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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길, ‘순정(純精)’의 단풍을 잊지 못하리

by 낮달2018 201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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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팔공산 단풍길 순례

▲ 파계사에서부터 수태골을 지나 동화사에 이르는 16.3㎞에 걸친 팔공산 순환도로는 '단풍길'이다.

가을에 나뭇잎이 붉거나 노랗게 물드는 현상, 단풍(丹楓)은 가을의 관습적 표지다. 사람들은 ‘꽃소식[화신(花信)]’으로 오는 봄의 추이를 짚듯 첫 단풍의 시기로 가을을 가늠하는 것이다. 새봄의 꽃소식은 북으로 올라오지만, 단풍은 온 산을 발갛게 물들이며 남으로 내려온다.

 

단풍은 나뭇잎이 더는 활동하지 않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잎이 활동을 멈추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자가분해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안토시아닌이라는 화학물질이 단풍의 빛깔을 결정한다. 안토시아닌이 생성되는 종은 붉은색 또는 갈색 계열의 단풍이, 안토시아닌이 생성되지 않는 종은 엽록소의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잎 자체에 들어 있는 노란빛 색소들이 나타나게 되어 노란 단풍이 드는 것이다.

 

보통 하루 최저 기온이 영상 5도 이하로 떨어지면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기온의 변화가 나뭇잎이 활동을 접게 하는 셈이다. 단풍은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면서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크고 가을 일조량이 많을수록 색깔이 곱다고 한다.

▲ 보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선 단풍나무는 터널을 이룬다.
▲ 붉은 단풍 터널
▲ 팔공산 단풍길은 평일은 그나마 한적하지만, 이 길은 주말이면 차 댈 데 없을 만큼 붐빈다.

더위가 거짓말처럼 물러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시나브로 물드는 나무와 숲, 산과 들의 풍경은 표변하기 시작한다.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은 다가오는 겨울을 쓸쓸하게 환기해 주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주 그 아름답고도 슬픈 빛깔에 마음을 빼앗긴다.

 

숱한 시인들이 단풍을 노래한 까닭이 달리 있었겠는가. 어떤 시인은 단풍을 가리켜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라며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상국)이라 노래했다. 또 어떤 이는 단풍이 불타는 산을 일러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가쁜 숨 몰아쉬는 모습’이라고, ‘다 못 타는 이 여자의/슬픔’(나태주)이라고 노래했다.

 

오세영 시인은 단풍 숲속을 걷는 화자에게 전하는 ‘단풍의 말’을 노래한다.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의 단풍이 전하는 말씀을. 그러나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인간은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고, 산은 침묵 끝에 ‘천자만홍(千紫萬紅) 터뜨리는’데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철딱서니’다.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 오세영, ‘단풍 숲속을 가며’ 전문

 

대구 지역에서 통일운동의 불씨를 이어온 민족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회의 의장 류근삼 시인은 단풍에서 반쪽 분단의 조국을 본다. 오매불망 분단의 극복, 통일을 꿈꾸는 노시인은 남북을 넘나드는 단풍의 물결을 보면서 ‘분계선 철조망/녹슬거나 말거나/삼천리강산에 가을 물든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개마고원에 단풍 물들면
노고단에서도 함께 물든다
분계선 철조망
녹슬거나 말거나
삼천리강산에 가을 물든다
   - 류근삼, ‘단풍’ 전문

 

해마다 단풍 타령을 해댔지만 정작 나는 제대로 된 단풍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어느 해는 비가 잦아서 또 어느 해는 더위가 길어지는 바람에 단풍이 시원찮았다. 단풍이 한창이라는 풍문을 따라가 보면 어느새 단풍은 자리를 털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곤 했다. 대체로 내 단풍 찾기는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고는 했다.

 

지난 주말엔 아내와 함께 황악산 직지사를 찾았다. 나는 직지사를 ‘숲을 품고 있는 절집’으로 부른다. 이 유서 깊은 절집은 경내 곳곳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숲이 적지 않은 전각과 잘 어우러진 사찰이기 때문이다. 6년 만에 찾은 산사에도 깊숙이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곳곳에 단풍이 불타고 있었지만, 절정이라고 부르기엔 어쩐지 아쉬웠다.

