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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산 높고 물 맑은’ 죽계(竹溪), 만만찮은 곡절과 한을 품었다

by 낮달2018 2019.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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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시가 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 소수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은 '죽계별곡'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

가을이 깊었다. 한가위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어느새 우리는 겨울의 어귀에 서 있다. 곱게 물들며 지는 나뭇잎, 그 조락(凋落)이 환기하는 것은 시간, 그 세월의 무상이다. 그것은 또 우리 역사 속에 스러져 간 시인들의 삶과 그들의 노래를 덧없이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오늘의 여정은 영주 순흥 쪽이다. 순흥, 소백산 자락으로 한 시인의 노래와 그 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그는 본관을 ‘순흥’으로 쓰는 고려 말의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이다. 근재는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조선조 중기에 송강 정철이 쓴 가사 ‘관동별곡’과는 다른 노래다)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지은이다.

 

후렴에 나오는 ‘경(景)긔엇더니잇고’라는 구절 때문에 ‘경기체가(景幾體歌)’라는 이름이 붙은 이 노래는 경기하여가, 경기하여체가 또는 별곡체 등으로도 불린다. 흔히 경기체가는 고려가요로 널리 알려졌지만, 기실 고려시대의 작품은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 세 편에 불과할 뿐이다.

 

경기체가, 신흥사대부의 세계관을 반영한 시 양식

 

경기체가의 첫 작품 ‘한림별곡(翰林別曲)’은 교과서를 통해 두루 소개된 노래다. 경기체가의 성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계층은 ‘한림별곡’을 지은 유학자들, ‘죽계별곡’·‘관동별곡’의 안축 등 고려 후기의 ‘신흥사대부’들이다. 고려 후기에 역사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 이들 계층은 한시 창작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경기체가 형식을 이용하여 표출한 것이다.

▲ 안축의 문집 <근재집>에 실린 '죽계별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기체가는 무신집권기 문인의 현실 도피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들 신흥사대부의 ‘세계관과 미의식’을 반영한 시 양식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경기체가는 이들 신진사류의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과 득의에 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림별곡’은 <악학궤범>·<악장가사>에 국한문 가사가 전하는 까닭에 교과서에 실려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근재의 문집에 전하는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은 한문과 이두로 쓰여 낯설기만 하다. 엄밀히 보면 경기체가가 한글 시가라기보다 한문 시가로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순흥 금성단에 있는 금성대군의 신단지비 ( 神壇之碑 )

안동에서 순흥까지는 중앙고속도로를 타면 금방이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큰 굽이가 없는 밋밋한 길이 재미없는 데다가 굳이 유료도로로 가야 할 만큼 바쁜 것은 아니어서 아내와 나는 국도를 탔다. 순흥에 닿는 데 40분쯤이 걸렸다. 중간에 잠깐 길이 헛갈렸기 때문이다.

 

순흥은 여말 성리학의 비조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과 그 후손인 안축을 낳은 순흥 안씨의 고향이다. 안축과 안보(安輔) 형제는 고려조뿐 아니라, 원나라의 대과에까지 나란히 급제한 재원들이다. 조선조 개국 초 ‘나라 안 전체의 학문을 다 합쳐도 이들의 학문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있을 정도였다. 당대의 석학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안보의 비문을 썼고, 그의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은 안축의 문하생으로서 근재 사후 그의 비문을 썼으니 두 집안의 인연도 만만하지 않다.

 

순흥은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가 되었고, 조선조 태종 때 순흥도호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흥에 유배와 있다가 순흥 부사 이보흠(?~1457)과 함께 다시 거사를 도모하다 실패한 사건은 순흥을 뒤흔들었다. 숱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廢府) 되었던 것이다. 순흥이 다시 도호부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숙종 때에 이르러서다.

 

순흥 안씨가 세거해 온 고을, 죽계(순흥)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영천(榮川) 서북쪽 순흥부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순흥은 한 명문가가 세거하기에는 충분한 고을인 셈이다.

▲ 순흥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봉도각(蓬島閣) 공원에도 가을이 깊었다 .
▲ 봉도각 공원의 경로소(敬老所). 매우 단정한 모양새의 팔작집이다 .

