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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나는 ‘즐거운 주말’이 되고 싶지 않다

by 낮달2018 2019.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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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 살이 이야기 - 가겨찻집를 시작하면서

 

새로 방 한 칸을 들인다. 내 블로그는 네 칸짜리 ‘띠집’인데 여기 또 한 칸을 들이면 ‘누옥(陋屋)’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세 칸을 넘으면 이미 ‘수간 모옥(數間茅屋)’에 넘치니 꼼짝없이 ‘띠집’[모옥(茅屋)]을 졸업해야 할 듯도 하다.

 

새로 들이는 칸의 이름은 ‘가겨 찻집’이다. 한겨레 18°의 고정 꼭지였던 ‘말글 찻집’을 본뜬 이름이다. 워낙 그 꼭지 이름이 가진 울림이 좋아서 뒤통수가 뻐근해지는 걸 감수하고 본떠서 쓴다. ‘가겨’는 물론 ‘가갸거겨’를 줄인 것. 나는 여기다 우리 말글살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으려 한다.

 

오랜 망설임과 주저가 있었다. 물론 망설임의 까닭도 여럿이다. 아이들에게 겨레말을 가르쳐 온 지 스무 해가 넘었으나 여전히 우리 말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썩 자신이 서지 않는 것이 첫째 이유요, 자유로운 글쓰기 마당인 오블(오마이뉴스 블로그)에까지 와서 고리타분 곰팡내 나는 접장 냄새를 풍겨야 하느냐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어디서나 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이 직업병은 자칫하면 도저한 자유와 일탈의 글쓰기를 즐기는 오블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염려도 또 하나의 이유다. 오블은 다른 포털의 블로그에 비기면 비교적 정확하게 우리말을 쓰는 동네지만 가끔 마실을 나가보면 붉은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에 손이 근질근질해지는 경우가 없잖아 있다.

 

나는 말글 생활에 관한 한 꽤 보수적인 편이다. 언중(言衆)이 말글의 주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뜻만 통하면 됐지, 뭐’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나는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깊이 신봉한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자기 세계를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문자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운용이 글이니,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보는 건 전혀 무리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이 ‘생각의 집’에 쓰이는 들보와 도리는 정확하게 쓰는 게 좋을 터이고 일기가 아닌 한,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 게 필요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끔 일상에서 그건 ‘틀린 말’이라고 말해 주면,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고 대답하는 이들이 뜻밖에 많다. 물론이다. 그들이 말하는 건 ‘의사소통’에 별문제가 없다는 얘긴데, 단순한 ‘소통’의 문제라면 반 쪼가리 우리말을 쓰는 외국인과도 가능하지 않은가.

 

제대로 쓴 말로써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듯, 바른 글을 쓰는 것은 자아와 세계를 표현하고 확대해 가는 바탕이다. 제대로 쓰는 글을 통하여 우리 말글이 어떤 언어나 문자와도 비길 수 없는 깊은 울림과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초임 시절 이래로 늘 내게 편지 쓰기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읽는 것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아니라, 어법에 어긋난 문장이 아니라, 너희들이 쓴 편지고, 거기 담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이다. 그러나 바르게 쓰기 위해 조금 긴장을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가겨찻집의 우리 말글 이야기는 아주 일반적인 것만을 다루고자 한다. 특별한 순서도 없고, 특별히 전문적인 설명 따위로 오블의 강호제현들을 헛갈리게 할 생각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말글을 잘못 쓰고 있는 이들을 꾸짖을 생각 따위는 물론 없다. 그건 잘못이라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문제는 아니니까.

 

그러나 최소한 자신이 쓰는 우리 말글에 잘못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의식할 수 있다면 그의 언어생활은 다소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수는 있겠다. 제대로 된 말글살이는 겨레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지키고 여미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데 글쎄, 오블의 이웃들은 이런 생각에 얼마나 동의해 주실지 모르겠다.


나는 ‘즐거운 주말’이 되고 싶지 않다

 

한 대여섯 해 전의 일이다. 공중파 방송의 마감 뉴스를 마치면서 중년의 앵커는 전국의 시청자를 향해 멋있고 세련된 마지막 멘트를 이렇게 날린다.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물론 지금은 그런 멋있는 멘트를 하는 앵커는 없다. 이제 그들은 얌전하게 이렇게 말한다.