 

“아, 아깝다. 한 주일쯤 뒤면 절정이겠는데…….”
“아서요. 한 주일 뒤면 우수수 잎이 떨어지고 있을걸.”

 

맞다. 시방은 날이 덜 찼지만 한 주 뒤면 나무들은 잎을 벗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왔다. 그런데 교회에서 팔공산 쪽으로 소풍을 다녀온 아내가 다시 가라앉으려는 속에 불을 질렀다.

 

“단풍은 말이우. 동화사 가는 길에 절정이던걸. 괜히 직지사 가서 헛물만 켰지.”

▲ 단풍은 홍, 자, 청, 황 등 여러 빛깔이 있지만 단연 빼어난 것은 역시 홍(紅)이다.
▲ 팔공산 순환도로는 한적한 숲길이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주목받는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 팔공산 순환도로의 막바지는 벚나무길이다. 일찍 잎이 지는 이 나무의 빛깔도 가을의 정경을 돕는다.
▲ 팔공산의 단풍은 크고 작은 전쟁터이기도 했던 역사의 희생을 다만 선홍의 빛깔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 시인은 단풍을 보며 통일의 열망을 노래했지만, 사람들은 단풍이 전하는 말은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동명 송림사 쪽에서 동화사로 넘어가는 순환도로 가로수길이 아름답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온 바다. 그러나 주말이면 차 댈 데가 없을 만큼 사람이 꾄다는 곳으로 선뜻 길을 나서기는 쉽지 않다. 마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8일 짬이 났다. 밥그릇 덕분에 감독관 직에서 면제된 것이다.

 

송림사를 지나 파계사부터 수태골을 지나 동화사에 이르는 16.3㎞에 걸친 팔공산 순환도로는 ‘단풍길’이다. 구부러지고 휘돌아가는 이 숲길의 양쪽엔 단풍나무 가로수의 행렬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잎 떨어진 벚나무 단풍도 끼어든다.

 

단풍의 ‘단(丹)’은 ‘붉다’는 뜻이다. 노란 단풍이 있지만 역시 단풍의 본령은 ‘홍(紅)’인 것이다. 청과 녹과 황, 등 가운데 홍은 말 그대로 ‘발군(拔群)’이다. 나머지 빛깔은 다만 그 홍의 영광을 받쳐주는 조연이다. 정비석이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 ‘만산의 색소는 홍!’이라고 탄성을 지른 이유는 분명하다.

 

조반 후 단장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 정비석, ‘산정무한’ 중에서

평일이었지만 단풍길에는 차를 길가에 대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넘치는 탄성과 유쾌한 웃음소리가 한적한 숲길의 고요를 깨뜨리곤 했다. 단풍길에 이어지는 단풍은 기왕에 우리가 만나는 칙칙하고 무거운 빛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선홍(鮮紅)! 단풍잎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단풍나무는 가끔 보도를 사이에 두고 두 줄로 나란히 이어졌다. 그것은 마치 붉고 푸른 잎으로 이루어진 터널 같았다. 옥에 티는 햇살이었다. 해는 가끔 얼굴을 내밀었지만, 햇살은 투명하지 않았다. 단풍은 무심하게, 뿌연 이내 같은 게 낀 듯한 하오의 햇살을 견디고 있었다.

 

나는 내장산을, 그 유명한 내장사의 단풍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글쎄, 팔공산 순환도로 단풍길의 단풍은 내장산의 그것에 비기면 ‘아기단풍’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팔공산에서 만난 이 ‘순정(純精)’의 단풍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대구의 진산(鎭山)이라는 팔공산은 멀리는 후삼국 시대 이른바 ‘공산전투’의 현장이었고, 가까이는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느라 시신을 쌓아 올렸다는 곳이다. 팔공산의 단풍은 그 역사의 희생을 다만 선홍의 빛깔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팔공산의 단풍을 보며 나는 개마고원은커녕 구월산이나 장수산의 단풍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무심히 왔다가 풍경이나 즐겨 사진기에 담고 떠나는 여느 행락객처럼 나는 단풍이 전하는 말은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은 채 팔공산 자락을 떠났다.

 

 

2012. 11. 13. 낮달

 

 

그 숲길, '순정'의 단풍을 잊지 못하리

[여행] 팔공산 단풍길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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