순흥은 행정구역으로는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내에 소수서원과 선비촌 등 유적지와 관광지를 끼고 있는데다가 부석사로 가는 길목이어서 이맘때쯤이면 이미 한적한 시골이 아니다. 더구나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리는 문화부 지정 ‘전통문화마을’이다. 영주에서 들어가는 순흥 어귀에 덩실하게 솟은 봉서루(鳳棲樓)나, 면사무소 뒤 봉도각 주변의 고색창연한 연못과 경로소 따위가 연출하는 풍경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소수서원을 지나 읍내리의 ‘사현정(四賢井)’에 이른다. 사현정은 말 그대로 ‘어진이 네 사람의 우물’이다. ‘어진이’는 이 동네에 세거했다는 안축의 아버지 안석과 그의 세 아들 축, 보, 집을 이른다. 안석이 호장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묻혀 세 아들을 훌륭히 길러낸 우물이란다.

 

조선조 인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우물의 내력을 알고 ‘사현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사람의 덕을 기리게 하였다. 그 후 인조 때 중건하였고 순조 때 다시 비각을 세웠다. 우물 깊이는 약 4m 정도라는데 석재의 뚜껑이 굳게 닫혀 있다. 지상에는 높이 70cm, 폭 1m의 화강암 각석을 우물 정(井)자형으로 3단 조립하였다.

▲ 읍내리의 사현정. 사현(四賢)은 안축의 아버지 안석과 그의 세 아들을 이른다 .

안축은 1287년(충렬왕 1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단양부 주부 등을 지냈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여, 그곳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 존무사(충숙왕 때에 임시로 존재했던 지방관)로 파견되었다. 그 후, 상주 목사 등을 지내고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순흥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관동별곡’은 1330년(충숙왕 17)에 안축이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을 노래한 경기체가다. 이때 근재는 마흔네 살. 250년 뒤인 1580년(선조 13)에 역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마흔다섯의 송강 정철이 가사 ‘관동별곡’을 지었으니 몇 세기를 넘어 강원도를 노래한 두 시인과 노래의 인연은 남다르다.

 

‘관동별곡’은 전체 9장으로, 위풍당당한 순찰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의 서사 1장에 이어, 학성, 총석정, 삼일포, 영랑호, 양양, 임영, 죽서루, 정선을 각각 노래했다. ‘관동별곡’은 ‘실재하는 자연을 주관적 흥취로 여과하고 관념화하여 나열하여, 그 미감을 절도 있게 표출함으로써 사대부 특유의 세계관을 작품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海千重(해천중) 山萬壘(산만첩) 關東別境(관동별경)
碧油幢(벽유당) 紅蓮幕(홍련막) 兵馬營主(병마영주)
玉帶傾盖(옥대경개) 黑槊紅旗(흑삭홍기) 鳴沙路(명사로)
爲(위) 巡察景(순찰경) 幾何如(기하여)
朔方民物(삭방민물) 慕義趨風(무의추풍)
爲(위) 王化中興(왕화중흥) 景幾何如(경기하여)

바다 겹겹 산 첩첩인 관동의 절경에서
푸른 휘장 붉은 장막에 둘러싸인 병마 영주가
옥대 매고 일산 받고, 검은 창 붉은 깃발 앞세우며 모래사장으로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쫓네.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 ‘관동별곡’ 제1장

 

이 노래는 형식상 여러 가지 파격을 보인다. 이 같은 정제되지 않은 형식은 경기체가 장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한다. 실제 노래할 때, 제1장의 4구와 6구는 각각 ‘위 순찰ㅅ경 긔 엇더니잇고’와 ‘위 왕화중흥ㅅ경 긔 엇더니잇고’로 불리었을 것이다.

 

‘관동별곡’에는 피폐한 현실이 없다

 

‘관동별곡’은 송강의 가사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일대의 풍치를 찬양하고 그 자연 속을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죽계별곡’과 함께 양반들의 한가한 생활 풍경과 현실 도피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근재의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에 실린 한시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당대는 외세의 압박과 외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의 횡포에다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 등이 그치지 않는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걸식, 권문의 종이나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피폐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근재는 <관동와주>의 한시에서 존무사로 강원도를 돌면서 목격한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구제 창생의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안축의 ‘관동별곡’에서는 피폐한 민중의 모습이나 고뇌하는 관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경기체가라는 장르의 제약이라고도 하고, 여말 신흥사대부 문학의 양면성으로도 설명된다. 현실의 부정적 요소들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개혁해 나가는 한편, 자신들의 위치나 풍류가 고려 후기 권문세족에 못지않음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는 것이다.

