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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신과 인간의 대결, 혹은 인간과 영혼의 만남

by 낮달2018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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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사랑 ②] 매월당 김시습의 애정 판타지 「만복사저포기」

▲ 만복사는 남원의 명소였던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조그만 마을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만 절터일 뿐이다.

[남원의 사랑 ] 춘향의 선택, ‘정렬부인인가 인간 해방인가

 

인간과 인공지능(AI) 컴퓨터 사이의 바둑 대국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가운데 끝났다. 애당초 승리를 자신하다가 세 번이나 진 끝에 겨우 첫 승리를 챙긴 인간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이세돌 9단은 “바둑의 아름다움, 인간의 아름다움을 컴퓨터가 이해하고 두는 게 아니므로 바둑의 가치는 계속될 것”이라 했단다.

 

인간과 신의 대결, 만복사의 저포 놀이

 

그럼 인간과 신의 대결은 어떨까. 조선조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한문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단편 ‘만복사저포기’에는 그런 신인(神人)의 대결이 등장한다.

 

이 대결은 저포(樗蒲) 놀이로 진행된다. 저포는 짧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엎어지고 젖혀진 사위로 승부를 겨루는 내기 놀이다.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이 이기는 건 재미없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승리한다. 그는 승리의 대가로 부처님으로부터 한 여인을 점지받는다. 소설은 그 여인과의 생사(生死)를 초월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다.

▲ 시 원고와 김시습(1435~1493) 초상. 그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 「만복사저포기」를 썼다. ⓒ 문화재청

이 짤막한 한문 단편의 배경이 남원시 왕정동 기린산 기슭에 있었던 만복사(萬福寺)다. 고려 문종 때 창건한 만복사는 수백 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다. 이 절집의 규모는 부근에 있는 ‘백뜰’, ‘썩은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으로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하얗게 된다 해서 붙은 이름이고 썩은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곳으로 상주하는 승려 수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지명이다. 중상골은 승려들의 전용 화장터였다고 한다.

 

저녁 무렵이면 탁발을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어 이 광경(‘만복사 귀승’)은 남원 팔경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판소리 <춘향가> 중 이몽룡이 춘향 소식을 듣고 만복사를 찾아 춘향을 위해 노승들이 재(齋)를 올리는 광경을 구경하는 ‘만복사 불공’ 대목이 있을 만큼 이 절은 남원의 명소였다.

 

인간과 영혼의 만남, 「만복사저포기」

 

「만복사저포기」의 주인공은 남원에 사는 노총각 양생(梁生)이다. 그는 삼월 스무나흗날 만복사의 불당을 찾아가서 부처님께 저포 놀이를 청한다. 자신이 지면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릴 것이요, 부처님이 지면 그에게 배필을 중매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기였다.

 

양생은 두 번 저포를 던져 이기게 되어, 불좌 밑에 숨어서 배필이 될 여인을 기다렸다. 그때 문득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부처님 앞에서 외로운 신세를 하소연하면서 좋은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기원하는 게 아닌가. 양생이 여인 앞으로 뛰어나가 품은 뜻을 말하니 두 사람은 뜻이 통하여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런데 실제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왜구가 쳐들어온 난리 통에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이었다. 이튿날 여인은 양생에게 자기가 사는 동네로 가기를 권했고, 서생은 여인을 따라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사흘 뒤 그가 돌아가게 되었을 때 여인이 서생에게 신표로 은 주발 한 개를 주었는데 그것은 여인의 무덤에 묻은 부장품이었다.

 

다음 날 그들은 보련사(寶蓮寺)에서 다시 만난다. 그러나 재가 끝난 뒤 여인은 그에게 불도를 닦아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이르고 마침내 홀로 저승으로 떠나 버렸다. 이날은 여인의 대상(大祥) 날이었다. 양생은 처녀를 그리워하며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

▲ 한때는 수백 명의 승려가 주석한 대사찰이었으나 지금 남은 만복사터는 그리 넓지 않다. 왼쪽은 석조대좌.

