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를 찾아서 ] ①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고산정(孤山亭)’
안동의 정자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물론 풍광 좋은 산기슭과 호젓한 내 곁에 세워진 정자들은 양반들의 ‘부르주아(bourgeois)’로서의 삶의 한 표지다. 고단한 삶을 부지하기에 힘겨워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던 피지배 민중들에 비기면 그들은 자취는 도처에 흩어져 있다.
그게 어찌 안동 지방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유독 안동 지역에는 그런 누정(樓亭)이 많다. 지역의 명승과 유적을 더듬다 만났던 <안동의 정자>를 다시 찾아본다. 어차피 거기 고인 것은 박제된 시간의 흔적일 뿐이다. 누정은 남았지만, 이른바 ‘누정 문화’는 이미 사라졌으니 말이다.
따라서 가능하면 한갓진 회고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 한때는 지역 문벌의 위세와 시인묵객들의 음풍농월의 무대였지만 풍상에 지친 이 오래된 정자와 누각들은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을 뿐, 찾는 이도 많지 않다. 찾는 이들이라 해도 스쳐가는 관광객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자와 거기를 무대로 살았던 사람들과 역사, 그 시대를 더듬어 보는 일도 흥미로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흥미’다. 답사 길마다 만나는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도 구미를 당긴다. 곧 겨울이 오면 쓸쓸한 정경이 되고 말겠지만 말이다.
내 정자 기행의 첫 대상이 ‘고산정(孤山亭)’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일전에 ‘안동지역의 시가기행’ 기사를 쓴다고 분강촌에 가는 길에 강 건너 고산정 사진을 몇 장 찍어왔다. 강 이쪽에서 찍은 사진이니 멀리 잡은 사진들이다. 시간이 맞았던가. 잔뜩 준 강물에 정자가 떠 있었다. 집에 와서 들여다보니 그 그림이 너무 아련했다. 몇 해 전 봄에 찍은 사진 생각나서 파일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고산정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께가 아니었나 싶다. 예천에 살 때였는데 고건축에 푹 빠져 있던 친구의 안동 인근 정자 순례 길에 동행한 것이다. 겨울이었고, 정자 앞 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 얼음을 지치며 강을 건넜는데 그 때만 해도 정자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던 것 같다. 친구가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을 때, 나는 잔뜩 퇴락한 정자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고산정은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의 유적지로 들어가는 가송협, 청량산 기슭에 앉은 조선시대의 정자다. 1992년에 경북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 금난수가 지었다. 원래 이름은 일동정사(日東精舍)였다.
금난수(琴蘭秀, 1530∼1604)는 본관은 봉화,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정자 이름은 주인의 호를 딴 모양이다. 고산이라면 단박에 우리는 윤선도를 떠올리는데, ‘외로운 뫼’라는 뜻의 고산은 조선조의 선비라면 누구나 즐겨 썼던 이름일 수밖에 없다.
성재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서른한 살 때 사마시에 합격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다. 임란이 일어나자 노모 봉양을 이유로 고향에 은거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봉화현감에 부임했을 때 마을의 향부로(鄕父老)들을 모셔 놓고 향약을 시행하여 한 고을이 저절로 교화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고산정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학이 서식하기도 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 성재를 아꼈던 퇴계는 이 정자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 한다. 퇴계는 이 정자에서 지은 시 <서고산벽(書孤山壁)>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日洞主人琴氏子(일동주인금씨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隔水呼問今在否(격수호간금재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聞(경부휘수어불문)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愴望雲山獨坐久(창망운산독좌구)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성재를 찾으러 온 퇴계는 강 건너 제자를 소리쳐 부른다. 그러나 밭 갈던 농부는 알아듣지 못한 듯 손을 내젓는다. 퇴계는 하는 수 없이 멀리 산을 건너다보며 제자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주 쉽게 쓴 시다. 그러나 그 여백에 고인 것은 유유자적한 은사의 여유와 탈속의 기품이다.
성재인들 고산정을 노래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시는 청량산 암벽 아래 지은 고산정에서 책을 읽는 자신에게 묻는 형식을 빌렸다. 강가의 정자에서 옛 책을 읽는 공부가 어떠한지, 책속에서 참맛을 느끼는지 등을 묻는다.
