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0월 13일 운강 이강년, 21일 왕산 허위 순국
1908년 10월 13일과 21일, 8일 간격으로 두 분의 독립운동가가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의병부대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호서(湖西)창의대장 운강(雲崗) 이강년과 진동(鎭東:경기·황해)창의대장 왕산(旺山) 허위 선생이 그들이다.
경성감옥에서 순국한 두 독립운동가, 누가 먼저인가
경성감옥은 1906년 통감부 경무 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한국 내 감옥의 수용 능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신축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1907년 8월, 500여 명의 수용인원 규모로 건립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식으로 열었다.
1912년에 마포에 새 감옥이 세워져 경성감옥 이름을 가져가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운강 이강년이 순국한 날은 10월 13일(음력 9.19.)이고, 왕산 허위의 순국일은 21일(음력 9.27.)이다. 순국일 기준으로 보면 운강이 8일 앞서지만, 대부분 기록에 따르면 왕산을 ‘서대문감옥 첫 사형수’로 이르고 있다.
지인으로부터 첫 사형수가 왕산이 아니라는 얘길 듣고 확인해 본 결과다. 근대 인물과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음력과 양력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헛갈릴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순서로 보면 운강의 순국이 앞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왕산을 첫 사형수로 이르는 것은 경성감옥이 정식으로 개소하던 날에 선생이 처형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십삼도창의군의 서울탈환 작전은 실패했다. 2007년 11월, 진격을 개시한 창의군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1867∼1909)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통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떠나면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창의군은 한성 인근의 경기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활발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운강은 충청도 청풍에서, 왕산은 경기도 양평에서 각각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8일 간격으로 각각 처형되어 순국한 것이다.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던 이인영(1962 대통령장)도 1909년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결국, 십삼도창의군의 주력이었던 세 명의 의병장이 2년 새 모두 처형된 것이다.
1908년 10월 13일, 운강 이강년 선생 순국하다
1908년 10월 13일, 경성감옥에서 십삼도창의군의 호서창의대장 운강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지난 6월, 충청도 청풍과 작성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혀 7월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은 지 스무하루 만이었다. 향년 50세.
운강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운강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는데 벼슬아치 출신으로 동학운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는 동학의 척왜(斥倭) 운동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이듬해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되고 단발령(1885)이 내려지고, 제천에서 유인석(1842~1915)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문경에서 창의(倡義)하였다.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 관찰사 김석중·순검 이호윤·김인담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 장터에서 적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하였다. [관련 글 : 1915년 오늘-연해주 13도의군 도총재 유인석 순국하다]
운강은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 그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896년 4월에 제천에서 관군과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은 후군장을 맡아 그를 좇았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그는 단양 금채동에 은신하였다.
1907년 영춘에서 다시 창의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운강은 다시 제천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단양·제천·원주·연풍·영월·횡성·강릉·청풍·충주·문경·예천·영주·봉화·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1865~1908, 1962 대통령장)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에는 제천 싸릿재[추치(杻峙)]와 죽령, 10월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십삼도창의군을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호서창의대장으로 십삼도창의군에 참여
그러나 이 창의군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벌였다. 운강의 의병 활동 지역은 주로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쳤다. 그 밑에서 활약한 김상태(1963 독립장)·이만원(1990 애국장)·백남규(1963 독립장)·하한서(1991 애국장)·권용일(1963 독립장)·윤기영(1991 애국장)과 그 밖의 장졸들은 모두 이 지방 출신이었다.
1908년 2월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단양 용소동 전투에서 적 백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갈기동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의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와 안동 서벽(西壁), 4월 봉화 내성(乃城) 전투와 안동 재산(才山)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백담사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 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이날 간성(杆城) 신흥사(神興寺)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들을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五歲庵)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강년 의진은 설악산을 넘나들며 훈련할 정도도 능란한 기동력을 자랑하면서 민긍호가 체포된 뒤, 관동 의진이 활약하던 지역을 장악했다. 운강은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4월에, 운강은 강원도를 떠나 경북 일월산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장인 변학기(1962 독립장)·성익현(1995 독립장)·김상태·정경태(1991 애국장)·백남규·정연철(1995 애족장) 등 의진 4천여 명을 안동 서벽(西壁)에 주둔시켰다. 이에 일본군이 영천수비대를 파견해 와 벌인 전투에서 복병을 두고 싸워 크게 이기니, 이 전투가 서벽 전투다.
