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강석경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
작가 강석경이 중편 「숲속의 방」을 발표한 것은 1985년이고 내가 그 작품을 읽은 것은 그 이듬해쯤일 듯하다. 그때, 나는 3년 차 햇병아리 교사로 경주 인근의 한 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경주에 나가서 오랜 탐색 끝에 산, 한 꾸러미의 책 가운데 초록색 표지의 『숲속의 방』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운동권 여학생의 방황과 자살’을 다룬 소설이라는 기억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데, 당시의 내 느낌은 ‘배부른 중산층의 관념 놀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깜깜했던 80년대 전반기에 학교를 다녔던지라 운동권의 정서 따위에 무지했던 탓도 있지만, 중산층 출신이라고 지레 단정해 버린 작가 강석경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했지 않았나 싶다.
지은이의 네 번째 장편인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은 것은 1999년이다. 작가에 대한 특별한 기호나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신문의 신간 안내를 읽고 ‘회가 동해서’였다. 작품의 소설적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작가의 삶에 대한 원숙한 해석이 통째로 맘에 들었다. 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마이 리스트’에 ‘만나고 싶은 작가’로 그녀를 등재했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공선옥과 하성란을 좋아한다. 나는 그녀들의 작품 속에 튼실하게 자리한 인간과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작가와 공유한다고 믿고 있다.
강석경에 대한 알라딘 마이 리스트(도서 목록)에 단 내 코멘트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거’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작가. 「숲속의 방」으로 떠오를 때만 해도 내게, 그녀는 새로운 작가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훌륭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본질적 의미에서 ‘사랑과 섹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다.”
80년대 내내 나는 40대와 50대의 세계관을 경멸하고 더러는 증오했다. 내게는 그들이 가진 삶의 경륜과 슬기보다는 우유부단한 태도와 애매한 절충적 입장 따위만이 눈에 보였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진부한 생각이 개혁과 진보의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살았던 세월을 지나 40대의 마지막 고비를 넘으면서 나는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수구(守舊)의 징표만이 아니라, 때론 삶에 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깊고 그윽한 시선’의 근원이라는 사실 말이다.
작가 강석경은 우리 나이로 올해 쉰다섯이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눈높이와 내 그것이 겹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삶이란 여주인공 이진이 말한 ‘누구나 가슴속에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을 거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교직(交織)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작가는 아마 오래 경주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경주라는 환상적인 고도가 준 영감에 힘입어 씌어진 것 같다. 둔덕처럼 이지러져 자연의 부분이 된 천오백 년의 고분 곁을 지나다니며 나는 자연스럽게 생사(生死)의 순환 질서를 체득하게 되었다. 우리의 가슴속엔 남모르는 깊은 계단이 있고, 삶의 껍질을 벗고 그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본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네 사람의 이야기다. 늘 선의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젊은 고고학자 강주,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연인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 그리고 욕망을 좇으면서도 그 공허 앞에 무너지고 마는, 강주의 사촌인 연극연출가 강희, 그리고 ‘첩의 딸’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몸부림치는 그의 여동생 소정이 그들이다.
강주를 사랑하면서도, 연극 연출을 통해 자기 욕망을 실현해 가는 아웃사이더 강희에게 흔들리는 이진,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숨진 강주가 남긴 아이를 잉태한 채 강희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서로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들은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계속한다. 이진은 스스로를 ‘방향 감각을 상실한 돌고래처럼 강을 거슬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강.
‘고통 때문에 스스로 죽여 버린 태양을 가슴에 묻은 여자’ 소정은 자신의 존재 조건에 번민하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호주로 이민을 떠난다. 중국 여행 중 그 여자는 일본인 청년 히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그가 ‘내 고통을 보상하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독백한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의 정원[소정(少庭)]에 놀 수 있는 사람, 강주의 죽음을 ‘사랑의 부재를 믿는 내게 한 인간을 보내고 안식의 길을 떠났다’라고 이해한다.
삶이 갖는 복잡다기한 얼굴과 그 행로들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면서 작가는 이진의 입을 통해 저마다의 가슴에 깊숙이 숨겨진 ‘계단’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가슴 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신변을 정리한 소정은 마지막으로 경주를 찾고, 계림에서 강주에게서 받은 편지 두 통을 불살라 개울에 흘려보낸다.
“가거라, 우리는 긴 강을 흐르는 물이니…….”
경주에 온 히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소정은 말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잃고 떠나지만 단 하나의 그리움은 부적처럼 가슴에 간직하고 싶었다.”
‘삶의 껍질을 벗고 그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본질을 만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그 계단을 찾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 어두운 심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성찰이 필요할 터이다.
적어도 거기 이르려면 필요한 것은 ‘시간의 숙성’이고, 삶이란 ‘더러 필연이 아니라 필연을 넘어선 우연의 비대칭적 조합’이란 사실의 깨달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005. 11. 29. 낮달
요즘은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한갓지게 타인의 삶의 곡절을 따라가는 게 힘이 겨워서다. 서너 쪽만 읽고 나면 잠자고 있던 게으름이 몸의 곳곳을 간질이며 ‘까짓것, 책 따위는 덮어 버리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물론 유독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책 읽기에서 겪는 부조화다.
이태 전에 쓴 글인데, 다시 읽어도 겸연쩍지 않은 걸 보면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 모양이다. 경주는 작가가 사는 곳(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이고 이 작품의 배경이기도 하다. 20년 전, 경주 근처에서 네 해쯤 살았던 개인적 기억들이 묘하게 겹치면서 공연히 마음이 좀 애잔해진다.
올핸 내가 경주 인근의 초임 학교에서 처음 만난 첫사랑, 그 큰아기들이 불혹이 되는 해다. 그래선지 이 친구들의 연락이 잦고, 몇몇은 이곳을 다녀가기도 했다. 이 친구들을 생각해도 그렇고, 다가오는 방학에는 경주를 찾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번 붙잡히고 있다.
2007.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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