遙憐絶壁千尋下(요련절벽천심하) 천 길 벼랑이 있고 그 아래 사는 그대는 아름답게 여기니
茅屋臨流讀古書(모옥임류독고서) 강가의 띠집에서 옛 책을 읽는다지.
靜裏工夫能會未(정리공부능회미) 조용한 가운데 공부는 잘되고 있는지
書中眞味問如何(서중진미문여하) 책 가운데서 느끼는 참맛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정자가 발달한 배경을 사계절 뚜렷한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자연을 사랑하는 민족성에서 찾는 건 거의 정설이다. 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들과 강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강조된 구조물’이 바로 정자인 것이다.
이 ‘자연합일’의 전통적 건축관이 적극 반영된 결과 정자의 입지는 자연스레 선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는 일상생활 주변으로 정자가 옮겨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산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선택한 대표적 정자로 보인다.
퇴계가 사랑하여 스스로 ‘나의 산[오산(吾山)]이라 부른 청량산 자락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 옆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산정은 이른바 ’배산임수‘의 전형적 정자다. 수량이 줄기는 했지만 발밑을 적시며 강이 흐른다. 강가에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선 소나무 한 그루가 오히려 이 들뜬 듯한 풍경의 중심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맞은편에서 강 건너 뵈는 고산정은 그냥 그렇고 그런 정자로 보인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고산정 가까이 갈수록 이 정자의 입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 건너 고산정으로 가는 강변길은 억새밭이었다. 정자 바로 밑에다 차를 대고 얕은 언덕에 오르자 펼쳐진 경치는 놀랍다.
성재선생 연보의, “푸른 절벽을 끼고 깊은 못을 굽어보는데, 경치가 빼어나고 그윽하여 선성(宣城, 예안의 옛 이름)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고산정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비취빛이다. 일부러 맞춘 것같이 건너편 독산(獨山)도 가파른 암벽이다. 물은 고인 듯 흘러간다. 정자 주변에 들어찬, 잎을 떨군 활엽수들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수면 저편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역시 이런 풍경에서 정취를 더하는 것은 소나무다. 정자 발밑에 강을 향해 쓰러질 듯 서 있는 소나무의 짙은 껍질빛과 푸른 잎이 비취빛 강물과 어우러져 자아내는 느낌도 차분하다. 굳이 정자가 아니라도 언덕바지에 내려다보는 강과 건너편 독산, 좌우로 펼쳐져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호연지기가 넘칠 일이다.
고산정은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글쎄, 눈대중으로 봐도 작지 않은 건물이다. 10년도 전에 왔을 때 잔뜩 낡아 있었는데 그 동안 실하게 보수했는지 예전의 퇴락한 느낌은 찾을 수 없다. 가운데 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앞과 옆에 좁은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그러나 관리 때문인지 지금은 마루 쪽도 모두 문으로 막아 놓았다. 당연히 정자에 앉아서 주변 풍광을 즐기는 건 불가능하다. 정자에 남아 있다는 퇴계와 성재의 시도 물론 볼 수 없다. 가을가뭄이 심해 잔뜩 줄어들긴 했어도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의 흐름은 유장하다.
정자를 막 떠나려는데 대여섯 명의 답사객이 들이닥쳤다. 인근의 고등학교 교사들이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저녁 햇살이 강물에서 반짝였다. 저 멀리 산모롱이를 돌면 분강촌, 농암 이현보의 유적을 한데 모은 마을이다. 어쩐지 떠나기 싫은 마을, 봄이 되면 다시 이 정자와 저 마을을 찾아야지. 강을 완전히 건넜을 때야, 정자 아래 백사장에서 사진을 찍을 걸, 나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2008. 10. 25. 낮달
우물마루
「명사」『건설』
마룻귀틀을 짜서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 ≒귀틀마루.
<표준국어대사전>
우물마루는 한옥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마루형식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장귀틀을 건너지르고 장귀틀 사이에는 동귀틀을 일정한 간격으로 건너지른 다음 동귀틀 사이를 마루청판을 끼워 마감하는 마루형식이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건조 수축이 심한 한국적인 기후에 적합한 마루유형이다. 나무가 건조되어 마루청판 사이가 벌어지면 마루를 다 뜯지 않아도 한 장 한 장 촘촘히 밀어 넣고 마지막장을 한 장 더 보강해 넣으면 되는 효율적인 마루 형식이다.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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