▲ 소수서원 경렴정 건너편의 취한대(翠寒臺). 퇴계가 세운 정자다 . 정자 앞을 흐르는 시내가 죽계천이다 .
▲ 죽계구곡에서 초암사로 오르는 길. 찔레가 탐스럽게 피었다.
▲ 소백산 죽계구곡에 세워진 '죽계별곡' 시비

근재가 ‘죽계별곡’을 지은 것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충목왕 4년(1348)으로 추정한다. 고향인 죽계(순흥)의 경치를 읊었는데, 여말 신흥사대부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감정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한림별곡’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한림별곡’이 여럿이 놀이를 벌이는 자리에 돌림노래로 지어진 것인데 반해 안축의 ‘죽계별곡’은 개인이 창작한 노래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죽계별곡’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제2장은 누·대·정자 위에서의 유흥, 제3장은 향교에서 유생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을 뜯는 모습을 노래한다. 마지막 제4장과 제5장은 천 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과 성대(盛代)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각각 노래한다. 다음은 우리말로 풀어낸 노래다.

 

제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永嘉 : 안동)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 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순흥의 옛 이름)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翠華)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安胎)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淸白之風)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2장
숙수사(宿水寺)의 누각과 복전사(福田寺)의 누대(樓臺) 그리고 승림사(僧林寺)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草菴寺)와 욱금계(郁錦溪)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聚遠樓) 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高陽)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 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죽계별곡’은 죽계 지방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신흥사대부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 과시를 드러내면서 태평성대의 향유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흥사대부의 부상은 결국 뒤에 조선조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죽계별곡’, 노래는 남았으나 역사는 덧없어라

 

근재 안축의 문학은 고려시대 경기체가의 형성과정과 함께 신흥사대부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한문과 이두로만 전승된 까닭에 후대의 독자들과는 그리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문학을 고작 ‘관동별곡’·‘죽계별곡’이라는 제목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경기체가라는 장르의 한계 탓이다.

 

순흥에 더 이상 안축의 자취는 없는 듯하다. 우리는 인근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을 찾는다. 동방유학의 비조 안향을 모신 이 서원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는데 안축과 그의 아우 안보를 배향한 것은 1544년이다.

▲ '죽계별곡'을 새긴 소수서원의 바위들

서원 입구 소나무 숲 오른편에 보물 제59호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가 있다. ‘죽계별곡’ 제2장에 나오는 그 절집이다. 이 절은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어도 근재가 ‘죽계별곡’을 노래하던 시절까지는 숙수사는 산문을 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 옆 서원을 끼고 흐르는 내는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초암사와 죽계구곡을 거쳐 온 죽계천(竹溪川)이다. 죽계천은 만만찮은 곡절과 한을 품고 있는 내다. 1457년(세조 3),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가 이 고을과 내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부는 불타 폐부가 되었고, 숱한 백성들이 무참히 타살되었다. 피가 이 시내를 적시고 흘러, 십 리 아래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동)’까지 이어졌다 하니 이 조그만 고을을 덮친 참화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서원 입구의 정자, 경렴정 맞은편의 ‘경(敬) 자 바위’에는 ‘백운동(白雲洞)’ 석 자 아래 ‘경 자’가 새겨져 있다. 정축지변 후, 희생당한 부민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 자를 파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위혼제를 지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소수서원 경내를 지나 선비촌으로 가는 길은 죽계천을 따라 나 있다. 그 길가에 군데군데 앉힌 커다란 바위에 안축의 ‘죽계별곡’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바위를 흘낏 일별하고는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여전히 그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시를 새긴 돌비의 행진이 끝나는 길 저편, 느티나무 고목 주변에 단풍이 짙어져가고 있다. 거기 막힌 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이 계절을 환기해 본다. 시나브로 겨울이 오고 있다. 700여 년 전, 근재가 읊은 ‘죽계별곡’은 태평성대의 사계를 노래하면서 맺는다.

 

제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 동이 앞에서 긴 봄날 하루 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 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어 비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大平)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잇길 . 가을이 쓸쓸하게 저물어가고 있다 .

‘붉은 살구꽃’의 봄, ‘여름의 훈풍’, 가을의 ‘기러기’, 겨울의 ‘눈’을 그리면서 시인은 중흥의 성대를 노래하고, 그 사계를 즐기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반세기를 지나지 않아 고려 왕조는 그 명운을 다했으니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한갓진 노래의 울림은 참으로 덧없이 새겨질 뿐이다.

 

2009. 11. 3. 낮달

 

 

숱한 백성이 무참히 죽어 원혼이 떠돌던 곳

[경북 북부지역의 시가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죽계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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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시가 기행 ①] 송암 권호문의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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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안동 시가 기행 ⑥] 존재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산중잡곡(山中雜曲)」

[안동 시가 기행 ⑨] 내방가사 「덴동 어미 화전가(花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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