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왕산 허위와 박정희 전 대통령를 낳은 ‘경북 구미’
‘구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는 상모동에서 태어나 이 고장에 국가산업단지를 유치해 오늘의 ‘구미시’를 만든 장본인이다. 당연히 그의 자취는 곳곳에 남아 있다. 상모동에 그의 생가가 공원화되어 있고, 생가 앞을 지나는 왕복 4차로에 ‘박정희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미, 왕산 허위와 박정희 전 대통령
그보다 앞서 2002년에는 그 전해에 개관한 구미실내체육관의 이름을 ‘박정희체육관’으로 변경했다. 박정희 시대의 ‘영욕과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결정이라는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는 지역 정서에 묻혀 버렸다.
예의 ‘박정희로’에 2009년 3월 박정희·육영수 부처의 이름을 딴 ‘구미정수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름이 낯익다 싶으면 틀림없다. ‘정수’는 요즘 한창 뉴스에 오르내리는 ‘정수장학회’의 그 ‘정수’다. 박정희로 인근에는 당연히 ‘새마을로’도 있다.
이 지역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물 반이 선산 땅에서 나왔다”고 한 고장이다. 당연히 지역에서 기려지는 인물이 박정희만일 수는 없다. 구미 시내의 거리 이름으로 기려지는 인물은 더 있다. ‘야은로’와 ‘왕산로’로 각각 기려지고 있는 길재와 허위다.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는 여말의 성리학자로 끝내 조선조에 출사하지 않은 충절의 선비다. 길재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 삼은’으로 불린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1854~1908)는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한 한 말의 의병장이다. 그는 박정희의 자취가 드센 이 지역에서 여러 면에서 박정희와 견주어지는 인물이다. 비록 생존기는 겹치지 않으나 두 사람의 삶을 특징지어 주는 것은 ‘일본’이라는 변수다.
왕산이 일제의 침략에 의병으로 맞서 목숨을 바친 우국지사라면, 일제 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육사를 나와 예비역 일본군 소위가 되었던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 일본명)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이다.
이 지역에서 왕산을 기리는 형식도 비슷하다. 왕산의 생가가 있는 임은동에 그의 아호를 딴 거리 ‘왕산로’가 있고, 또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왕산로는 서울에도 있는데 이는 왕산이 13도 창의군 참모장이 되어서 진군했던 곳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왕산기념관 아래에는 2007년 3월에 개교한 ‘왕산초등학교’도 있다.
상모동에 단장된 박정희의 생가가 숭배자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왕산의 생가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터에 조형물 몇 개로 왕산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생가터를 굽어보고 있는 임은동 앞산에 세운 왕산기념관이 그나마 1세기 이전의 역사를 환기해 줄 뿐이다.
박정희의 삶과 시대는 불과 30년 전의 역사, 현대사의 그리 멀지 않은 한 장면이다. 그러나 왕산의 시대는 일백 년 저편, 일제 강점기 이전의 아스라한 근대사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그것이 현재형의 역사라면 왕산의 그것은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이야기에 그칠 뿐이다.
왕산의 항거에도 이 땅에 이어진 세월은 망국과 통한의 역사, 무려 서른다섯 해를 넘는 질곡의 시기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치세는 민주주의가 압살된 18년 독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국 근대화’의 시기, ‘보릿고개’를 넘기게 한 이른바 ‘민족중흥’의 시대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타관살이를 마감하고 구미로 들어온 지난 1월 말에 나는 아내와 함께 왕산기념관을 찾았었다. 일찍이 안동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더듬어 보는 과정에서 나는 왕산을 만난 바 있었다. 임정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부(이병화의 처) 허은 여사가 왕산의 재종손녀였던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의 체취가 남은 유품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 대신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사 등의 보조 자료가 비교적 잘 전시되어 있었다. 1세기 이전의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이 갖는 한계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박정희’로 상징되는 이 공업도시의 한쪽에 그 이전의 역사이긴 하지만, 항일 근대사를 오롯이 기억하게 한 것만으로 2009년도에 세운 이 기념관의 의의는 각별해 보였다. 영상 추모관과 시청각 교육장을 갖춘 기념관 2층은 열람실이었다. 2만 권의 장서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열람실에는 초등학생 몇 명이 눈에 띌 뿐이었다.
