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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순이 삼촌>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by 낮달2018 2019.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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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서 만나는 4·3

▲ 제주국제공항에서의 유해발굴작업 ⓒ 제주의 소리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 날, 4·3 항쟁 예순한 돌 기념일을 맞는다. 관광버스로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제주도 일원에서 회갑을 넘긴 4·3에 대한 분위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가끔 사거리 중앙에 서 있는 ‘4·3사건 위령제’를 알리는 하얀 선전탑만이 외로웠을 뿐이다.

 

아이들은 2학기 작문 시간에 발표하는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서 4·3을 만난다. 4월에 공부하면 좋을 텐데, 어쩌다 보니 날짜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봄의 유채꽃과 제주의 파란 바다를 떠올리며 <순이 삼촌>을 배우니 작품 이해에는 한결 도움이 되는 듯하다.

 

지지난해부터 이태 동안 아이들이 내게 보낸 발표 자료를 훑으면서 머릿속으로 소설을 재구성해 본다. <순이 삼촌>은 1949년 1월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 사건을 창작 모티프로 삼고 작자의 체험을 덧붙인 소설이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된 4·3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피해를 본 마을이 북촌리다. 이날 아침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사건이 도화선이었다. 곧 2개 소대 군 병력이 마을로 들이닥쳐 삼백여 동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 너븐숭이 애기 무덤

북촌리에선 이날 하루에만 마을 사람 340여 명이 학살되는 등 모두 479명이 숨졌다고 한다. 살아남은 마을의 남정네들이 토벌대를 피해 입산하게 되자, 여자들만 남게 되어 이 마을은 한동안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순이 삼촌’은 그 끔찍한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화자의 먼 친척 아주머니다. 제주에서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부르는 호칭이 ‘삼촌’이다.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이는 그날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신경 쇠약과 환청에 시달리며 불행한 삶을 이어간다.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이가 두 자식이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를 골라내며 살아온 세월이 30년이었다. 마침내 그날을 환청으로 듣게 된 순이 삼촌은 그 살육의 현장에서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화자는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 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 물귀신에게 채여 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99) 식 총부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 현기영, 중편소설 <순이 삼촌> 중에서

 

소설 <순이 삼촌>은 이 학살의 와중에 극적으로 생존한 한 여인의 삶이 어떻게 황폐해지고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또 그것은 ‘4·3’의 여파가 지금까지 제주도민에게 어떠한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기영이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말기인 1978년이다. 이 소설로 말미암아 작가는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책도 발매 금지되는 등의 고초를 겪었지만, 문학으로나마 4·3이 형상화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실로 수십 년 동안 제주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살아온 것이었다.

 

조천읍 북촌리는 함덕 해수욕장과 지척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제주 마을이라 한다. 제주 일주도로 변의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은 그날 마을 사람들을 소집한 군대가 학살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군경가족을 가려내던 장소며, 웃자란 마늘 줄기들로 시퍼런 학교 뒤 옴팡밭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던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인 북촌리에 세워진 4.3 기념관 ⓒ 제주의 소리

4.3 예순한 돌을 앞두고 참상의 공간이자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지난 31일 개관한 것도 역사 발전의 덕분이다. 4·3기념관은 지난 2005년 수립된 제주 4·3 유적지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국비 15억7900만 원을 투입, 전시관 외에도 443명의 희생자 각명 위령비와 순이 삼촌 문학비, 방사탑, 산책로 등을 갖췄다.

▲ <순이 삼촌>과 작가 현기영

전시관에는 강요배·박재동 화백의 4·3 그림과 만화, 집단학살 현장인 속칭 ‘당팟’에서 나온 탄피 사진과 현장 사진 등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전시물이 소개되고 있다고.

 

4·3의 진실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작가의 <순이 삼촌> 소설 초판본, 일어판·영어판 소설과 북촌리 집단학살 진상조사에 앞장섰던 고 홍순식 선생의 친필원고, 북촌리 자체 4·3 희생자 조사서 등도 전시되고, 영상실에선 북촌리 4.3을 다룬 영상물도 상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제주의 소리> 참고)

 

현기영의 중편 <순이 삼촌>이 발표된 이후 다시 30년이 지났다. 2000년에 제주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2006년 4월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으로 사과함으로써 역사는 제 물줄기를 찾는가 했으나 2008년 새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은 반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국 단위의 보수 우파단체가 4·3을 본격적으로 왜곡하고 나선 것은 지난해부터다.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란 단체의 초대 의장으로 뽑힌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는 무장폭동을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대중의 지지를 받고 강력했지만 온건했다’고 평가, 진압 작전에 참가한 군경은 양민학살자가 됐다”면서 “친북좌파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훼손시킨 국가 정통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현직의 국방부 장관은 아예 4·3을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이라고 정리해 버린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는 4·3 사건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이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했으며 이들이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로 기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0년 전에 그 서른 해 전의 상처로 앓던 한 여인의 삶은 형식적으로 끝났다. 오랜 유예의 세월을 끝내고 자식들이 묻힌 옴팡밭에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던 순이 삼촌은 편안히 눈을 감았을까. 그이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났지만, 그이의 잠은 그리 편안하지 않을 듯하다.

 

오늘 오후 1시에 제주시청 앞에서 치러질 4·3 행사의 이름이 ‘4·3 특별법 사수와 수구 집단 망동 분쇄 범도민 대회’가 된 것도 저간의 사정을 드러내 준다. 관련 기관과 단체에서 주관하는 올해 4.3 행사가 모두 33건이나 되고, 증언 본풀이나 ‘해원상생굿’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순이 삼촌의 영면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이다.

 

 

2009. 4.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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