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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과 황장목…, ‘금강소나무’는 있다!

by 낮달2018 201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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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소나무, 춘양목, 황장목 무엇이 다른가

▲ 금강소나무. 황장목, 또는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최상의 목재다 .
▲ 금강소나무 탐방로로 오르는 산길은 이제 막 봄빛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

봉화 서벽리의 금강소나무 숲을 다녀온 건 지난 4월이다. 봄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사위는 잿빛이었다. 애당초 강릉 쪽을 겨누었던 발길을 경북 북부의 골짜기로 돌린 것은 수백 리 길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꿩 대신 닭이긴 했지만, 금강소나무 숲을 떠올린 건 며칠 전 일간지에서 읽은 소나무 숲길이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4월 중순, 봄바람의 훈기에도 골짜기의 얼음은 상기도 녹지 않았다. 막 새잎이 돋는 나무들, 하얗고 노랗게 꽃을 피운 나무들의 실루엣이 마치 그림 같았다. 주말인데도 철 늦은 진달래가 막 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한산한 숲길을 찾은 이는 우리 가족뿐이었다.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 봉화 서벽리 금강소나무 숲

 

기사를 읽고 봉화로 차를 몰면서 나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그리면서 은근히 들떠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수산 ‘국민의 숲’ 어귀로 들어서면서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관리소를 지나자마자 탐방로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펼쳐진 풍경은 상상 속의 그림과는 꽤 멀었던 것이었다.

 

이 소나무 숲이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관리소에서 나누어준 안내서의 제목이 “‘100년 후 영광’을 위한 기다림”이었던 까닭도 그것이었다. 문수산 금강소나무 집단 생육지는 2001년 경복궁 등 주요 문화재용으로 소요되는 목재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되었다고 했다.

▲ 춘양목 전시장 앞에 세워진 솟대 . 나뭇가지로 만든 오리가 소박했다 .

본디 봉화의 금강소나무가 ‘춘양목(春陽木)’, 혹은 ‘춘양재(材)’라 불리게 된 것은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외지로 반출되어 그 품질이 전국의 도편수들로부터 호평을 얻으면서부터다. 이후 춘양목이 최상의 목재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숭례문 복구 사업 등에서 보듯 대형 목조 문화재 복원에 필요한 춘양목은 태부족이다. 이런 문제를 넘기 위해서 산림청은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일대에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을 조성한 것이다. 전체 면적 101ha에 이르는 이 숲 가운데 80ha, 평균 지름 46cm(38~66cm), 평균 높이 21m(19~30m)의 금강소나무 1,488그루가 문화재용 목재로 지정되어 자라고 있다.

 

‘100년 후의 영광’을 기다리는 지정목들

 

문화재용 목재는 특대재의 경우 지름 42cm 이상 72cm 내외의 크기다. 금강소나무는 미송보다 횡인장 강도가 2배 이상 강하여 건축물의 변형이나 파괴 없이 구조물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나이테의 폭이 작을수록 강도는 강해지고 아름다운 무늬를 갖게 되므로 오래 묵은 나무일수록 가치가 높다.

 

지정목에는 일련번호가 부여되어 있는데 밑동에 노란 페인트 띠를 두른 나무들이 그것이다. 문화재용 벌채 매각은 문화재청의 요청이 있을 때 합동 조사하여 결정한다고 한다.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곧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100년 후의 모습을 그리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삶에서도 100년은 긴 세월이니 그 100년 후의 영광이야 말해 무엇하랴.

▲서벽리의 금강소나무에는 지정목에는 일련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
▲ 금강소나무는 흔히 '적송'이라고도 불리지만 이는 잘못된 이름이라고 한다 .

금강소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기림을 받는다. 그러나 자랄 때와 달리 벌목 이후에는 여느 소나무와 구별이 힘들어서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다. 지난해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그 현판이 3개월을 못 넘기고 균열이 생기면서 이른바 ‘금강송’ 논란이 인 것이다.