왕산 허위, ‘을미의병’부터 ‘서울진격작전’까지
왕산의 항일은 창의(倡義)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1896년, 1년 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전국에서 창의가 이어지던 때의 이른바 ‘을미의병’이었다. 인근 유생들과 김천에 수백의 장정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니 이때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그가 일시 벼슬에 나아갔다가 다시 창의한 것은 1904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 위임조약 승인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왕산은 이상천, 박규병 등의 관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排日) 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숴 칼을 만들고(…)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1905년 왕산은 한일의정서(1904)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최익현과 함께 넉 달간 구금되었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왕산은 경기도 연천에서 김태묵, 왕회종 등과 함께 다시 기병(起兵)한다. 왕산의 의병은 포천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고, 철원읍 점령을 시도했다. 이 같은 무장투쟁 이외에도 왕산은 <대한매일신보>에 격문을 실어 일제 침략을 고발하기도 했다.
허위의 부대는 날로 세력이 증가하여, 1907년 12월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허위의 의병은 일제에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왕산이 주도한 의병 투쟁의 백미라 할 ‘서울 진격작전’이 시도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07년 11월, 전국 13도 의병장들이 통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서 경기도 일대에 집결했다. 당시 병력의 숫자는 48진(陣), 허위의 2천을 비롯하여 강원도 민긍호(2천), 경상도 이인영(1천), 충청도 이강년(500), 황해도의 권중희(500)등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회의를 열어 13도 창의대진소를 성립시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왕산은 각 의진(義陣) 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선발대 300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격하였다. 이때가 1908년 1월 말이다.
그러나 이 야심만만한 서울 진공작전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본진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입어 문경으로 귀향하면서 지휘체계에 문제가 생긴데다가 일본군의 방어가 워낙 완강했기 때문이다. 의병연합군은 적의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넘지 못하고 패퇴한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작전을 통해 각지의 의병부대가 하나가 되어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이후 각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항전을 벌이게 되는데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벌였다. 휘하에 있던 쟁쟁한 의병장들은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연파하였다. 의병부대들은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마비시키고 관공서를 습격하고, 부일 매국분자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의 반출은 왕산의 통제로 중단되니, 지역은 왕산 의병의 군정 아래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왕산은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 조달할 때는 군표를 발행하여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여 주민들의 두터운 지원을 얻었다.
1908년 4월, 왕산은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등의 의병장과 연명으로 전 민족이 의병대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5월에는 통감부에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이권 침탈의 중지’ 등 30여 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서대문 감옥에서 처형된 최초의 사형수
그러나 왕산은 1908년 6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이루어진 일본 재판관과 왕산의 심문과 답변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의병을 일으키게 한 이는 누구며, 그 대장이 누구냐?”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등박문이요, 그 대장은 나다.”
“어찌해 이등박문이라 하는가?”“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그가 원흉이 아니냐?”
1908년 10월 21일, 왕산 허위는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향년 55세.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처형당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기에는 왕산을 비롯한 숱한 의병장들과 의병들의 죽음으로도 역부족이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채 되지 않아 나라는 명운을 다한 것이다.
왕산이 순국한 뒤 네 명의 아들과 가족 모두가 일본 경찰의 박해를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투쟁은 잊혔다. 망국민의 설움을 견디며 이국땅에서 고단한 삶을 꾸려온 왕산의 후손이 고국 땅을 디딘 것은 지난 2006년이다. 80평생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로 떠돌아야 했던 왕산의 친손녀 허로자가 바로 그이다.
허로자는 왕산의 순국 후 연해주로 피신한 왕산의 아들 허형(일명 허학·1887~1940)이 망명지에서 낳은 딸이다. 허형(애국장·1991)은 독립의군부 사건을 주도했으며 중부인 허겸을 따라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이다. 옛 소련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뒤 허형은 1940년 현지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허로자는 열네 살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다시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옮겨 다니며 지금까지 미혼으로 살아온 허씨는 여든이 돼서야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영주 귀국하여 지난해 1월 국적을 회복하고 10월에는 보훈처가 제공한 서울 구로의 국민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후손들의 ‘이산’과 ‘인생유전’ 한 세기
허씨가 귀화 신청을 하고 국적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3년이었다. 비록 임대지만 아파트를 받기까지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며 서울 낙원상가 여인숙에서 보낸 시간도 만만찮다. 할머니가 독립유공자로서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조부가 목숨을 걸고 지킨 대한민국과 ‘투쟁 아닌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은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낳은 엄청난 역설이다.
