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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체 게바라, 투쟁과 해방의 삶 마감하다

by 낮달2018 202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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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67년 10월 9일 - 체 게바라 총살형으로 떠나다

▲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1967년 오늘, 볼리비아 라 이게라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의,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게릴라부대를 조직하여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 중 종아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된 지 하루만이었다. 게바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삶은 서른아홉 살로 마감되었다.

 

서른아홉, 해방을 위한 투쟁의 삶 마감

 

총살 후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의 시체는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그가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역설적이다. 그의 시신은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o)에서 진보적 의식을 지닌 상류층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두 살 때 심한 천식을 앓았는데 중증 천식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질병이었다.

 

게바라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해 1951년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아메리카 일대 4500km를 여행했다. (이 여행을 다룬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다.) 당시 남미의 각 나라는 쿠데타로 우익정부가 들어서 경제발전을 이룬 대신 빈부의 격차와 노동 착취가 매우 심했다.

 

최상의 삶을 누리는 부유층과 극도의 궁핍 속에 살아가야 했던 민중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게바라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인식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의대 졸업 후 의사가 된 게바라가 혁명가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다시 남미를 유랑하는 여행을 떠났다.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아래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그들은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볼리비아를 여행했다. 거기서 억압받아온 인디오가 해방되는 혁명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그의 여행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스틸 컷. 이 여행으로 체는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거쳐 과테말라에 도착한 그는 망명 중이던 페루의 여성 운동가 일다 가데아(hilda gadea)와 만나서 사회주의에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과테말라에서는 미국 기업의 착취에서 벗어나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꾀하는 급진적인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게바라는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혁명에 준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당시 정부를 가리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 평가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미국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에 의해 개혁 정부가 전복되면서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정권은 무너져 버렸다.

 

체 게바라가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지향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과테말라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반혁명 정권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게바라는 현지에 망명 중인 쿠바의 반체제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완수하다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카스트로에 공감한 게바라는 즉시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1956년 11월 25일, 카스트로가 지휘하는 반군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를 타고 쿠바를 향해 떠날 때 게바라도 거기 함께 있었다. 정원 초과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7일 후 이들은 쿠바에 도착했지만 이내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단 열두 명만이 살아남았다.

 

무모한 첫 혁명은 실패했지만, 반군은 산골을 전전하며 군을 재건했고, 국내의 반정부 세력과 합류하여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게바라는 처음에는 군의관 역할을 맡았지만, 곧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맡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유력한 반군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 카스트로와 함께. 유력한 반군 지도자로 성장한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완수했다 .
▲ 쿠바혁명을 완수한 게바라를 기념해 쿠바의 화폐 ( 페소화 ) 에는 게바라의 초상이 실려 있다 .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고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쿠바혁명은 완성되었다. 투쟁과 헌신을 인정받은 게바라는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 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다. [관련 글 : 혁명의 완수-쿠바혁명군, 아바나에 진입]

 

혁명 이후 쿠바는 미국의 침공을 물리치지만, 미국으로부터 경제봉쇄를 당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소련을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협상하여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해 버렸다. 게바라는 소련의 조치에 실망하여 소련이 더는 사회주의 혁명 지원의 종주국이 아니라고 천명했다.

▲ 짐 피츠가 그린 초상화

쿠바혁명의 완수자로서 게바라는 쿠바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듯하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게바라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노동계급을 위한 대중혁명 지원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라틴 아메리카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그가 갈 곳은 혁명 투쟁의 전선이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혁명 지원을 위한 게릴라 요원을 훈련하다가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한 것이다.

 

혁명가, 볼리비아에서 지다

 

볼리비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게바라는 볼리비아혁명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으며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군과 전투 중 부상하여 적에게 생포된 것은 이듬해 10월이었다.

▲ 산타클라라의 게바라 동상. 주변에 게바라 기념관과 그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는 추모관이 있다.

게바라의 유해는 총살당한 지 30년 후인 1997년 6월 볼리비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는 같이 전사한 당시 그의 참모들과 함께 쿠바 산타클라라시의 기념관에 안치되었다.

 

사후에 게바라는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의사의 지위를 버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버리고 초연히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감동적 생애 때문이다.

 

체 게바라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 한 급진적인 혁명가다. 그러나 그는 그가 헌신했던 혁명과 실천이 아니라 시가를 입에 문 낭만적 이미지로 박제된 채 대중에게 소비되고 있다. 그것도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유행하는 상품으로 말이다.

▲ 혁명가 게바라는 대중에게는 낭만적 이미지로 소비된다.
▲ 사무실에서 게바라가 책을 읽고 있다.

게바라의 딸이 ‘아버지의 사진만을 대중에게 알리고 그가 가진 의미를 망각하게 하는 일련의 활동’을 지적한 것은 이 전도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미지로 소비되는 과정에서 낭만적 자유주의자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게바라는 순혈의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전선에서도 책을 읽을 만큼 독서광이었던 게바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망라해 읽었다. 쿠바혁명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자본>은 물론, 마르크스의 서간집까지 통독할 만큼 그는 마르크시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 기사 : 낭만으로 박제된 혁명가 체 게바라를 제대로 보자]

 

체 게바라는 <게릴라 전쟁>(1960), <혁명전쟁 여행>, <라틴 여행일기>(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원작), <체의 일기>, <먼 저편> 등의 저서도 남겼다. 그가 남긴 말과 글에서 뽑은 ‘어록’의 무게도 만만찮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에의 사랑, 정의에의 사랑, 진실에의 사랑, 사랑이 없는 진짜 혁명가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라고 갈파한 게바라는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본 진짜 혁명가다.

 

2016. 10.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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