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뒤늦게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2002,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읽었다. 책이야 지난해 12월 30일에 샀지만 정작 이 책이 나온 때는 2002년이니 구간(舊刊)도 한참 구간인 셈이다. 그러나 거기서 비평가들이 제기한 2000년대 초반의 이 나라 비평에 대한 문제의식은 모르긴 몰라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비평집이어서 꽤 시간을 잡아먹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지레짐작이었다. 나는 ‘단숨에’는 아니지만 집중적으로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비평’이란 게 참 멀리도 있는 거라는 걸 절감했다.
명색이 문학 전공자고, 이십 년이 넘도록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 한 권의 비평집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내가 그러니 독자에만 머무는 여느 사람들이야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여느 독자들이 비평을 만나는 것은 고작 작품집 표지나 날개에 있는 이른바 ‘표사(表辭)’라 불리는 ‘해설’에서다. 이 해설은 불과 서너 줄의 제한된 길이 안에 비평가가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욱여넣은 것이다. 이런 표사를 포함 상찬(賞讚)으로 일관하는 비평은 흔히들 ‘주례사 비평’으로 불린다.
비평이 ‘가장 좋은 말의 성찬’인 혼례에서의 주례사가 되는 순간, 그 비평은 더는 비평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출판사나 문예지를 배경으로 ‘끼리끼리’ 나누는 우의의 연대, 문학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야합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비평이 여느 독자들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니 객관적 비판 아닌, 주관적 상찬으로 일관한다 한들 누가 그걸 알겠는가. 비평가에게 스스로 그런 생각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그 비평의 끝은 ‘무덤’일 수밖에 없으리라.
주례사 비평, 끼리끼리 나누는 우의의 연대?
올해는 국어 교과서도 검인정을 쓰게 된 첫해다. 우리 학교에서 선택한 국어(상) 교과서에는 ‘문화를 보는 안목’이란 대단원이 나온다. 마침 그 단원의 마무리 부분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단원의 끝부분에는 ‘인기도서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하는 지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하는 출판사의 광고 공세와 화젯거리를 주로 다루는 언론 기관에 의해 과대 포장된 도서들은 독자들의 진지한 지적 요구를 저해하고 독서 욕망을 사그라들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출판 권력과 문단 권력이 출현해 독창적이고 사색적이며 진지한 글쓰기가 외면되는 문제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도서의 역기능을 말할 수 있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차례
서문 '희망의 은유'를 찾아서
1.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김명인
신경숙 소설 비평의 현황과 문제
2. 현학과 과잉, 그리고 '비평의 감옥'/권성우
황종연의 「소설의 악몽」 비판
3.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고명철
은희경의 『마이너리그』의 비평에 대한 비판
4. '마녀'는 어떻게 부드러워지는가/이명원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에 이르는 길
5. 비평의 유토피아, '총각 딱지 떼기'의 후광으로 빛나는 / 홍기돈
김형중의 『동정(童貞) 없는, 혹은 동정(同情) 없는 세상』 비판
6.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김진석
서정주 시에 대한 초월주의적 비평의 비판
7. 성과 속/신철하
황지우와 그의 시를 위한 메모
8. 무덤 속의 비평/하상일
정과리의 『무덤 속의 마젤란』 비판
9. 문학 권력 논쟁에서 예술사회학으로/진중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아이들에게 ‘요즘 거의 대학 수준의 고등학교 국어를 배우는 셈’이라고 농을 할 만한 내용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과대 포장’, ‘출판’과 ‘문단 권력’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배우면서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사실 젊음의 한때 습작기를 거쳤고,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쳐 왔지만, 내가 가르친 문학은 일종의 ‘통조림 문학’이다. 나는 아이들이 문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게 하기보다는 입시용으로 검증된 문학 해석만을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소설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이야 내게도 있긴 하지만, 여느 독자들이 갖는 그것과 그리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오랫동안 소설을 잘 읽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룬 작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내겐 낯선 작품이었다. 그래도 내가 별 무리 없이 내용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비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오른 ‘문단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주례사 비평의 일반화와 긴밀히 이어진다. 주례사 비평은 90년대 이래 가속화된 문학출판의 상업화를 배경으로 한다. 시장 구매력의 증대와 함께 문학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른바 ‘스타시스템’ 내지는 ‘베스트셀러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이 출판자본의 상업주의 논리는 비평을 포섭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출판자본에 포섭된 비평, 정신의 훼손과 의미의 왜곡
주례사 비평은 창비나 문지, 문학동네 같은 메이저 문예지를 내는 상업적 출판자본에 소속된 비평가 그룹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 출판자본이 펴내는 작품집에 붙은 이들 유수한 비평가들의 친절한 ‘해설’은 독자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누리면서 ‘해설의 주류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주류가 된 ‘비판 없는 비평’이 ‘한 작품 혹은 작가에 후광을 드리움으로써 문학의 정신은 훼손되고 작품의 의미는 왜곡·과장’(책 뒤표지)된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비평의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위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차례를 통해 확인되듯 주례사 비평의 혐의를 받는 작품들이나 작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가진 작가들이다. 김명인이 분석하고 있는 신경숙이나, 고명철의 은희경, 이명원의 전경린 등은 이미 일정한 독자층을 두껍게 형성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김명인은 신경숙 소설에 대한 ‘해설’(당연히 본격 비평이라 할 수 없는)들을 본격 분석하면서 신경숙의 ‘신화’를 조명한다. 그가 보기에 <겨울우화(1990)>,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외딴 방(1995)>에서부터 <기차는 7시에 떠나네(1999)>에 이르기까지의 해설들이 개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경숙 소설의 신화화’에 공히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해설은 신경숙 소설의 비판인 ‘관계인식의 협애성’, ‘통속성’, ‘소녀적 감수성에의 고착’ 따위와는 반대편에 존재한다. 그것은 같은 텍스트에 대해서 ‘내성의 문학’, ‘삶의 비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및 존재론적 상실감의 표현’, ‘소멸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 ‘직관과 연상을 통한 현실과 환상의 창조적 변용’, ‘일상성의 미학적·도덕적 복권’, ‘현대적 실존의 드러냄’ 등의 눈부신 상찬을 통해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 온 것이다.