2006년 7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살다 취업비자로 입국해 일하고 있던 왕산의 또 다른 손자 허 게오르기(62)·블라드슬라브(55)씨 형제가 특별 귀화했다. 이들은 왕산의 넷째아들 허국의 아들로 역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려인’이었다. 망국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조국 땅을 밟는데 무려 한 세기가 걸린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가난과 소외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이 대대손손 기득권의 성채를 쌓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던 무력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낳은 전도된 현실이다.
이는 왕산의 후예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망명의 길을 떠난 이 망국의 백성을 역사는 때로는 무적자로, 때로는 다른 나라의 적(籍)으로 살게 했다. 가난으로 고단했던 삶보다 이들에게는 조국에서도 잊힌 존재라는 것이 더 아프고 괴로웠으리라.
임은동에서 경부선 철길을 건너면 상모동이다. 박정희가 거기서 태어난 것은 왕산이 간 지 9년 뒤(1917)다. 보통학교 훈도였던 청년 박정희는 ‘칼 찬 군인’이 되고 싶어 만주로 가 혈서를 쓰는 등의 곡절 끝에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국 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다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 청년 장교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 18년간의 절대권력을 누렸고 마침내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갔다. 아내를 총격에 의해 잃은 지 4년 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30년, 그는 여전히 이 땅의 지도자로 살아 있다. 집안에 박정희·육영수 부처의 사진액자를 걸어놓고 지난 연대를 반추하고 있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유족들도 잊히지 않았다.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했던 그의 맏딸은 현재 가장 유력한 ‘미래권력’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시민 가운데 2, 30대의 비율이 63%를 넘는 젊은 도시라고 떠벌리지만, 지역 출신의 독재권력에 대한 향수와 숭앙의 열기가 일상으로 존재하는 곳이 구미다. ‘국가관’이 정국의 ‘화두’가 되어 버린 2012년 6월, 새삼 그의 망령을 불러내는 지역 정서는 회고 조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그게 바로 역사일 뿐’이라고?
경북도 내 자치단체들이 연말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당 건립 등 기념사업을 잇달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란다. 문경시는 박정희가 교사로 있던 초가 하숙집을 사당과 기념관을 갖춘 공원으로 꾸몄고, 울릉군도 박정희가 울릉도 방문 당시 숙박했던 군수 관사를 정비해 기념관으로 만든단다.
구미시도 오는 9월 시내 상모동 박 전 대통령 생가 옆에 ‘박정희 대통령 홍보관’을 개관하기로 하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구미시의 ‘생가 주변 공원화 계획’에 따라 공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생가 주변은 이미 유명한 관광지다. 대형 버스까지 댈 수 있는 널찍한 주차장이 들어섰고, 이 ‘불세출의 지도자’를 흠모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왕산기념관에서 내려다보아도 왕산의 생가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터에는 생가를 복원하는 대신 총 든 의병들의 상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나지막한 아파트 속에 둘러싸인 잔디밭 위에 조성된, 숨진 동료를 안고 절규하고 있거나 깃발과 총을 치켜들고 내닫고 있는 전사들의 모습은 어쩐지 왜소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그건 자연스럽게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앞에 조성된 ‘새마을운동’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오버랩 된다. 삽을 메고 리어카를 끌고 가는 이 군상(群像)은 총을 든 독립전사들보다 더 강하고 힘차 보인다. 그 힘이, 그가 이룬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원동력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1세기 전에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우국지사의 삶과 오늘의 국가를 이끌어 온 정치지도자의 그것을 견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더 말할 게 없다. 누구처럼 ‘그게 바로 역사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기 무엇으로 항변할 수 있을까.
2012. 6.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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