얼(庶孼)들과 각별한 교유를 갖고 적서차별의 계급 모순에 저항해야 할 이유나 동기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의 완고한 중세 봉건사회를 살던, 이 명문거족 출신의 선비는 <홍길동전>을 썼고, 서얼의 무리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런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애는 극적이다. <허균 평전>의 저자 허경진이 “이름난 집안에서 정실의 소생으로 떳떳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되었다.”고 그를 평가하는 이유다.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이나 ‘유재론(遺才論)’ 같은 글을 지어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한, 진보적 인물이었다. 당파적 편견이나 역모 혐의로 처형당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루어진 폄훼를 고려하더라도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 ‘요사스럽다’와 같은 평가가 이어지는 것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받은, ‘미천한 자까지도 자기와 대등한 자처럼 대우했다’는 평가는 지배층에는 경박한 패륜으로 보였겠지만,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을 전후한 저간의 정황들을 일별해 보면, 마치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노회한 정치가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였고, 이이첨 등 권신의 무리와 정치적 동사(同事)를 서슴지 않았고, 도성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허균은 1617년 말부터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로 인해 주변 인물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폐모(廢母)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1562~1624)과 마찰을 빚으면서 기자헌이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고자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었다.

 

혁명, 혹은 역모의 끝

 

그가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 등에 항거하기 위하여 서자와 불만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면서 정치적 동사를 하던 이이첨(1560~1623)으로부터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허균은 상소하여 역모와 무관함을 밝혔지만,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여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이 되어 입궐하자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깊어졌다.

 

광해군 10년(1618)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8월 16일, 이 격서(檄書)가 허균의 심복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허균도 체포되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그는 ‘할 말 있다’고 외쳤으나 그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금부로 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8월 24일 한성부에서 능지처참 되었다. 향년 49세.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는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였으나 처형은 서둘러 이루어졌다. 뒷날 정적이었던 기자헌조차 ‘예로부터 형신(刑訊)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供招)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 한 것은 그의 처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정치적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 날 체포되었다.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김으로써 그의 저작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홍길동전>은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 등에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그의 작품임이 후대에 알려졌다. 허균의 문집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여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광해군이 쫓겨난 인조반정 이후에는 물론, 정조와 고종 때도 복권 여론이 일었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어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실패한 거사의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동지들의 모습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하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한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이들,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의 머리를 깨뜨리고, 하급 아전과 종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당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짐 질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다. 

▲ 서울에서 용인군 원삼면 맹리로 이장한 허균의 시신 없는 가묘. 사진 출처 : http://fallsfog.tistory.com/465

그는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連坐籍沒)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사 지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守直)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

 

허균과 홍길동, 혹은 시대의 한계

 

허균은 당대의 모순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서얼 차별 등 신분제도의 모순과 싸우면서 지배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400년이 흐른 뒤 공화제 사회에서 비로소 복권되었다. 능지처참 형을 당한 역신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는 되살아났다. 그의 사상은 ‘호민론’과 ‘유재론’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 교산의 문집 <성소부부고>.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문집을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 날 체포되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지금 백성의 원성은 고려 말보다 훨씬 심하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만일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해서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오직 백성을 위해서 정치를 해야 하며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 ‘호민론(豪民論)’ 중에서

“서얼이라고 해서 관직을 주지 않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이 뛰어난데도 쓰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낸 인재를 쓰지 않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골고루 주었는데 남녀나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하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 ‘유재론(遺才論)’ 중에서

 

허균은 백성을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항민(恒民), 윗사람을 미워하는 원민(怨民), 그리고 호민(豪民)으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 항민과 원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면서 호민을 주목한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 제 살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 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호민론’ 중에서

▲ 호민을 형상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홍길동전>은 그러나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바로 이 호민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허균은 서얼 차별 철폐 등 중세 봉건 신분제도의 개혁을 주창하고 민본주의적 개혁을 피력했지만, 그의 사상은 <홍길동전>에서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서얼 홍길동은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고 활빈당으로 빈민을 구제하며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그는 호민으로서 변혁보다는 율도국이라는 이상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그쳤다. 그의 유토피아는 새로운 신분제 국가에 머물고 만 것이다.

 

400년 전, 기득권을 누리며 신분 사회의 과실을 누리는 대신 적서차별의 사회와 맞섰던 허균. 그는 300년 후에 그 신분 사회가 종언을 고하고 만민평등의 시대가 열리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2017. 10.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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