 

광화문의 복원을 맡았던 유명 대목장은 ‘금강송이란 나무는 실체가 없는 나무’라며 충격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수종 분석이 쉽지 않긴 하지만 식물분류학에서 ‘금강송’은 분명히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수종이다. 금강송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반 소나무와는 모양새가 확연히 다르므로 소나무 원종과 다른 한 품종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춘양목, 황장목…, ‘금강송’은 있다!

 

금강산에서 경북 북부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자라는 금강송은 줄기가 수직으로 곧고 지면에서 큰 나뭇가지(으뜸가지)까지의 높이가 높다. 줄기의 중상단부는 껍질이 얇고 붉은색을 띠며 일부는 회갈색에 거북등(6각형) 무늬로 갈라진다. 나무속은 짙은 황갈색이고, 나이테가 일반 소나무에 비겨 3배나 촘촘하여 뒤틀림이 적고 강도가 높으며 쉽게 썩지 않는다.

 

금강소나무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이름도 여러 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속이 누런 황금색이라 하여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하고 금강송을 줄여 ’강송‘이라고도 한다. 춘양에서 많이 생산된다 하여 ’춘양목‘이라 부른다는 건 앞서도 말했다. 그런데 겉이 붉은빛을 띤다고 ‘적송(赤松)’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란다. 적송이나 육송(陸松) 등은 모두 소나무를 한자로 적을 때 쓰는 별칭일 뿐이라는 것이다.

 

금강소나무의 가치는 특히 보존성에서 두드러진다. 금강소나무의 보존성은 400년이 지난 조선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장목 관의 나이테가 그대로 보였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 600년이 넘은 봉정사 극락전이나 경복궁에서 사용된 금강소나무를 다시 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니 그 가치는 탁월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금강소나무는 춘양면 서벽리뿐 아니라, 소천면 고선·대현리(2,157ha),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346ha) 등의 생태 경영림에서도 자라고 있다. 특히 울진 소광리(2,274ha) 생태 경영림은 조선시대부터 금강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황장봉산으로 지정 관리하여 온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관련 글 : 울진 소광리의 금강소나무 숲]

▲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 경영림 (2,274ha).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

한국인의 삶과 함께한 소나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삶과 어우러진 가장 가까운 나무였다. 한민족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와 함께했다. 소나무 들보를 얹은 집에서 태어나고, 푸른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 안에서 세상의 첫날을 맞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산모의 첫 국밥은 물론이거니와 조리하는 데 마른 솔잎이나 솔가지는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흉한 보릿고개를 넘는 데는 물오른 송기가 허기를 달래주었다. 덕분에 산림이 황폐해지기는 했지만, 소나무는 훌륭한 땔감으로 긴 겨울을 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나무 관에 담겨 소나무 숲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땔감뿐 아니다. ‘관솔’이라고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가 있다. 송진 때문에 불이 잘 붙으므로 예전에는 여기에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이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송명(松明)’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소나무는 우리네 민족의 삶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 춘양목 전시장 내부. 송판에 탐방객들의 글귀가 남았다 .
▲ 아내가 준비한 도시락. 나와서 마시는 도시락은 맛이 좋다.

출발이 늦어지다 보니 서벽리에 닿았을 때는 정오가 겨웠다. 우리는 막 숲 해설안내소에 도착한 숲 해설사 분의 조언에 따라 탐방로 어귀의 춘양목 전시장의 탁자에서 싸간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 흰밥과 상추와 나물 반찬, 그리고 과일만으로도 산속에서의 오찬은 정갈하고 푸짐했다.

 

전시장 안에는 탐방객들이 써 놓은 글귀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놀랍게도 그 글귀는 금강소나무로 켠 송판에 쓰였고, 그 송판은 전시장 곳곳에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가족들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고, 명품 금강소나무와 숲을 기리거나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내용 등이었다.