 

“시청자 여러분,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뭐가 달라졌느냐고 반문한다면 좀 둔한 사람이다. 그러면 나는 두 개의 인사말에서 마지막 서술어만을 떼어 내 묻겠다. ‘되십시오’와 ‘보내십시오’의 주체가 누구인가 말이다. 당연히 시청자가 주체가 될 터이다. 그럼 첫 번째 인사에서 시청자는 꼼짝없이 ‘좋은 밤’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 인사에서는 ‘편안한 밤’을 ‘보내야’ 한다.

 

눈치챘듯이 시청자들은 편안한 밤을 보낼 수는 있지만, ‘좋은 밤’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사람이니 마법에 걸리지 않는 한, 시간 개념인 ‘밤’이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우리는 백화점이나 할인점에서는 ‘쇼핑’이 되고 극장이나 영화관에선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인근의 어느 여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다. 전화 예절을 강조하면서 ‘좋은 하루 되십시오’로 응대하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발언에 그게 ‘틀린 말’이라고 주의를 환기하자, 어느 후배 여교사(그것도 같은 국어과의!)가 와서 내게 항의하듯 되물었다.

 

“그게 왜 틀린 말인데요, 모두가 쓰는 말이잖아요?”

모두가 쓰는 말’이란 곧 다수의 언중이 승인한 말이라는 뜻이니 때에 따라 표준말의 범주로 편입될 수는 있다. 비표준어 ‘상추’와 ‘멍게’가 ‘상치’ 대신, ‘우렁쉥이’와 함께 표준어가 된 게 그 좋은 예다. 그러나 다수 언중이 쓰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말글의 근간에 어긋나는 형식으로 쓰이고 있다면 이는 바로잡을 문제이지 표준어로 편입될 수는 없다.

 

요즘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젊은 연예인들은 가끔 ‘꽃을[꼬츨], 꽃이[꼬치]’를 ‘[꼬슬], [꼬시]’와 같이 발음하기도 하는데 이를 따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발음한다고 해서 그게 표준발음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뻔하다. 만약 그걸 허용해 버린다면 우리 말 발음의 근간이 뒤흔들려 버리기 때문이다.

 

위에서 든 ‘○○ 되다’의 문장도 마찬가지다. ‘되다’는 원래 혼자서는 서술어로 쓰일 수 없어서 앞에 기워주는 말, 즉 ‘보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이다. 이를테면

 

철수는 중학생이 되었다.

 

에서 ‘중학생이’라는 말(보어)의 도움을 받아 서술어로 쓰이는 말이다. 이 보어는 반드시 주어인 ‘철수’와 같은 자격으로 쓰인다. “바다가 뽕밭이 되었다.”에서 ‘바다=뽕밭’이라는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밤 되십시오”를 분석해 보자.

 

이건 좀 머리가 아픈 문제다. 우선 주어가 없다. 생략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밤’을 주어로 보면 ‘오늘 밤=좋은 밤’까지는 좋다. 문제는 ‘되십시오’인데, 밤에 그걸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또 ‘당신’을 주어로 봐도 ‘당신=좋은 밤’이 성립되지 않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 문장의 속뜻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나는) 오늘 밤이 (당신에게)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 밤이 (당신에게) 좋은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볼 것 없이 ‘바랍니다’와 ‘좋겠습니다’의 주체는 ‘나’이니 위 문장은 흠이 없다. 이런 문장을 다시 “좋은 밤 되십시오”로 줄이는 것은 현재 우리말의 어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게 앞에서 말한 마감 뉴스의 앵커들이 마지막 멘트를 고친 이유다. 아이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 교사들은 주말 인사를 “주말 잘 보내세요”라고 하거나, “주말 푹 쉬세요”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 되다’로 끝나면서도 어법에 맞는 문장은 있다. “좋은 가수 되세요”나, “훌륭한 작가 되세요” 따위의 인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문장이다. ‘- 되다’로 끝나는 인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부~자 되세요”다.

 

 

2007. 7.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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