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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남북한 당사자 간 최초 합의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by 낮달2018 201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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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발표

▲ 1972년 7월 4일, 도하 각 일간지는 1면 머리기사로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다루었다. 출처 : 국가기록원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에 분단 이후 남북한 당사자 간 최초의 합의문서인 ‘7·4 남북공동성명’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발표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27년 만에 남북이 최초로 통일문제를 합의하여 발표한 역사적 공동성명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 분단 이후 첫 합의문서

 

이날, 남과 북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경과보고에 이어 ‘조국통일원칙’과 남북의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합의한 7개 항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 통일 3대 원칙’과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7개 항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① 긴장 상태 완화, 상대방 중상비방 중지
② 무장도발 중지,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 합의
③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실시
④ 적십자회담 성사 적극 협조
⑤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개설
⑥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운영
⑦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엄숙히 약속

 

 

1970년 박정희 정권은 8·15 경축사에서 “북괴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포기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고 남과 북의 체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언급했다.

 

이는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한적韓赤)가 <한국방송(KBS)>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북적 北赤)에 남북한 간의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를 제의하고 이틀 후 북한이 동의하면서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과 북한은 25차례에 걸친 적십자 예비회담(1971.8.~1972.8.)과 7차례의 본회담(1972.8.~1973.7.)을 열어 논의를 이어갔다. 애초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던 적십자회담이 정치적 대화로 바뀐 것은 1971년 11월 20일부터 1972년 3월 22일까지 이루어졌던 판문점 비밀접촉에서부터였다.

 

이 비밀접촉의 주역이 바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정홍진(한적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과 북한 노동당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김덕현(북적 보도부장)이었다. 이 비밀접촉 이후, 남북의 정치 대화가 이어지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고 정치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북적십자회담, 비밀접촉 통해 정치적 대화로 전환

 

그러나 적십자회담을 먼저 제안해 놓고도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2월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법적 근거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의 배경으로 박정희는 ‘중공의 유엔 가입을 비롯한 여러 국제정세의 급변, 그 틈을 탄 북한의 남침 위협’ 등을 들었다.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하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 국민 자유의 일부도 유보하겠다는 등 6개 항의 특별조치를 발표했으나 미국조차도 북의 남침 위협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반대했다. 실제로 비상사태 선포의 직접적 배경은 학생들의 교련 반대 투쟁과 부정부패 척결시위 등 대정부 투쟁의 고조였다.

▲ 1972년 7월 4일 10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같은 시각에 평양에서도 발표가 이루어졌다.

실무자 간 비밀접촉에 이어 공동선언의 개략적 틀이 합의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1972.5.2.~5.5.)을 통해서였다.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박성철(朴成哲) 제2 부수상이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 부장 대신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공동선언의 공개를 주장했으나 초기에 박정희 정권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72년 1월 10일, 김일성이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에서 남북평화 협정 체결, 불가침조약 체결,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군사력 감축 단계 실시 등 적극적 평화 공세를 펴면서 남북 간 논의 사항을 공개하자 선언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월 중순부터 정홍진과 김덕현이 판문점에서 만나 공동선언 문안 작성을 위한 실무 협의를 했다. 6월 28일에는 공동선언에 가서명했고, 6월 29일에는 이후락·김영주 양자가 합의 내용에 서명을 끝냈다. 그리고 7월 4일에는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국민적 합의 없이 양측 수뇌부가 비밀리에 접촉해 이루어낸 남북공동성명은 그 자체로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른바 ‘데탕트(화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와 추세에 발맞추는 듯했던 남북관계는 더는 진전되지 못하고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1972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3차 적십자 본회담. ⓒ 오픈 아카이브

공동성명 발표한 지 석 달 뒤에 남쪽의 박정희는 10월 유신(1972.10.17.)을 단행했고, 북쪽의 김일성도 연말에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1972.12.)한 것이다. 이는 남북한 권력자들이 정치적 의도로 통일 논의를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남북 각각 유신체제와 유일체제 단행하면서 남북대화 종  

 

이듬해(1973)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문화를 개방, 북한이 한국과 같이 유엔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6·23선언은 대북한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해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오해를 받았다. ‘김대중 납치사건(1973.8.)’이 발생하자,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거부했다.

1973년 8월 28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 김영주는 ‘두 개의 조선’을 추구하는 6·23선언의 폐기를 요구하며 남북대화 종결을 선언하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은 막을 내렸다. 남북 당사자 간 최초로 합의 문서의 유효기간은 단지 420일에 그치고 만 것이다.

 

어렵사리 이루어낸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 일본의 북한 승인과 북한 공식 국호 호칭 사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강력히 반대했다. 상호 간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관계의 파국은 예정된 거와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은 “냉전 수행에 있어서 동맹국들의 부담을 늘리고 미국의 방위책임은 축소한다”는 ‘닉슨 독트린(1969)’ 이후 데탕트를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가 아닌 위기로 판단했다. 1971년 대통령에 의한 최초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은 그러한 인식의 결과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키고도 박 정권은 국내정치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외세 의존적·대결 지향적 통일노선 거부, '통일 기본원칙' 도출 의의

 

결국,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한 당사자 간 합의라는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 상호 간 공존 의지가 부족한 현실 탓에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성명 발표 3~5개월 만에 남쪽에는 유신체제가, 북쪽에는 유일 체제가 등장하고 만 것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지만 그 의의는 적지 않다.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 사이의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했고, 고위급 정치회담으로 공동성명을 합의 발표했으며, 상호 방문으로 양측 최고책임자를 만나 남북문제를 논의한 점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 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통일의 기본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의의는 이후 남북접촉에서도 이어졌다. 남북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공동선언 발전했다.

 

6·15선언은 노무현 정부의 10·4 남북공동선언으로 계승되었고, 근년에는 판문점선언(2018)으로 이어졌다. 현재 남북관계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쟁위험 해소를 목표로 한 ‘평화를 위한 착실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어저께 트위터로 제안된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기대를 다시 끌어올려 주었다. 여전히 냉전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당과 정치인들이 한반도 평화를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통하여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국가적, 민족적 과제라는 점은 아직도 우리의 절대 명제인 것이다.

 

2019. 7. 3.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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