 

숲 탐방로는 약 1.5Km. 아내도 아이도 걷는 걸 썩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여서 우리는 가볍게 산에 올랐다. 밋밋한 산길 주변에 선 금강소나무는 아직 풋풋한 청춘들이었다. 거리도 짧았지만, 탐방로는 인공의 흔적이 깊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자리한 쉼터를 빼면 길은 소박하게 구불구불 산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산등성이로 올랐나 싶은데 이내 하산길이다. 좀 가파르다 싶은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산어귀로 이어지는 큰길이다. 길가에 노란 생강나무 꽃이 한창이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에서 사춘기 남녀를 품어 안았던 그 꽃그늘이다.

▲ 서벽리의 생강나무 꽃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이 바로 이 꽃이다 .
▲ 호젓한 산길을 함께 걷고 있는 아내와 아들.

사진기를 들고 궁싯거리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는 저만큼 앞서가고 있다. 왼편으로 꺾이는 솔숲 길을 돌아가는 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쩐지 그 풍경이 허허롭다. 아이가 쓴 밀짚모자 탓일까, 그것은 늘 길 위에 서 있는 우리네 삶의 쓸쓸한 실루엣처럼 느껴졌다.

 

내가 서벽리 금강소나무 숲의 ‘100년 후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네 삶은 그보다 훨씬 유한하고 짧은 까닭이다. 글쎄, 10년이나 20년 후쯤에 이 금강송 숲을 다시 찾으면 그 10년, 20년의 세월의 부피를 이 숲에서 찾을 수 있을지……. 우리는 해가 한참이나 남아 있는데도 서둘러 서벽리의 춘양목 숲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2011. 7. 7. 낮달


또 지각답사기다. 지난 4월 16일에 다녀온 봉화 서벽리를 복기했다. 그것은 시간의 복기고, 감정의 복기이기도 하다. 7월, 석 달 전의 풍경이나 그걸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결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복기는 쇠잔해 버린 감정의 불꽃, 그 재 위에 세우는 담담한 반추다. 다만, 그게 성찰에 이르지 못함을 아쉬워할 뿐……

‘금강송(金剛松)’과 ‘황장목(黃腸木)’

 

‘금강송(金剛松)’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 산림학자 우에키 호미키(植木秀幹·1882∼1976)가 붙인 이름이라며 “금강소나무, 황장목으로 부르자”라고 제의한 것은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다.

 

금강송(금강소나무)은 식물분류학에서 정의하는 학명으로 ‘백두대간 금강산에서 경북 영덕에 걸치는 산악지대에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이다. 손 기자는 ‘금강소나무는 학문적 개념’일 뿐 ‘유전적, 형태적 특징’은 없고 ‘지역적 구분’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2019년 치악산국립공원의 ‘금강소나무 숲길’을 ‘황장목 숲길’로 이름을 바꾼 것은 치악산에서 황장목 부르기 운동을 시작한 까닭이다. 황장목숲길걷기축제추진위원회 김대중(56) 위원장의 다음과 갈같이 주장했다.

 

“치악산에서 황장금표가 3개, 인근 영월에서 2개가 발견됐습니다. 치악산 자락에서 황장금표 5개가 발견된 것입니다. 치악산에서 황장목 부르기 운동을 시작한 까닭입니다. 원주는 더욱이 옻의 고장입니다. 임금의 관은 옻칠한 황장목을 썼습니다. 금강송이 학명이라 해도 일제 때 일본인 학자가 붙인 이름입니다. 우에키 호미키 이전에는 어떤 기록에도 금강송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이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간지 등 매체들은 ‘금강송’을 쓰고 있다. 위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이름을 바꿀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가능하면 바꿔서 쓰는 게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걸 강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중앙일보> 기사 원문을 읽어보고 판단해 보시길…….

 

민족의 나무도 일제 잔재···“금강소나무, 황장목으로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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