이처럼 이강년 의진이 10여 년간에 걸친 의병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운강의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운강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작성(鵲城)]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능숙하고 대담한 전술, 혁혁한 전공
이 전투에서 1907년 문경에서 창의할 때부터 함께해 온 도선봉(都先鋒) 하한서 등 7명이 전사하였다. 운강은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주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뒤에 그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丸子太無情 臥傷足不行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若中心腹裏 母尋到瑤京)
서울로 압송되어 평리원(平理院: 사법기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운강은 마침내 이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한 것이다. 운강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선영에 안치하였다.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시 화북면 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또 그 제자와 의병 시절의 부하들이 엮은 『운강 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문경시에서는 2002년 4월에 가은읍에 운강 이강년 기념관을 세워 선생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908년 10월 21일, 왕산 허위 순국하다
10월 21일, 운강 이강년에 이어 경성감옥에서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이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지난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의 산중 마을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온 지 133일 만이었다. 향년 54세.
왕산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출신이다. 그의 항일투쟁은 창의(倡義)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1896년, 1년 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전국에서 창의가 이어지던 때의 이른바 '을미의병'이었다. 인근 유생들과 김천에 수백의 장정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니 이때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관련 기사 : '구미' 하면 박정희? 이 사람도 기억하라]
처음, 김산(金山) 의진은 이기찬(1993 애국장)을 대장으로 김산(김천)과 성주를 거점으로 하여 대구부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대구의 관군이 출동하고 경군(京軍)이 합세하여 공격해와 성주가 무너지고 일부 장령이 붙잡혔다.
의진에서는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재반격을 준비했으나, 이때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명령을 받은 허위는 그만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1899년 2월, 왕산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구단 참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곧 성균관 박사, 1904년 중추원 의관·평리원 수반판사·평리원 재판장·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 비서원승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국정 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하여 찬정 최익현(1834~1907), 판서 김학진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 2등으로 서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양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 등 여러 지사와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9월 민긍호·이강년 등의 의병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십삼도창의군 군사장, 뒤에 총대장으로 서울 진격
1907년 가을에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하여 13도 의병 연합부대를 편성하니 이가 곧 십삼도창의군이다. 이때 이인영이 원수부 십삼도총대장이 되고 진동(鎭東:경기·황해)창의대장 허위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연합부대가 대오를 정비, 서울로 진격할 때, 정예병사 300명의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 부근 동대문 주변의 도로가 뒷날 ‘왕산로(旺山路)’가 된 까닭이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두 개의 난관과 맞닥뜨린다.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상을 당해 문경으로 귀향하면서 지도부의 문제로 전력을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워진 것이 그 하나다. 두 번째 난관은 창의군의 서울 진공 계획이 누설되어 일제가 이미 방어책을 마련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이미 두 달 반 전에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보도하고 있던 터라 일제는 서울 외곽의 방어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의 진출로를 차단하고 한강의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결국, 동대문 밖 30리 앞 지점까지 진격했던 왕산의 선발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력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본대 역시 작전을 펼치지도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3도 연합부대의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각 부대는 흩어져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왕산은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김수민(1962 독립장)·김응두·이은찬(1962 대통령장)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새로운 임진강의병연합부대 편성하였다. 의병들은 정신무장을 가지런히 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일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에 쓰이는 모든 군수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의병연합부대는 유격 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적성 방면의 의병 5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시행하고 무기를 제조하였다.
4월에는 보다 각지 의병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이강년 등과 함께 전국의 의병부대에 통문을 보내고,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에게 30개 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항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6월 11일, 왕산은 경기도 양평군의 산중 마을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으로 은신처를 알아낸 헌병들이 급습한 것이었다.
왕산은 한때 1899년 설치된 최초의 근대 사법기관 평리원(平理院)의 수반판사·평리원 재판장을 지냈다. 평리원 재판장은 오늘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3년 만에 그는 일본인 재판관에게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구한말 대법원장 지낸 왕산, 일제의 법정에 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묻자, 왕산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냐?”고 반문했다.
10월 21일 정오에 왕산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의연하고 대담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하자 그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殮屍 : 시신을 염하는 일)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꾸짖었다.
왕산의 죽음을 <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 :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애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국치민욕(國恥民辱)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 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죄수들은 물론 도성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뒷날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제자 박상진(1884~1921, 1963 독립장)이었다.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오산 아래에 모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무덤 옆에 묘막을 지어 1년간 생활하며 스승을 그리워했다.
왕산 허위 선생께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고향인 구미시 임은동 산 중턱에는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아래 생가터에도 기념공원이 생겼고, 그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와 왕산로가 생겼다.
그러나 경부선 철길 건너 상모동에서 태어난 박정희(1917~1979)의 후광이 너무 커 지금도 왕산을 알지 못하는 이가 구미에도 적지 않다. 이제 24년 지방 권력이 교체되면서 새로 시장이 된 이는 박정희의 신화를 걷어내겠다고 하는데, 아직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2018. 10. 11. 낮달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서울신문>(2018.8.6.)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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