비판과 해설의 차이를 간신히 가늠하는 정도의 얼치기 문학 교사의 관점으로도 그건 ‘넘치거나 지나친’ 듯하다. 그것은 ‘주관적 매혹의 무비판적 노정’이라는 김명인의 지적만으로도 부족하다. 아예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 상찬을 의식적 적극적으로 행사한 외눈박이 해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주례사 비평의 수혜자?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나는 일찍이 신경숙이 <외딴 방>으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머리를 갸웃했다. 글쎄, 만해문학상의 제정 취지야 잘 모르지만, 천승세·황석영·현기영·이문구·송기숙·박완서(이상 소설), 민영·김명수·조태일·백무산·정희성·김지하(이상 시)가 탄 이 상이 어떤 연유로 신경숙에게 갔는지가 의아해서다.
그러나 창비는 베스트셀러 작가 하나를 제대로 점지해 키운 것 같다. <엄마를 부탁해>는 이백만 부를 바라보고 있고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베스트셀러 권에 진입해 있으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 교과서의 글에서 보이듯 이런 작품들이 창비가 다른 상업성이 떨어지는 책을 펴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면 그건 좋은 일이긴 하다.
신경숙이 출판자본의 도움에 힘입어 거둔 문학적 영향력은 고등학교 교과서나 문제집에 <외딴 방>을 실리게 할 정도에 이르렀다. 평론가 남진우는 신경숙의 이 소설을 일러 ‘지난 한 시대의 거대한 풍속화’이자 <난쏘공> 이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이며 ‘한 편의 뛰어난 성장소설’이라는 찬사를 바쳤다고 한다. 글쎄다, 나는 그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감동적 노동소설’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은희경은 <새의 선물> 이후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녀가 펴낸 <마이너리그>에 대한 주례사 비평도 현란하기 이를 데 없다고 고명철은 지적한다. 고명철은 출판상업주의가 대중 통속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격문학의 영역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실례를 <마이너리그>에서 찾는다. 그는 이 작품을 두고 제출된 비평이 ‘은희경’과 ‘창비’의 상징 권력의 억압에 주눅 들어 있다고 진단한다.
고명철이 진단하는 <마이너리그>는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일 뿐이다. 문제는 이 작품이 가진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펴낸 창비가 치열한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명성은 ‘메이저 리그’로 진입해 가고 있지만, 작품은 거꾸로 ‘마이너리그’로 향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하는 어떤 취재원의 뼈아픈 비판은 작가뿐 아니라 7, 80년대의 화려한 명성과 함께 부동의 문학 요새로 군림하고 있는 출판사 창비에도 이르러야 마땅하다.
이명원이 분석하고 있는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은 90년대 이후 등장한 또 하나의 메이저 출판사 문학동네(같은 이름의 계간지도 간행)와의 연관성과 깊숙이 이어져 있다. 이명원은 한국 문단에서 주요한 변수로 작동하는 지연·학연·문연 등의 관계를 ‘한국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외피를 뒤집어쓴 정략적 계약관계’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는 그래서 그러한 계약관계를 반문학적 행태로 규정한다.
매끄럽게 짠 통속 연애소설에 불과한 <열정의 습관>은 일간지들에 의해 ‘성보고서’, ‘도발적인 성애소설’, ‘농염한 탐구서’ 등의 수사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것은 ‘섹스를 통한 몸의 무한한 생산성’ 따위의 미끈한 수사학적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이명원이 보기에는 그것은 ‘해방을 가장한 섹스에의 강박’일 뿐이다. 그는 원래 마녀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는 비평가가 마녀의 역할을 버릴 때 즐거워 비명을 지르는 것은 ‘시장’과 ‘문학 권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글을 맺는다.
<주례사 비평…> 이후 8년, 변화는 있는가
나머지 필자들의 글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비평이 가진 과잉의 ‘현학’이 ‘비평의 감옥’을 만들어낸다는 권성우의 글, 정과리의 비평을 비판한 하상일의 글이 가진 무게도 만만치 않다. 철학자로 알려진 김진석이 분석한 서정주도 읽을 만하다. 참고서 식 문학 해석에 익숙한 문학 교사에게 그것은 비평의 원칙을 완곡하게 떠올려 주는 것 같았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가 나온 지 어언 8년이 지났다. 지난해 12월에 내가 산 책은 초판 1쇄다. 결국, 이 책은 그리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연·학연·문연에 바탕을 둔 ‘한국적 인간관계’의 포로가 된, 우리 문단에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주례사 비평과 출판상업주의의 행복한 만남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국어 교과서의 예의 단원에서 나는 출판상업주의가 결국은 문학 작품의 양극화를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시인, 작가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작품을 쓰는 시인과 작가도 적지 않다는 걸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는 내 당부가 공허한 울림으로 내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하고 만다.
2011. 6. 26.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행복한 책 읽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 60대 중반에 생애 ‘첫 시집’을 내다 (0) | 2019.09.23 |
---|---|
‘지속 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간의 걸음’ (0) | 2019.09.19 |
‘황석영’을 다시 읽으며 (0) | 2019.09.17 |
펜화, 마음 끝에 스치는 사경(寫經)의 철필 소리 (0) | 2019.09.16 |
일본인 교장 패대기친 소년, 정말 불온했을까 (0) | 2019.09.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