「만복사저포기」는 생사를 초월한 사랑을 다룬 전기(傳奇) 소설이다. 전래하는 인귀(人鬼) 교환 설화, 시애(屍愛) 설화, 명혼(冥婚) 설화 등을 바탕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작품은 ‘인간(이승)과 영혼(저승)의 만남 → 사랑 → 이별 – 인간의 탈속(脫俗)’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바탕에는 불교 사상이 깔려 있다. 즉, 주인공이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는 발원(發願) 사상,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재를 올리는 의식, 죽은 여인이 남자로 환생한다는 윤회 사상 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 사랑, 혹은 작가의 ‘도덕 이념’

 

「만복사저포기」는 흔히 작가의 삶과 관련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김시습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거나 불도에 심취하여 금오산에 칩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된 것 등이 양생의 삶과 겹친다는 것이다. 또 여인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정조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이 벼슬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단종에 대한 의리를 드러낸 것과 견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생과 여인의 생사를 초월한 사랑은 부당한 세계의 횡포에 맞서 이를 고발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이 정절을 지키는 것이나 양생이 여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세속을 떠나 홀로 살았다는 것 등은 모두 작가의 도덕적 이념이 일정하게 투영된 것이라는 얘기다.

 

문학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할 만한 명소였지만 만복사는 조선조 이후 사세가 약해져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 때 왜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절집이 왜군에 대항하는 본거지가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은 것은 돌로 만들어진 불상, 당간지주, 석조대좌, 석탑, 그리고 금당의 초석들뿐이다.

 

1979년부터 시작된 7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만복사는 창건 후 중창을 거듭하여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있는, 탑 하나에 금당이 셋[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인 사찰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유구가 남아 있어 북 금당의 북쪽에 강당이, 목탑 남쪽에 중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 당(깃발)을 걸 수 있도록 하는 당간을 설치하기 위한 지주석인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32 호.
▲ 신성한 공간인 절로 들어오는 잡귀들의 범접을 막는 석인상. 험상궂은 금강역사의 모습이다.
▲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다층석탑인 만복사지 오층석탑. 4층까지만 남아 있다. 보물 제30호.

만복사터는 남원시 왕정동 도로변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온다. 도로 바로 밑에 당간지주가, 왼편 안쪽으로 석인상 한 기가 우뚝 서 있다. 눈을 부라린 험상궂은 모습의 이 금강역사는 신성한 공간인 절집으로 들어오는 잡귀의 범접을 막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추정해 본 가람 배치도에 따르면 중앙이 목탑 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서·동 금당이, 목탑 터 뒤편으로 북 금당이 있었다. 동금당 뒤편의 오층석탑은 전형적 고려의 다층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놓았는데 지금은 4층만 남아 있다. 그 앞에는 석탑 하나가 깨어진 옥개석 3개로 남았다.

▲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조대좌. 거대한 돌 하나에 상 중 하대를 조각했다. 보물 제31호.

조그만 절터에 보물이 넷

 

금당 셋 가운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 놀이를 한 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구리로 만든 35척(약 10m)의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전각과 함께 5층 전각이 있었다고 전하니 사찰의 경역(境域)은 현재보다 훨씬 컸음이 분명하다.

 

절터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만복사지에는 보물이 넷이다. 입구의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오층석탑(보물 제30호) 말고도 서 금당 터 앞의 석조대좌(보물 제31호)와 유물 보호각 안의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이 더 있는 것이다.

▲ 유물 보호각 안의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3호

석조대좌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데 거대한 돌 하나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전체 모습은 고려시대의 전형인 8각형이 아닌 6각형이다. 석조여래입상은 절터 오른쪽 구석의 유물 보호각 안에 모셔놓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m의 불상이다.

 

폐사된 절터는 좀 쓸쓸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부지가 썩 넓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그것은 배가된다. 그러나 만복사터는 한눈에 들어오는 면적인 데다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덕분에 호젓할 뿐이지 쓸쓸하다는 느낌은 없다. 도로 쪽만 열려 있지 나머지는 동네가 둘러싸고 있으니 쓸쓸할 새가 있겠는가.

 

아내와 거기 머무는 동안에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누렇게 시든 잔디에 내리는 1월의 햇볕은 따뜻했다. 나는 「만복사저포기」를 쓰던 시절의 매월당을 생각했고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벼슬을 버리고 야인으로 살아간 이 불우한 천재의 삶을 무심히 떠올렸다.

 

작가의 삶은 현실과 이상 사이,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과 영혼의 교류를 다룬 기괴한 판타지를 만들었던가. 죽음을 초월한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윤리 의식과 가치관을 확인했던 것일까.

 

해가 설핏 기울어진 만복사터를 떠나면서 나는 절터 너머 마을에서 탁발을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을 상상해 보고 있었다.

 

 

2016. 3. 26. 낮달

 

[남원의 사랑 ①] 춘향과 몽룡, <춘향전>과 <춘향뎐>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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