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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시골 벽화마을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있다

by 낮달2018 201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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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 벽화마을

*사진은 클릭하면 큰 사이즈(1000×664)로 볼 수 있음.

 

지난주에 벽화마을로 알려진 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를 다녀왔다. 구미에서 거기 닿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약목을 찾은 건 거의 수십 년 만인 듯했다. 예전에는 구미에서 왜관으로 가려면 북삼과 약목을 거쳐야 했지만, 낙동강 강변에 우회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거길 지나갈 일이 없어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문득 해직 시절에 동료들과 고물 승합차를 타고 약목의 남계지에 들렀다가 차가 진구렁에 빠져 고생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때 함께 했던 ‘3장 1박’ 중에서 한 친구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우리가 건너온 세월이 만만찮다는 얘기다.

 

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 벽화마을

 

남계리가 벽화마을이라는 것은 지난 4월에 김천시 자산동 벽화마을을 검색하면서였다. 구미에서도 약목은 지척인데 그런 마을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궁벽한 시골 마을이라서 소문이 덜 난 걸까. 내가 확인한 경북의 벽화마을로는 안동의 신세동 성진골과 김천 자산동에 이어 남계리가 세 번째다.

 

   *성진골 관련 글 : 여기 알아? 동네 사람들이 벽 속에 있어

   *자산동 관련 글 : 오래된 도시, 그 벽화마을의 적요

 

▲  경상북도 칠곡군의 읍면 지도

약목(若木)은 내 고향 석적읍에서 보면 낙동강 건너편 고장이다. 약목은 일찌감치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석적에 비기면 아주 일찍 개명했다. 석적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였는데, 아주 어릴 적에도 낙동강 건너 약목은 전깃불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에 즐겨 불렀던 유행가가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었다. 그 가사 가운데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같은 구절의 이미지를 나는 한밤에 바라보는 강 건너 약목의 불빛으로 이해할 정도였다.

 

약목에선 정오와 자정에 사이렌도 울렸다. 우리는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로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그 사이렌을 우리는 ‘오종(午鐘)’, 또는 ‘오포(午砲)’라고 불렀다. 아마 약목면사무소쯤에서 울린 소리겠는데 그게 왜 석적에선 울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강 건너 불빛을 바라보며 도회의 이미지를 그렸던 소년이 60대 초로가 되는 세월이 흘렀다. 2016년 현재 약목은 여전히 면인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깡촌 석적은 여러 해 전에 읍으로 승격했다. 2016년 4월의 인구는 약목이 1만1천, 석적이 3만3천이다. 물론 구미와 잇닿아 있는 지형적 조건으로 인구가 급격히 는 덕분이다.

 

하긴 선선군 구미면이 어느덧 구미시 선산읍이 되어버린 세월이다.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변했다. 마을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안의 삶은 상상보다 훨씬 많이 달라졌다. 시골이라지만 이제 시골에서 옛 시골의 정취나 인심을 기대하는 게 쉽지 않아진 것이다.

 

내비게이션은 이내 나를 남계2리 어귀에 데려다주었다. 두만천(川)을 경계로 면사무소가 있는 복성리와 붙어 있는 남계2리는 해방 후에 생긴 동네라 하여 해방촌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골목길에 담장 벽화가 조성된 것은 2010년과 2011년에 시행된 사업의 결과다.

 

‘살기 좋은 마을 조성과 안정적인 일자리 제공’을 위해 시행된 이 사업으로 마을 안 골목길 담장 2.5km에 걸쳐 벽화가 그려졌다. 지역 공동체 일자리 사업 근로자와 벽화 전문 인력이 동원되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의 주제는 십장생도, 풍속화, 우시장, 장터 풍경 등이다.

 

고단한 삶이 드러나는 골목길

 

김천 벽화마을을 다녀와 썼듯이 벽화마을은 ‘마을의 외부 경관을 개선하고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다. 따라서 벽화마을은 역사가 오래되고, 전체적으로 퇴락한 마을이 ‘기본 전제’다.

 

남계2리 해방촌도 다르지 않다. 블록이 드러나는 낡은 담장 가운데 아직도 곳곳에 흙담이 남아 있는 골목길은 쓸쓸하고 고즈넉했다. 낡고 곰삭은 슬레이트집 사이에 어쩌다 새로 지었으나 비슷비슷한 모양의 슬래브 집이 이어진 골목길은, 이 나라 시골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따가운 햇볕을 정수리에 고스란히 맞으며 마을을 두어 바퀴 도는 동안 나는 동네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일터에 간 것일까. 골목길에선 마을의, 마을 사람들의 일상의 고단하고 거친 삶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허물어지거나 기울어진 블록 담장과 금이 간 시멘트벽, 짙은 이끼가 낀 담장 밑에 고인 건 삶의 무게다. 드러난 서까래와 낡아 바스러질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과 그 위로 어지럽게 엉켜 있는 전깃줄 사이로 우리가 지나온 삶이 보이는 듯했다.

 

낡아빠진 담장과 벽을 색색의 페인트로 덧칠했다고 해서 고단하고 피폐한 삶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 경관을 개선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일까. 안내판은 그게 ‘깨끗한 마을 이미지 조성’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깨끗한 마을 이미지는 주민들의 것일까, 외부에서 온 방문자의 것일까.

 

마을이, 마을 사람들이 가난해 보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그것은 이 나라 농촌 마을 대부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고, 그들의 삶도 평균적인 수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불로 향한다는 이 나라 시골의 주거 환경은 여전히 20세기의 그것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 부모님과 이웃, 나 자신이 있었다

 

벽화마을은 거기 사는 사람들과 동네를 위해 조성되었지만 철저하게 외부 사람들에 의해 소비된다. 마을 사람들에겐 일상의 풍경일 뿐이지만, 나들이객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색다른 정취를 맛보고 가는 것이다. 그럴듯한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 조그만 마을이니 나들이객들의 방문이 마을에 보태줄 일도 없을 것이었다.

 

한 시간 남짓 마을을 둘러보고 떠나는데 뭔가 마을에 정리하지 못한 빚을 남기고 떠나는 기분이 든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그냥 이 마을의 풍경을 나의 방식으로 소비하고 떠나는 것이니까.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 마을의 골목길에 깃든 풍경 속에서 만난 것은 내 부모님이나 이웃이었다는 걸. 한편으로 그것은 시골 마을에서 자란 어느 날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걸 말이다.

 

 

2016. 6.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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