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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지속 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간의 걸음’

by 낮달2018 2019.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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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유재현의 『느린 희망』

▲ 느린 희망(그린비, 2006)

세상에 선 뵌 책은 모두 읽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감에 시달렸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열심히 책을 읽게 되지는 않는다. 책 몇 권을 사면 이 책 저 책 옮겨가면서 읽는 데 좋이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눈치챘겠지만 모처럼 예전의 속도감을 되찾아 읽을라치면 아뿔싸, 이젠 읽었던 앞부분이 가물가물한 상태가 되기 일쑤다.

 

얼마 전, 그간 거래해 왔던 한 온라인 서점으로부터 “고객님의 실버회원 유효기간이 7일 남았다.”는 전자우편을 받았다. 

그 편지는 말하자면, 유효기간 안에 책을 좀 사라는 신종 마케팅이었던 셈이어서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유효기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세 권의 책을 샀다. (방금 확인해 보니 이번 구매금액으로는 유효기간 연장에 조금 모자란다.)

 

포장을 뜯고 책을 살펴보면서, 나는 모처럼 설레고 행복했다. 가격도 만만찮아서 1만4900원에서부터 1만8000원까진데, 값에 걸맞게 판형도 큼직한 데다 사진이 잔뜩 실린 책들이어서 자못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책을 사 오면서 기대와 설렘으로 조급증을 느꼈던 저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 작가 유재현은 역사와 진보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전망을 가진 작가다.

유재현이 쓴 『느린 희망』은 작가의 쿠바 여행 기록이다. 부제인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에 작가의 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는 유재현을 잘 모른다. 우리 소설 문학에 대한 관심 덕분에 비록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작가는 대체로 기억하는 편인데, 유재현이라는 이름의 작가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겨레> 18°의 ‘세설(世說)’에서 여러 번 그의 글을 읽었고, 그의 글이 만만찮은 세계관과 역사적 전망의 표현일 뿐 아니라, 절제된 호흡과 단단한 격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는 <한겨레>의 서평을 통해 이 책이 이미 지난해 7월에 출판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나는 그의 소설은 한 편도 읽지 못했지만, 그가 쓴 글 속에 녹아 있는 역사와 진보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전망,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두꺼운 애정만으로도 그를 작가로, 저널리스트로 평가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쿠바 여행에서 가져온 것은 “관광객의 눈으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쿠바의 민얼굴”(한겨레 서평)이다. 텍스트보다 몇 배는 많을 듯한 사진을 통해서 그는 쿠바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증언한다. 

 

그것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나라,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궁핍과 절망 속에서도 ‘시장과 경쟁’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인간다운 삶의 모습’과 희망을 읽어 낸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지은이는 한갓진 설명보다 사진이 독자들을 설득하는 데 낫다고 생각한 것일까. 큼직한 판형(4·6배판)의 책 속, 한 면 또는 두 면에 걸쳐 시원스럽게 실린 원색의 사진들이 말해주는 건 쿠바의 현재이고 미래이다. 저자는 세계에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카스트로의 나라로 떠올리는 쿠바에 대한 일반의 고정관념을 우려했던 것일까.

 

사회주의 국가라 하면 대개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구질구질한 가난’이다. 더구나 미국의 코앞에서 도발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미국에 감히(!) 대적한 원죄로 수십 년에 걸친 경제봉쇄에 허덕여야 했던 나라, 쿠바는 상종치 못할 망나니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 쿠바혁명의 도화선이 된 도시 산티아고에 선 카스트로가 그려진 입간판
▲ 레닌기념관의 레닌 석상 뒤 콘크리트에 싹을 틔운 나무 한 그루.(부분)

그러나 저자는 90년대 위기 이후의 이중경제, 달러 상점, 탐욕과 암시장 등으로 점철되는 쿠바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쿠바가 가진 ‘인간의 얼굴’과 그 민얼굴로 일구어가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따뜻하게 응시한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쿠바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90년대의 혹독했던 비상시기를 헤쳐 나오면서 사람들은 땅과 인간이 적대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고 생존을 위해 지속 가능한 사회의 전범을 일구었다.

트랙터 대신 소들이 땅을 갈고 마차가 곡물을 운반했다. 화학비료 대신 유기비료를 사용했으며 바이오 농약을 개발하고 도시는 스스로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화학과 화석에너지가 사라진 들판의 흙 속에는 생명들이 돌아왔고 무시로 새들이 내려앉았다. 산들은 인간에게 등을 지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는 경쟁의 부재 또는 극적인 순화를 의미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적합한 자들과 부적합한 자들은 모두 다윈의 사슬에 묶이기를 거부했다. 학교는 출세의 경쟁터가 아니었으며 단지 배움의 장이었다. 자본이 없으므로 누구도 축적하지 않았다.

시장이 없으므로 학교와 병원은 오직 공공의 논리와 복지의 논리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차별이 없으므로 흑인과 뮬라토, 백인은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잔혹하게 인간의 뇌수를 적출하고 허리를 부러뜨리는 시장과 경쟁의 수레바퀴를 매달지 않은 체제는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 유기농 중심의 쿠바의 도시농업.

경제의 대미의존도가 85%였던 쿠바는 수십 년간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와 소련 붕괴 이후, 수출에 의존하던 농업이 시장을 잃으면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각종 도표 등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쿠바의 여러 사회경제적 지표들은 매우 희망적이다.

 

쿠바 교육은 GDP의 10%를 상회하는 투자에 힘입어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카리브해 지역에서 가장 높아 거의 선진국 수준을 자랑한다. 또 GDP의 7% 이상을 지출하고 있는 의료는 교육과 함께 쿠바혁명의 자부심을 대표한다. 유아사망률, 평균 수명, 예방의학 등의 지표에서 나타나는 괄목할 만한 수치들은 그 자부심을 뒷받침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의료수준과 풍부한 의료 인력을 갖춘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와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쿠바를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가 2000년 이후 베네수엘라에 1만4천 명의 의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쿠바의 가능성이 불확실하다고 인정한다. 아바나를 떠나던 날, 그는 아파트의 주인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고 고백한다.

 

“안녕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저자 머리말의 마지막 헌사는 ‘꽃들에게, 희망에게’이다. 그 꽃들, 그 희망의 미래는 그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가난한 나라에서 발견한 ‘지속 가능한 사회’의 단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소중하다.

▲ 쿠바의 어린이들.

어떤 이들은 이를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망령을 벗지 못하는 순진한 운동권의 그것으로 깎아내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사회’나, ‘인간의 걸음’이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07. 3. 8. 낮달

 

 

 

느린 희망 by 유재현

쿠바 사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사진과 글에 담아온 포토다큐에세이. 쿠바의 맨서쪽 끝 과나아카비베스 반도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그리고 동쪽 끝 관타나모 만에서 다시 수도 아바나까지 총 3,451킬로미터를 여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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