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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 한글

by 낮달2018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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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돌 한글날을 맞으며

▲ 한글,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 563돌 한글날 큰 잔치 누리집
▲ 한글 공간전 포스터

내일은 훈민정음 반포 제563돌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2005년 우여곡절 끝에 국경일의 지위를 회복하였지만, 여전히 공휴일과는 거리가 먼 날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나는 태극기를 달고 양복을 입고 출근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문병란 시인의 ‘식민지의 국어 시간’을 읽어 줄 것이다.

 

조회를 열어 한글날 기념식을 치르는 것은 이제 아득한 전설이 되었다. 0교시 보충수업으로 하루를 열고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으로 하루를 닫는 2009년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여전히 바쁘고 고단하기만 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놀토’ 때문에 다음 주말로 밀린 ‘한글날 기념 백일장’이 그나마 이날을 기억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비록 ‘영어 몰입교육’ 소동으로 통치를 시작한 정권이긴 하지만, ‘한글날’은 국가적 행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563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글주간(2009.10.6~12)’을 정하고, ‘한글,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라는 주제로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조명하는 각종 행사와 대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한글,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 563돌 한글날 큰 잔치’ 누리집에 소개하고 있는 한글날 행사는 ‘뻑적지근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건 제주(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대구(우리말 겨루기대회), 전주(목판으로 만나는 한글 문화유산)에서 치르는 행사를 빼곤 모두 다 서울 일색이다.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김승옥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면서 ‘문화’의 집결지인 것이다.

 

하기야 각 시도는 물론 시군에서도 시민회관 따위의 공간에서 높으신 양반들이 모여서 ‘훈민정음 서문’쯤을 읽는 기념식은 어련히 치르겠는가. 그러나 그 행사는 정작 한글의 주인인 일반 대중들에게 멀기만 하다. 그 관제 행사 앞에 ‘박제’된 한글과 한글날은 길을 잃고 서 있는지 모른다.

 

이 나라에 넘치는 영어 열풍 앞에 한글은 외롭기만 하다. 그것은 어쩌다 요긴한 대목에 간신히 ‘어, 그래. 우리에겐 한글이 있었지.’로 기억될 뿐이다. 인도네시아 한 소수민족이 공용 문자로 한글을 선택했다는 소식 등으로 간간이 한글이 단순히 말글살이의 수단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 경상북도의 자치단체의 브랜드 슬로건. 영어 범벅이다 .

국적 잃은 지자체 상징 구호 ( 브랜드 슬로건 )

 

지방자치 시대가 되면서 경북과 도내 각 시군은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이른바 ‘브랜드 슬로건’ 제정에 잔뜩 열을 올리고 있는 듯하다. 경상북도가 일찌감치 ‘프라이드(Pride) 경북’을 높게 외치더니, ‘저스트(Just) 상주’, ‘굳 앤 디퍼런트(Good & Different) 영주’, ‘마린피아(Marinepia) 울진’, ‘핫(Hot) 영양’, ‘파인토피아(Pinetopia) 봉화’, ‘싱 어(Sing a) 청송’, ‘러닝(Running) 문경’ 등이 줄을 이었다.

 

그나마 문경과 봉화 등은 영자를 쓰지 않거나 한글을 나란히 썼지만, 경상북도, 상주와 영양 등은 따로 한글 표기조차 없다. 영주시는 ‘굳 앤 디퍼런트’라고 가장 어려운 영어를 썼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그걸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국제화 시대라 하니 굳이 영자를 꺼릴 일은 없고, 또 그게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있다. 마치 모국어처럼 그것을 쓰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라글자와 영어에 대한 전도된 의식이다. 국제화·세계화라는 패러다임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주류 언어, 주류 문자에 대한 짝사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작 외국어로 된 ‘지자체 상징 구호’나 ‘정책용어’의 사용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뜻밖에 그리 높지는 않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글에 대한 국민 인식’을 파악하고자 시행한 설문 조사에서 ‘불편’하다는 응답은 전체 평균 28.1%. 권역별로 보면, 서울지역이 36.2%, 인천 경기 지역이 35.1%로 가장 높았으며, 대구·경북(25.5%), 강원(25.0%), 광주·전라(19.9%)가 그 뒤를 이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며 농촌 지역인 경북지역에서의 비율은 전체보다 낮았다. 시골일수록 비율이 낮고, 대도시일수록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어로 된 정책용어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응답자도 대학원 재학·졸업자가 44.2%로 가장 높았으며, 대졸자(32.8%), 대학 재학(34.4%), 고졸(19.5%) 순이었다.

우리말로 된 상품명·회사명이 외국어로 된 상품명·회사명보다 더 신뢰가 간다고 답한 비율은 82.8%, 더 친밀감이 든다고 답한 비율은 92.0%로 나타났다. 영어나 국적 불명의 외국어로 칠갑을 하는 상품 이름이 기실은 매출 제고와는 상반되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사랑’,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한글날 공휴일 지정되어야

 

이 조사에서는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단어로 생각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체 응답자 1,500명 중 21.9%인 329명이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단어로 선택한 것이다. 사랑 다음으로 아름다운 우리말로 ‘미리내(5.1%)’, ‘우리, 서로(3.7%)’, ‘엄마, 어머니(2.9%)’, ‘행복, 기쁨(2.9%)’ 순으로 제시되었다. ‘사랑’은 가장 좋아하는 우리말 단어, 어린 아기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는 단어에도 순위에 들었다고 한다.

 

한글날의 공휴일 재지정과 관련해서는 응답자의 68.8%가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찬성했다. 찬성 이유로는 찬성 응답자 68.8%가 공휴일 지정을 통해 한글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고 한다. 우리 문자의 의미보다 ‘경제 논리’에 더 경도된 집권세력에 비추어 보면 한글날의 공휴일 재지정은 멀고 먼 일인 듯하다.

 

여러 행사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글을 낳은 옛터에서 ‘집현전 한글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경복궁 수정전에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글을 빛낸 사람들’로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에 대해 다룬다.

 

특히 한글의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 꼽히지만, 북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연구나 업적 평가 등에서 소외되어왔던 김두봉(1889~1961)과 이극로(1893~1978)에 대해서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한글학자 김두봉과 이극로

▲ 한글학자 김두봉(왼쪽)과 이극로

해방 이후 김두봉과 최현배는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언어정책의 뼈대를 세우고 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다. 이들은 한글 전용을 주장했던 주시경의 제자로 주시경의 문법 이론과 언어 민족주의를 같이 배웠다. 그래서 남북 모두 한글 쓰기와 가로쓰기, 형태주의에 입각한 맞춤법 등 언어정책의 기본 골격이 같았고, 한자의 세계를 한글의 세계로 바꾸는 ‘언어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사전 편찬,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에 크게 이바지한 이다. 그는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 운동 사업’을 주관하는 등 북한에서 활동한 까닭에 지난 60년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에 대한 재조명이 우리 국어학사를 깁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글주간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다. ‘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라는 이번 한글주간의 주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말글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와 그 삶, 그 가치와 지향을 담아내는 매재(媒材)인 까닭이다. 아이들과 함께 나눌 ‘식민지의 국어 시간’을 읽으며 563돌 한글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2009. 10.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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